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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자기신체접촉의 몸짓언어

  • 입력 2009.09.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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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자기접촉이란 자가 자신의 몸과 몸이 접촉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의 몸과 접촉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타인과의 신체접촉은 선뜻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대개 자기가 행하는 행동에 대해서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행한다. 그러나 자기접촉은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루어진 자기접촉에 대해서 거의 인식하지 못하여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즉 자신을 어루만지거나, 붙잡거나, 껴안는다 해서 자신에게는 별로 느낌이 가는 것이 없다. 그러나 자기접촉이 무의식적인 것이라고 해서 그것이 중요하지 않거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계기가 되어 자연스럽게 기분이 전환되기도 하고 대인관계가 편해지기도 한다.

자신을 감싸고 쓰다듬어주는 행위, 자기신체접촉
어려서는 놀라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부모가 안아 주거나, 부드럽게 쓰다듬어주거나, 애무하여 주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안정감과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어른이 되어서 가끔 불안과 고독을 느낄 때면 생각나는 것이 부모의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이다. 하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지속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의 팔과 손이 있어 자신의 몸을 감싸고 껴안고나, 문지르고나, 만지면 마치 다른 이와의 접촉과 같은 효과를 얻게 된다.
자기접촉은 심한 슬픔이나 고독 또는 스트레스를 받았을 때 이를 스스로가 풀기 위한 수단으로 행하기도 한다. 마치 두 사람이 포옹을 하듯이 몸을 구부려서 두 손으로 다리를 감싸는 것은 극단적인 형태의 자기포옹행동이다. 가슴 앞에 방벽을 만드는 팔짱끼기 동작에도 자기접촉이라는 위안의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것은 마치 절반쯤 자기를 껴안고 있는 것과 같다.
몸의 어떤 부분과 다른 부분을 접촉시키는 동작에는 모두 그런 효과가 있으며 그것은 얼마쯤의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예컨대 긴장했을 때 우리는 손가락을 깍지 끼거나 한쪽 손바닥을 다른 손바닥으로 꼭 쥐거나 함으로써 자기 손으로 자신을 붙잡게 된다. 또 모든 형태의 허벅지나 다리의 교차도 한쪽 다리의 표면이 다른 다리에 유쾌한 압박을 느끼게 하는 자기 친밀감을 주게 된다.
이것은 마치 가려울 때 자기 몸을 긁어주는 것처럼 지쳐 있을 때 자신을 감싸고 쓰다듬어 주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거장들의 작품 중에서 자기접촉의 동작을 표현한 그림이 있어 이를 보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작품 가운데는 원래의 뜻은 자기접촉을 표현하려 한 것은 아니나, 객관적으로 보기에는 자기접촉의 몸짓 언어를 설명하는데 매우 적합하게 잘 표현 되었다고 보여 지는 것을 택하였다는 것을 사전에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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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조각가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조각 작품으로 ‘칼레의 시민’ (1885~1895)이라는 유명한 작품이 있다. 작품의 주인공인 6명의 시민은 조국과 동포를 위하여 초개같이 자기의 목숨을 내놓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인데 이들이 목숨을 바치기 위하여 적에게 투항하기 직전 죽음에 직면한 희생자들의 내면세계를 표현한 것이다. 그림의 맨 뒤의 아드리외 당드레라는 사람은 자기의 머리를 자기 손으로 감싸고 있다.
이렇게 머리나 뺨을 손으로 감싸는 자기접촉은 심한 슬픔을 느낄 때나 실수를 했을 때 또는 다른 사람에게 무안을 당했을 때 자신을 위로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괜찮아, 잘 택했소”, “하는 수 없는 거야”, “ 그럴 수도 있는 것이지 뭐...” 등의 말을 함께 하면 웅크려졌던 가슴이 풀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로댕의 작품 ‘이브’는 자기의 경솔한 행동 때문에 에덴동산을 버리게 되었고 전 인류가 두고두고 고역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에 자책감을 느끼며,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양팔로 자신의 가슴을 엇갈려 안고 있다. 눈을 감고 자신의 가슴에 집중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보는 것 같다.
