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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향수 달래주는 대중가요 대명사, 타향살이

1934년 12월 음반 제작…원 제목은 <타향>

  • 입력 2010.0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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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난 십 여 년에 청춘만 늙어


(2절)


부평 같은 내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3절)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버들피리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4절)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며칠 있으면 설이다. 지난해도 그랬던 것처럼 우린 또 한 살을 더 먹게 된다. 타향살이를 하는 이들에게 명절은 왠지 쓸쓸하고 울적해진다. 북에 고향을 둔 사람, 해외교포들은 더 그럴 것 같다.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 고복수 노래의 <타향살이>는 고향을 떠나 삶을 꾸려가는 타관객지사람들에게 딱 들어맞는 가요다. 고향과 고국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대중가요의 대명사로 노래가 만들어진지 80년이 다 돼 가지만 꾸준히 애창된다. 이 노래는 4분의 4박자인 다른 대중가요들과 달리 4분의 3박자 왈츠풍이어서 특이하다.


중국 용정공연 때 30대 여성 찾아와


노래가 만들어지기까지엔 애틋한 사연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인 1933년 어느 날 고복수가 중국의 용정에서 공연 중이었다. 무대 뒤로 30대의 한 아녀자가 찾아왔다. 그녀는 ‘고향이 부산’이라며 고복수에게 고향집 주소를 적어줬다. 남편을 따라 고향을 떠나온 지 10년이 흘렀는데 남편과 사별하고 가난에 지쳐있었다. 이제 고향으로 갈 돈도 없다며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그러고는 며칠 뒤 그녀를 다시 볼 수 없었다. 자신의 신세를 비관해 자살한 것이다. 고복수가 이 사연을 작사가인 김능인 선생에게 전해줬다. 얘기를 들은 김 선생이 음악적 감각으로 만든 노래가 바로 <타향살이>다. 노래가 음반으로 처음 발표된 건 1934년 12월. <타향살이>의 원 제목은 <타향>이었다. 그러나 <이원애곡>의 뒷면 노래로 실렸다가 시대상황과 맞아떨어져 뒤늦게 빛을 봤다.


[1L]고복수는 일제강점기 때 만주에서 이 노래 한 곡으로 한 무대에서만 33번의 앙코르를 받았던 세계가요사상 유례가 없는 국민가수로 기록되고 있다. 곡 흐름도 좋았지만 노랫말 내용이 나라를 잃고 억압과 설움에 찬 민족의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일본침략을 피해 고향에 살지 못하고 천리만리 떠나 사는 겨레의 ‘망향 신세’를 노래한 것이어서 크게 히트한 것이다. <타향살이>는 멜로디가 짧고 쉬워 한번만 들으면 누구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다. 일제강점기 때 타향살이의 설움을 받던 사람들은 모두 이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설움을 달랬다. 만주 하얼빈공연 때 객석은 울음바다가 됐고 열 번이나 <타향살이>를 불러야 했다.


이 노래는 프로레슬링선수였던 김일(2006년 10월 26일 77세로 별세) 선생이 특히 좋아했다. <황성옛터>와 함께 즐겨 듣고 애창했다. 홀로 일본으로 가 세계 레슬링계를 평정했던 그가 얼마나 고향을 그리워했는지를 말해준다. 2006년 2월 10일 이 사실이 고복수 선생 아들 고영준 씨에게 전해졌다. 고 씨는 사흘 뒤 김 선수가 투병 중이었던 서울을지병원으로 달려가 병실에서 <타향살이>를 불러줬다.


<타향살이>는 창작악극으로도 공연돼 또 한 번 인기를 모았다. 한국연극협회 울산지회가 2006년에 이어 2008년 9월 23일 밤 울산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에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슬픈 사랑 이야기를 추억의 노래와 함께 펼쳤다. 태화강 뱃사공과 한 여인의 가슴 아픈 사랑을 주제로 한 이 공연은 울산지역밴드의 라이브연주와 무용인들 춤, 변사의 해설이 곁들여져 볼거리였다. 최주봉, 정재화 등 인기연예인들이 출연했다.




부인 황금심, 아들 고영준 등 음악가족


울산시는 송정동 일대에 고복수 선생을 후세대들에게 알리는 역사공원 조성이 들어갔다. 2011년까지 만들어질 공원엔 고인과 조선 초기 대마도 왜적소탕에 공을 세운 무관이자 외교가인 이예(1373∼1445년) 등 9명의 울산출신 인물 동상들이 세워진다.


