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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세상에 손 내밀어 어둠을 밝히는 노래, ‘사랑으로’

사랑을 위하여

  • 입력 2009.10.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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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 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그러나 솔잎하나 떨어지면 눈물 따라 흐르고 우리 타는 가슴 가슴마다 햇살은 다시 떠오르네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2절)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영원히 변치 않을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아 아 라라 라라라 라라라 라라 우리들의 사랑으로 어두운 곳에 손을 내밀어 밝혀 주리라 이주호 작사·작곡, 해바라기 노래의 <사랑으로>는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나왔다. 4분의 4박자, 슬로우 리듬인 이 곡은 조용한 분위기의 서정적인 가요다.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한국 사람라면 누구든 따라 부를 수 있는 유명한 국민가요다.이 노래는 지난 8월 18일 별세한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5월 23일 세상을 떠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사람의 애창곡은 살아온 인생역정과 지향을 반영한다고 한다. 이를 감안해볼 때도 두 분은 노랫말 그대로 생전에 ‘사랑’을 많이 강조했다. 특히 서민들에 대해서다.이 노래는 지난 5월 29일 노 전 대통령의 국민장 때 시청 앞 광장에서 울려 퍼졌다. 고인은 <작은 연인들>, <울고 넘는 박달재>, <상록수> 등과 함께 노래요청이 있을 때면 <사랑으로>를 불렀다. 노 전 대통령 노제 식전행사 때 추모곡을 부르기로 했던 이주호는 운동 중 어깨를 다쳐 불참했다.김 전 대통령도 1990년대 들어서부터 이 노래를 가끔씩 불렀다.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온 그는 <선구자>, <고향의 봄>도 부르곤 했다. 특히 ‘호남의 한’을 대변하는 <목포의 눈물>은 대표애창곡이다. 또 국악에도 일가견 있어 장구, 꽹과리를 두드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1997년 대통령선거 때 전남 진도의 한 행사에서 꽹과리를 신명나게 쳐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8월 18일 권노갑, 한화갑, 한광옥, 김옥두 의원과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김 전 대통령에게 드린 마지막 인사도 ‘사랑’이다. ‘사랑해요’란 고별인사를 받은 고인은 그날 오후 1시 43분께 편안히 눈을 감았다. 네 딸 중 세 명은 목숨 건져 <사랑으로>가 국민애창곡이 됐지만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상당수 사람들이 남녀사랑과 이별을 그린 것으로 알지만 그렇잖다. 노래가 만들어진 뒷면엔 슬프고도 가슴 아픈·가난한 한 가족의 이야기가 깔려있다. 지금으로부터 21년 전인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88서울올림픽’ 열기로 온통 들떠있었던 무렵이다. 서울 공항동의 한 동네에 아주 가난했던 6명의 환경미화원 가족이 살고 있었다. 거리청소를 위해 꼭두새벽부터 엄마, 아빠가 일을 나가자 집에 있던 4명의 딸들이 자살기도를 한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다행히 3명은 목숨을 건졌지만 안타깝게도 3살짜리 막내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사연은 신문, 방송 등을 통해 삽시간에 알려졌다. 세계적인 축제 속에서도 행사개최지인 서울의 한 지역에선 잔치분위기와 전혀 동떨어진 ‘슬픔의 사건’이 벌어져 국민들의 가슴을 저미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그때 마침 이 뉴스를 듣고 있던 그룹가수 ‘해바라기’의 리더 이주호 씨의 마음을 울렸다. 그는 너무도 슬픈 나머지 예전에 만들어 놨던 곡에 <사랑으로>란 불후의 노랫말을 만들어 발표했다. 작사, 작곡에다 노래까지 불렀다. 그가 만든 노랫말 중 ‘솔잎 하나 떨어지면’이란 구절은 세 살짜리 어린아이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음반이 나오고 노래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파를 타고 대중들에게 다가서면서 연일 상종가를 쳤다. 급기야 초등학교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불후의 명곡이 됐다.우리가 삶을 살면서 그냥 모른 척 지나쳐서 그렇지 파헤쳐보면 평소 부르는 대중가요 노랫말 속엔 저마다 사연들이 숨어있다. 보통 사람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를 때 멜로디와 가사가 자신의 처지와 같거나 비슷한 것을 선곡하곤 한다.노 전 대통령 장례 때 <사랑으로>가 불린 건 숨진 환경미화원 딸처럼 우리 시대에 다시는 일어나지 말아야할 안타깝고 불행한 일이란 대중들의 정서가 깔렸다는 시각도 있다.노래를 만들고 부른 이주호 씨는 1956년 8월 17일 서울서 태어나 명지전문대 전자계산학과를 졸업했다. 2004년 해바라기뮤직 대표이사에 취임한 그는 1990년 아시아태평양방송연맹가요제 최우수가수상, 1992년 한국노랫말대상을 받기도 했다. <모두가 사랑이에요> 등 수 많은 히트곡들이 있다.그의 외아들 이상(27.본명 이상수) 씨도 가수다. 데뷔앨범 타이틀곡은 그의 부친이 소속된 해바라기의 히트곡 <행복을 주는 사람>(1983년). 아들이 R&B와 힙합 느낌을 살려 리메이크한 곡에 아버지 이 씨가 부분적으로 함께 불렀다. 데뷔앨범의 작사, 작곡, 프로듀싱은 모두 이상 씨가 했다. 그는 이주호 씨와 윤재니(51)씨 사이에 태어났다. 윤 씨는 미국인선교사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1980년대 라디오 DJ로 활동했다. 이상 씨는 이국적 외모 덕분에 패션모델로도 잠시 뛰었다. 이후 밴드를 이끌며 CM송을 작사 작곡했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운 그는 중학교 2학년 때 클래식을 전공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하지만 클래식 대신 흑인음악, 컴퓨터음악에 빠졌다가 음악장비를 잔뜩 사들고 귀국해 방향을 바꾼 게 드러났다. [1R]해바라기, 4인조 혼성그룹으로 시작한편 이주호 씨가 이끈 해바라기는 1970년대 4인조 혼성그룹으로 시작됐다. 이정선, 이주호와 블루스적 음색으로 바꾸기 전의 한영애, 김영미가 뭉친 것이다. 1980년대로 넘어가기 직전의 포크음악 절정기를 누리면서 각자의 길을 걸었다. 1982년 이주호, 유익종의 듀엣으로 해바라기 이름을 이어갔다. 이광준, 심명기, 강성운에 이르기까지 아름다운 노랫말, 서정적인 멜로디, 뛰어난 하모니로 30여 년 사랑받고 있는 그룹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84년 젊은이의 가요제 은상, 1986년 및 1987년 KBS가요대상 및 한국연예협회 가배상 수상 등이 실력과 인기를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