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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손의 감지도와 신체접촉의 몸짓언어

  • 입력 2009.10.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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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사람의 몸 가운데 가장 활발하고 부단하게 움직이는 부위는 아마도 손일 것이다. 즉 손은 지칠 줄을 모르고 사람의 생각대로 하기위해 쉬지 않고 움직인다. 그래서 통계에 의하면 한평생 손이 구부렸다 폈다하는 굴신운동(屈伸運動)의 회수는 무려 2,500만 번이나 된다고 한다.
사람의 손은 27개(양측 54개)의 작은 뼈들과 그물같이 퍼진 인대(靭帶), 그리고 근육과 가느다란 신경으로 구성되며 신체의 다른 부위보다도 뇌와의 신경접속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손을 사용한 몸짓이나 몸놀림에는 그 사람의 솔직한 마음이 표현되게 되어있으며 열이나 아픔 그리고 접촉에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한다.
사람이 지닌 감각을 동원하지 않고 단지 손과 손가락만을 사용한 감지능력을 알아보면 우선 어떤 물체에다 손을 대고 손을 좌우로 움직임에 따라 그 물체의 성상을 알 수 있고, 그 물체를 늘여봄으로써 그 물체의 경도(硬度)를 알 수 있으며, 손을 물체 한 곳에 접촉시키고 정지된 상태를 지속함으로써 그 물체의 습도를 감지 할 수 있다. 또 물체를 손으로 들어 올려 봄으로써 그 물체의 중량을 알 수 있고, 그 물체를 감아서 쥐어봄으로써 그 물체의 형태나 현상 그리고 체적(體積)을 감지 할 수 있으며, 그 물체의 가장사리를 만져봄으로써 물체 전체의 크기와 생긴 모양을 감지 할 수 있다.

#1. 장님 조각가
이렇듯 사람의 손은 그 단독으로도 물체의 성상을 알아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손의 능력을 잘 표현한 화가의 작품이 있다.
스페인의 화가 리베라 (Jusepe de Ribera 1591-1652)의 ‘장님 조각가’(1632)라는 작품을 보면 시력이 없는 장님이 양손으로 고대 그리스의 조각으로 보이는 두부석상(頭部石像)의 표면을 만지며 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그 본질적인 형태와 전술한바와 같은 손의 촉감만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항들을 충실히 탐색하고 있다. 더욱이 이 장님조각가는 백발에다 무성한 수염으로 보아 다년간에 조각에 종사하였으며 그 모든 조각을 단지 손의 촉감에 의존하여 온 그 경력을 짐작할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눈이지만 반쯤 뜨고, 미간(眉間)에 잡힌 깊은 주름, 그리고 굳게 다문 입으로 보아 그 두부석상의 특징을 완전히 파악하여 앞으로의 자기작품에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우고 있다. 즉 보지 못해도 손의 촉각만으로 감지된 감만으로도 원하는 조각은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손은 일부러 뒷짐을 짓는 경우를 제외하면 언제나 몸의 앞에 위치하게 되기 때문에 손의 몸짓이나 놀림은 쉽게 다른 이에게 감지되게 되어있다. 따라서 손이 자기신체에 대하여 행하여지는 자기접촉은 쉽게 다른 이의 눈에 띠게 되는데 자기도 모르게 행하여지는 무의식적인 손의 자기 몸에 대한 의미를 알아보기로 한다.
우선 그 접촉하는 신체의 부위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지는데, 우선 손과 손이 접촉하는 것과 손과 신체의 다른 부위의 접촉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로 한다. 손과 손이 접촉한다는 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 손에 자극을 주어 주의력을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이 된다. 즉 주의력을 자기에게 집중하여 생각을 정리하는데 보조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손과 손의 자기접촉이 지나치게 과도하면 생각은 정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산만해져 고민하는 몸짓언어가 된다.
[2L]#2. 노인의 초상
이러한 손과 손의 자기접촉을 강하게 하여 자기의 고민을 표출한 것이 잘 표현된 화가의 작품으로는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z van Rijm 1606-1669)가 그린 ‘노인의 초상’(1626)을 들 수 있다.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을 그리는 모델이 되어 일부로 고민스러움을 나타내려한 것은 아니겠지만 자기의 양 손을 강하게 자기접촉하고 있으며 이마에 잡힌 이맛살로 보아 무엇인가 고민스러운 것이 있다는 표현으로 전달된다.
그 외관으로 보아 늙었다는 것이 고민이 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이유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사람은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으면 활성화산소가 생겨 세포를 망가트리기 때문에 늙지 않을 수 없으며 이것은 현 단계의 의학이나 생물학적 수단으로서는 어이할 수 없는 한계이다. 따라서 이러한 실정을 깊이 인식하고 그 한계를 넘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이러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면 그것이 고민이 되어 그림의 모델이 되는 순간에 자기도 모르게 손의 강한 자기접촉으로 그 고민이 표출 되였는지도 모르겠다.

