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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60년을 이어온 진정한 국민가요, 신라의 달밤

  • 입력 2010.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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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아~ 신라의 밤이여

불국사의 종소리 들리어온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

고요한 달빛 어린 금옥산 기슭에서

노래를 불러본다 신라의 밤 노래를

(2절)

아~ 신라의 밤이여

아름다운 궁녀들 그리웁구나

대궐 뒤에 숲속에서 사랑을 맺었던가

님들의 치맛 소리 귓속에 들으면서

노래를 불러보자 신라의 밤 노래를


<신라의 달밤>은 우리나라 가요계 거목인 현인(1919~2002년 4월 13일, 본명 玄東柱) 선생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이다. 60여년의 세월을 이어오며 국민가요로 사랑받고 있다. 모임이나 노래자랑 때 단골노래로 등장한다. 요즘엔 젊은 사람들도 리메이크 된 음반덕분에 수십 년 세월을 뛰어넘어 애창하는 노래다.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져 1948년 발표된 이 노래는 광복(1945년)이후 우리나라 최초의 히트가요다. 하지만 여러 사정으로 음반은 1949년 4월에야 본격 팔렸다.

원 제목 <인도의 달밤>

유호 작사, 박시춘(본명 박순동) 작곡으로 4분의 2박자 스페인 리듬인 볼레로 풍으로 나간다. 하지만 이 노래의 원 뿌리는 해방 전에 나왔던 조명암 작사의 <인도의 달밤>이다. <신라의 달밤> 원래제목인 셈이다. 문제는 조명암이 월북하는 바람에 <인도의 달밤>은 물론 그와 관련된 모든 작품들이 금지곡으로 묶였다. 박시춘은 차선책으로 곡의 제목을 <신라의 달밤>으로 바꾸고 작사가도 유호로 바꿨다. 박 선생이 작사가에게 “이제 광복도 됐으니 우리 것을 되찾자”며 노랫말과 제목을 새로 바꿔 붙인 것이다. 박 씨가 작곡가로 활동했던 럭키레코드에 유호 씨가 한때 문예부장으로 근무해 노래를 쉽게 손볼 수 있었다.해방의 감격을 찬란했던 신라의 추억에 실은 이 노래는 현인 선생의 독특한 창법으로 주가를 높였다.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현 동경음악학교)에서 정규 성악공부로 기초실력을 다진 데다 특유의 바이브레이션과 스타카트창법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참신한 멜로디에다 그의 시원한 얼굴생김새도 한몫했다. 작곡, 작사, 노래를 하는 싱어송라이터 현인 선생이 첫 무대에서 9번의 앙코르를 받은 일화는 가요계에서 유명하다. 배우로도 활동했던 그는 ‘해방 전 남인수, 해방 후 현인’이란 소리를 들을 만큼 우리나라 가요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 노래는 남북을 잇는 분위기 곡으로도 한 몫 했다. 2005년 8월 16일 8.15 민족대축전에 참석했던 북측대표단이 그날 1박2일 일정으로 경주를 찾아 이 노래를 불렀다. 북쪽 단장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 등 북측대표단은 고양시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8.15민족대축전 폐막식에 참석한 뒤 전세비행기로 그날 밤 경주에 도착했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 안내로 천마총 안을 둘러보고 <신라의 달밤>을 부르며 우의를 다졌다. 그날 밤 경주 한정식 집(요석궁)에서 이의근 경북도지사 등과 경주 교동법주를 들며 남북화해와 협력을 약속했다.

노래가 수십 년간 불리며 유명해지자 2001년 봄 노래비가 경주시 불국동에 세워졌다. 불국사로 들어가는 로터리에 서 있는 이 비엔 노래사연과 가사가 적혀있다.

또 노래와 같은 제목의 영화도 나왔다. 2001년 6월 23일 개봉된 ‘신라의 달밤’은 김상진 감독 작품으로 이성재, 김혜수, 차승원, 김윤성 등이 출연한 폭력코미디물이다. 고교시절 경주수학여행을 갔던 두 친구가 10년만에 다시 만나 벌이는 ‘주먹 사건’이 재미를 더해 준다. 성, 돈, 폭력이 적절히 가미된 영화로 관객들의 환영을 받았다.

혀 짧은 소리, 턱 떨며 부르는 창법

특히 노래를 부른 현인 선생은 얘기가 많은 분이다. 일제 강점기 때부터 노래활동을 시작한 가수 1세대다. 혀 짧은 소리에 턱을 떨며 부르는 창법은 후배가수와 코미디언들이 자주 흉내 낼만큼 독특해 대중들에게 뚜렷이 각인돼있다. 1919년 부산 영선동에서 태어난 그는 구포초교,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일본 우에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정통음악도 출신이다.