노래로 서민의 애환과 향수를 노래로 달랜 가수 고복수(1911~1972년)는 울산군 하상면 서리(울산시 중구 서동) 22번지 태어났다. <타향살이> <황성옛터> 등 주옥같은 곡으로 망향의 한을 달래면서 <알뜰한 당신> <울산 큰 애기> 등을 부른 부인 황금심(1934~2001년) 여사와 활발한 공연활동을 펼쳤다. 그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감옥살이를 했을 만큼 올곧은 가수다. 그는 두 아들을 뒀다. 큰 아들(고영준 씨)은 가수로 활동 중이다. 막내아들(고병준 씨(41세, 음악감독, 본명 고흥선)은 태국 쓰나미로 저세상 사람이 됐다. 고병준 씨는 예비신부와 2004년 12월 19일 푸껫으로 단체관광을 가 21일 카오락으로 개별관광을 떠나 숨졌다. 그는 TV드라마 ‘다모’의 음악을 만든 작곡가였다. 그의 형이 귀국예정일을 넘겨도 동생이 돌아오지 않자 현지로 가 시신을 확인했다.


고복수 부부는 1930년대 말부터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 공연활동을 했다. 일본·만주·사할린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다. 한국전쟁 때 고복수는 인민군에 붙잡혀 의용군으로 북으로 끌려갔다 북진하던 국군 낙하산부대원들에 의해 포로수용소행 일보직전에 구출된 사연도 있다. 이후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 군 위문연예대원으로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1953년 황금심은 박시춘 작곡의 <삼다도 소식>을 발표하면서 가요계 여왕으로 부러움을 샀다. 마이크보다 육성공연을 고집했던 그녀는 1950년대까지 4000여 곡을 발표, ‘꾀꼬리의 여왕’이란 별명으로 1960년 아시아영화제초대가수로 무대에 섰다.




경연대회 입상해 데뷔한 최초 가수


고복수는 신인가수 경연대회 입상을 통해 데뷔한 국내 최초의 가수다. 스타부부 1호로 금실 좋고 모범적인 삶으로 후배들에겐 귀감이 됐다. 그는 울산에서 잡화상을 하는 집에서 태어났다. 키 크고 얌전하던 그는 마을뒷산 언덕에 올라가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다. 울산병영초등학교에서 4학년까지 다니다 5학년 초 부산내성초등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줄곧 컸다. 보통학교시절 남다른 음악적 재질을 보이기 시작했다. 노래를 배우기 위해 울산 장로교 합창단에 들어갔다. 그땐 음악학원이나 개인교습소가 없던 시절이라 교회에서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 연주법을 익혔다. ‘창가 잘 부르는 학생'으로 소문난 그는 울산실업중학교에 특채로 입학하고 1930년 부산 동래고보를 졸업했다.


1932년 콜롬비아레코드사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전국 신인가수선발대회가 사상 최초로 열렸다. 노래 잘하는 23살의 청년 고복수는 부산 경남 예선에 나가 1등을 했다. 9개 도시에서 3위까지의 입상자 27명이 최종 경합을 벌이는 전국대회에 나가기 위해 부친의 가게에서 거금 60원을 훔쳐 상경했다. 그는 남자론 유일한 2위 입상자였지만 찬밥신세였다. 1위를 한 정일경, 3위를 한 조금자만 특별방송출연과 요란한 취입곡 홍보로 관심이 쏟아졌다. 고복수는 1934년 4월 소공동 공회당에서 동아일보 학예부가 연 ‘당선가 발표 음악대회’ 때 <서울의 노래> <비연> <소쩍새 우는 밤>을 불렀다. 콜롬비아의 경쟁사인 OKHE 레코드의 이철 사장은 노래를 듣고 반했다. 콜롬비아의 인기가수 채규엽, 강홍식에 필적하는 남자가수로 고복수를 스카우트했다. 1934년 12월 그의 데뷔 SP음반이 발표됐다. 손목인 작곡의 타이틀곡 <이원애곡> <타향> 등 2곡을 담은 음반은 단시일에 2만장이 팔려나갔다. 타이틀곡보다 뒷면의 <타향>에 대한 반응은 대단했다.


울산에선 그를 추모하는 ‘고복수 가요제’가 1987년부터 해마다 열리고 있다. ‘이난영 가요제’, ‘남인수 가요제’와 함께 전국 3대 가요제의 하나로 많은 신인가수들을 배출하며 고인의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