#3. 기도하는 성모
손의 자기접촉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도 올릴 때의 손의 합장(合掌)이 지니는 몸짓언어이다. 어떤 종교에 있어서도 합장하여 양손의 바닥을 자기접촉 시키는 것인데 원래 손바닥을 의미하는 장掌의 뜻은 마음을 뜻하는 것으로 손바닥은 사람의 마음이 나타나는 표현기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수나 포옹과 같이 손바닥으로 다른 이의 신체와 접촉한다는 것은 나의 마음이 당신을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손바닥이 자기를 향하면 예를들어 가슴위에 얹어 놓으면 자기의 마음의 상태를 심중하게 생각한다는 몸짓언어가 되는 것이다.
원래의 그리스도교에서의 기도는 양손의 손가락을 깍지 끼고 합장하여 몸 앞에 가볍게 붙이고 기도하는 것인데, 그 기원은 옛날의 포로(捕虜)로 잡히면 손을 결박되었던 것을 흉내 내였다는 것으로 결국은 손을 결박하여 자기를 헌신적으로 신에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는 몸짓언어라는 것이다. 이것이 변화되어 손의 깍지를 끼지 않고 가볍게 양손을 모으는 것으로 변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합장기도를 잘 표현한 작품으로는 17세기 이탈리아의 화가 사소페라도(Giovanni Battista Salvi Sassoferrato 1609-1685)의 ‘기도하는 성모’ (1655)라는 그림이 있다. 붓놀림 하나하나가 어쩌면 그리도 깊은 명상의 빛을 담고 있는지 참으로 감탄을 금할 수 없는 표현이다.
[3L]#4. 나폴레옹의 초상화
또 손과 신체의 다른 부위와의 자기접촉의 작품으로는 프랑스의 화가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6)가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 (1812)라는 것이 있는데 나폴레옹은 조끼의 단추를 풀고 오른손을 그 속에 넣고 손과 몸의 자기접촉을 하고 있다. 다비드가 그린 이 초상화에서 보는 것과 같은 즉 오른손을 올려 조끼에 넣고 있는 자세가 이른바 ‘나폴레옹 포즈’라고 부르게 되었다.
화가가 왜 이런 자제의 초상화를 그렸는가 하면 나폴레옹은 어려서부터 몹시 신경질적이었으며 경련을 자주 일으키고 만성적인 위통과 배뇨 장애(排尿障碍)가 있었다고 한다.
1796년에서 1814년까지 그의 군의관이었던 아렉산돌 우르방 이반이 남긴 기록에 ‘황제는 매우 신경질적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감정에 영향을 받았으며 이럴 때마다 위와 방광에 경련을 일으키건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런 증상은 전쟁을 앞두고서는 더욱 심해 졌다고 한다.
1802년에 기록된 그의 비서였던 푸리엔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 나폴레옹에게는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우측 상복부에 격심한 통증이 생겨나 이럴 때마다 그는 조끼의 단추를 풀고는 책상에 기대고나, 의자에 팔꿈치를 대고 왼손을 윗도리 밑으로 넣어 통증이 있는 부위를 만져서 통증을 가라앉게 하기 위해 애쓰곤 했다는 것이며 그러다가 누가 찾아오면 옷을 단정히 하고 오른손을 조끼 단추가 풀린 사이에 넣고 접견을 하였다는 것이다. 즉 아픈 부위와 손의 자기접촉으로 아픔을 가라앉히곤 한 것이다.
다비드가 1812년에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는 이러한 그의 독특한 손의 자기접촉을 그린 것으로 나중에는 이것이 나폴레옹을 상징하는 포즈로 되었는데 실은 그의 위통을 참고 완화시키기 위한 데서 나온 포즈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