창법이 서양성악에 바탕을 둔 것이어서 신민요나 트로트 등 기존 가요와 달리 시원한 맛을 내며 해방 후 가요계에 새바람을 일으켰다. 고교시절 군사훈련시간에 나팔을 잡은 게 인연이 돼 연예계에 입문했다. 그는 우에노 음악학교를 마치고 일본의 징용을 피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가 샹송, 칸초네를 부르며 가수활동을 했다. 해방이 되자 귀국한 그는 ‘고향 경음단’이란 7인조 악단을 만들어 UN군 위문공연에 참여했고 팝송을 레퍼토리로 극장무대서 활동했다. 성악을 전공한 음악도가 유행가를 부를 수 없다며 자존심을 지키던 그는 작곡가 박시춘 씨 권유로 <신라의 달밤>을 취입, 단숨에 인기가수가 됐다. 이후 <비 내리는 고모령> <고향 만 리>, <굳세어라 금순아>, <전우야 잘 자라>, <럭키 서울>, <서울야곡>, <인도의 향불>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부르며 한국동란으로 실의와 절망에 빠졌던 서민들을 위로했다. 그렇게 해서 남긴 노래는 1000여곡. <베사메무초>, <고엽> 등 생소하던 서구의 샹송, 칸초네, 탱고 등을 소개한 노래도 꽤 있어 선구적 월드뮤지션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데뷔 50주년을 맞은 1991년 <노래하는 나그네> <길> 등 신곡을 발표하며 노래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당뇨병으로 고생해온 그는 2년 전 악극 ‘그때 그 쇼를 아십니까’에 출연한 것을 끝으로 현역생활을 접었다.


현인 노래비·동상 부산, 대구, 경주에 우뚝

1999년 대한민국 연예대상(문화훈장)을 받은 ‘국민가수 현인’을 기리는 노래비와 동상이 부산, 대구, 경주에 세워졌다. 고향인 부산에선 2005년 8월 제1회 현인가요제까지 열려 노래로 환생하고 있다. 부산 영도다리 옆 기념동상은 관광지로 길손들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신라의 달밤> 작곡가 박시춘 선생도 유명한 분이다. 3000여곡을 작곡,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주춧돌이자 기둥이다. KBS가 ‘가요무대’ 800회 기념으로 펴낸 ‘가요무대 100선집’엔 그의 곡이 15곡이나 실렸다. 1980년대 MBC가 조사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20선’에도 6곡이 들어갔다. 1982년 대중가요작곡가론 처음 문화훈장 보관장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실려 논란이 되고 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대상 친일대중음악인으로 분류된 것이다. 1943년 ‘조선지원병 실시 기념음반’에 담긴 곡 중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아내)> <목단강 편지> 등 그때 대표적 친일가요를 작곡했다는 이유다. 반면 나라 잃은 설움을 노래로 어루만졌는데 친일로 모는 건 잘못된 것 아니냐는 반론도 만만찮다. 친일인명사전 논란이 불거지던 지난 10월 21일 박시춘의 삶과 음악을 재조명, 재평가하는 행사가 열렸다. 한국가요작가협회(회장 김병환) 가 주최한 ‘박시춘 학술심포지엄’에서 일제통치 말 위협과 탄압에 버틸 수 있었던 사람은 이 땅에 없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 때의 작곡이나 부역은 강제로 이뤄진 것으로 싸잡아 친일로 보는 건 잘못이란 얘기다. 행사장엔 유족대표로 박 씨의 셋째 딸(박미연 씨)이 참석했다.

가요 1세대 작곡가인 박씨는 1913년 10월 28일 경남 밀양서 태어나 1996년 6월30일 별세했다. 이름자 시춘(是春)은 ‘늘 봄이란 뜻의 필명이다. 작곡데뷔작은 1935년 8월 발표한 <희망의 노래>다. 그의 노래를 불러 시대를 풍미한 가수는 현인, 남인수, 백난아, 백설희, 황금심, 김정구 씨 등이다. (사)한국가요작가협회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지상 2층으로 박시춘기념관을 지을 계획이다. 고인의 유품을 위주로 영상기록물, 작품(악보), 생존 때 쳤던 기타, 옷, 소품 등을 전시하고 공연장도 만든다. 박시춘기념관추진위원회가 구성되는대로 공사에 들어가 박 씨 출생 100년이 되는 2012년 10월 28일 준공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