이러한 자기접촉의 몸짓 언어는 어려움이 있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진심으로 자신을 북돋워 주는 행동으로 나무 데 없는 방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외면을 당해도 내가 너를 지켜주겠다”는 다짐은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자기신체접촉은 그 순간의 심리상태를 나타내기도
로댕의 작품 ‘웅크리고 있는 여인’(1880~82)은 한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 자기의 발목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가슴을 쓰다듬고 있다. 이러한 자기접촉의 동작은 놀랐을 때, 가슴이 두근거릴 때 벌석 주저앉아 자신을 진정시키는 방법으로의 몸짓언어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생겨 얼마나 놀랐는가? 그래 이젠 괜찮아”라는 마음으로 가슴을 위에서 아래로 쓸어내리면 두근거리던 가슴이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벨기에의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작품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1615)라는 것이 있다. 왕명을 어기고 여호와를 찬양하고 기도하였다는 죄로 그림의 주인공 다니엘은 사형선고를 받고 사자 굴에 던져졌다. 그는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자들이 득실대는 속에서 손을 모우고 허벅지를 겹치는 자기접촉을 하면서 여호와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사자들은 고귀한 선구자를 해치지 않아 다음날 몸에는 아무런 상처하나 없이 사자 굴에서 걸어 나왔다는 것을 표현한 그림이다. 물론 다니엘이 손과 허벅지를 겹치는 자기접촉을 하였다고 해서 사라난 것은 아니겠지만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은 사자 굴에서 위험을 느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하게 되는 것이 손이나 발 또는 허벅지의 자기 접촉으로 자기의 최선의 노력으로서 간절한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것이 잘 표현된 그림이다.
또 사람들은 피곤할 때면 털썩 주저앉아 손이 머리나 뺨에 가게 된다. 이러한 자기접촉의 몸짓언어를 잘 표현한 것으로는 영국의 화가 레이턴 경(Sir Fredric Leighton 1830~96)의 ‘파티시다’(1894)라는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림의 주인공 파티시다 라는 여인은 사람들의 미래를 점쳐주는 점쟁이 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녀의 옷차림이나 발치에 있는 월계수, 금속성의 삼발이 향로, 고급스러운 의자 등의 가구로 보아 상당한 재력을 지닌 여인으로 보인다. 또 그녀의 눈은 총명하게 빛나고 있어 그녀의 통찰력과 예지력이 오늘의 그녀의 재력을 있게 하였음을 간접적으로 암시한다. 그러나 온몸을 의자에 매끼고 힘없이 주저앉아 양팔을 의자손잡이에 올려놓고 한손을 자기 볼에 대어 자기접촉을 하는 포즈로 보아 오늘 하루의 일이 피로했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또 어떻게 보면 다소 거짓말을 한 자신의 양심이 부끄러워 한 손과 얼굴의 자기 접촉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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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인정보다 행복감 느끼게 하는 몸짓언어
누구나 피곤하거나, 불안하거나, 스트레스를 느낄 때 다른 사람이 안아 주거나 잔등을 두드리며 격려하여 주면 다소나마 마음이 진정되는 것을 느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에게 병이나 치료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말로만 하기보다는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거나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신체접촉을 하면서 설명을 하면 두근거리던 심장박동수와 혈압이 내리더라는 보고가 있다.
이러한 것을 남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자기접촉의 한 방법으로 하여도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자기 손으로 자기의 몸을 두드려 주는 것은 몸의 혈액순환이 제대로 되지 않을 때 무의식중에 나오는 동작이다. 가슴이 답답할 때 심장부근을 쓰다듬거나 가볍게 두드리게 되는 것도 손이 알아서 자연스럽게 이런 동작을 취해주는 것이다. 어깨나 팔을 두드리거나 주물러주거나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쓸어주는 것은 피곤을 느낄 때 그 부위의 혈액의 흐름이 원활해지는 것을 느끼게 한다.
또 머리를 쓰다듬는 자기접촉은 인간의 자기 접촉 방법 중 가장 흔히 하는 방법이다. 뿌듯한 일을 했을 때 자신이 스스로를 인정 해주는 경우이면 자신도 모르게 손이 머리로 가 쓰다듬게 된다. 이러한 자기접촉의 몸짓언어는 타인이 인정을 해 주는 것보다 훨씬 더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에는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