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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로댕의 작품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려다보는 사람’

  • 입력 2009.1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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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불안하고나 긴장이 높아지고나 당혹스러울 때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몸에 손을 대게 된다. 이러한 손과 몸의 자기접촉이 가장 왕성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갓난아기시절로서 아기는 자기의 몸을 인식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자기 몸에 손을 댄다. 그러나 실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태아시절에도 손을 입이나 얼굴에 대건하였으며, 태어나서 깨어있는 동안의 약 20%라는 시간은 손을 얼굴에 댄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 행하는 자기 자신의 신체접촉 중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자주하게 되는 것은 얼굴과 손의 자기접촉인 것이다.

손을 얼굴에 댄다는 것은 손과 얼굴의 두 피부가 서로간의 자극으로 인해 즉 손의 운동감각과 얼굴의 촉각이라는 지각이 만나 협동하여 자기의 몸을 인식하고 이 정보를 뇌에 전달하여 어떤 상황의 자기라는 것을 재인식하게 되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손을 뒤통수(후두부)에 댄다는 것은 ‘아차 실수’, ‘모르겠다’, ‘야단났구먼!’ 등의 몸짓언어가 된다. 그러나 손이 뺨이나 턱으로 내려오면 의미는 달라진다. 즉 손을 뺨이나 턱에 대는 자기접촉은‘명상(瞑想) 중’, ‘생각 중’이라거나 ‘깊은 사고에 잠겨있는 중’이라는 몸짓언어가 된다.


그런데 그 생각이 어떤 생각인가의 종류에 따라 손과 얼굴의 자기접촉이 나타내는 형태는 달라지고 그 의미도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긍정적인 감정의 표정이 주로 얼굴의 우측에, 그리고 부정적인 감정의 경우는 주로 좌측에 잘 나타난다는 것과 같이 궁정적인 상황에서의 손과 얼굴의 자기접촉은 우측에 그리고 부정적인 상황이라면 좌측을 자기접촉하게 된다는 것이다.



# ‘풀 리비어’와 ‘레이턴 경의 초상’


[1L]미국의 화가 코플리(John Siongleton Coply 1738-1815)의 작품 ‘풀 리비어’(1768)를 보면 그림의 주인공인 리비아라는 청년은 소매가 다 낡은 리넨 옷을 입고 은주전자를 들고 있는데 이것은 당시 영국이 미국으로 하여금 리넨 생산을 금지한 것에 대한 항의와 이러한 저항 행위를 기념하고 미국의 자유의 상징을 보여주기 위해 자기의 은세공 기술을 과시하기 위해 은주전자를 들고 있는 그림이다. 그러면서 턱을 손바닥 측의 우측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들 사이에 대고 눈을 부릅뜨고 자기가 한 지금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과시하고 있다.


[2L]또 영국의 화가 왓츠(Frederick George Watts 1817-1904)는 같은 화가인 레이턴 경(Sir Fredric Leighton 1830-96)의 초상화 ‘레이턴 경의 초상’(1871)을 그리면서 그의 좌측 뺨과 턱을 좌측 손바닥의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들 사이에 대고 있는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그의 표정으로 보아 무엇인가 슬픈 부정적인 환경에서의 생각을 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듯 두 사람의 그림들은 그 생각하는 주인공들의 손과 얼굴의 자기접촉은 좌측과 우측이라는 손을 대고 있는 부위는 다르지만 모두가 턱과 뺨을 손바닥 측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들 사이에 대고 있는 공통점이 있다.



‘카미유 클로델의 머리와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과 ‘생각하는 사람’


[3R]손과 얼굴의 조각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조각가 로댕(Augusts Rodin 1840-1917)은 손의 조각을 통하여 슬픔, 괴로움, 절망, 포기, 수용, 결단, 확신 등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의 흔들림까지도 손의 조각을 통해 표현하는 그야말로 손 조각의 달인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표현한 것이 ‘카미유 클로델의 머리와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1900경)이라는 작품이 있다. 즉 카미유는 자기의 제자이자 모델이며 내연의 처이었다. 그녀의 머리에다 피에르 드 위상의 왼손을 붙여서 이제는 혼자의 자유로운 여자가 아님을 표현하여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넘볼 수 없음을 암시한 것이다. 이렇듯 그는 손과 얼굴의 조각으로 여러 걸작을 탄생시켰다.


그의 유명한 조각 작품 ‘생각하는 사람’(1880-1917)은 생각하는 사람의 손과 얼굴의 자기접촉의 의미를 한층 더 깊이 생각하게 한다. 실은 이 작품은 처음부터 독립된 작품으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지옥의 문’(1880-1917)라는 작품의 상단에서 생전의 죄에 대해서 벌을 받는 지옥 속의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사람의 운명을 통찰하는 사람으로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이 ‘생각하는 사람’은 높은 곳에서 밑의 인간 세계를 ‘내려다보는 사람’인 것이다.


‘지옥의 문’은 단테의 ‘신곡(神曲)’ 중 지옥 편을 토대로 만든 작품으로 이 문의 높이는 390cm이며 등장하는 인물만도 무려 186명이나 되어 사랑과 질병, 죽음의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인간군상을 조각하였으며 ‘생각하는 사람’은 신곡을 쓴 단테를 모델 삼은 것으로 전해진다.



기존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4R]실은 ‘지옥의 문’에 나오는 군상 중에는 ‘생각하는 사람’ 이외에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입맞춤’, ‘세 망령’ 등이 있어 로댕의 수많은 작품의 원천인 셈이다.


이 작품은 ‘지옥의 문’ 위에서 지옥을 내려다보며 지옥 같은 이 세상을 어떻게 고칠 것인가를 깊은 고뇌로 생각하는 모습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더구나 로댕은 그 당시 프랑스의 존경받던 사회주의자인 쟝 조래스(1859~1914)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을 내세우며 이를 강조하는 경향이다. 또 그림의 해설에 의하면 로댕이 ‘생각하는 사람’을 제작하기 전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산로렌조 성당에 있는 메디지 가(家)의 무덤의 ‘로렌조 데 메디치의 좌상’(1524-31)이라는 대리석조각을 참고하였다고 하는데 그 작품 역시 위에서 밑을 내려다보는 자세로 턱에다 손바닥 측 좌측 엄지손가락과 다른 손가락들을 벌려서 그 사이에 넣고 앞서의 생각하는 그림들과 다름이 없는 얼굴과 손의 자기접촉을 하는 모습으로 조각되어 있다.


그러나 ‘생각하는 사람’의 경우는 그의 오른손의 손등 측의 수지부(手指部)를 완전히 턱밑으로 넣고 중수부(中手部)끝으로 턱을 밭치고 있으며 손목은 ㄱ자로 꺾이고 있다. 즉 전술한 그림들에서 보는 것과 같이 손바닥 측의 손가락이 얼굴에 접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손등 측이 접촉되고 있으며 그것도 턱에 대고 있는 우측 팔과 손등을 직각으로 구부려 세워서 턱을 받들어 마치 턱에다 작대기를 댄 듯한 인상으로 앞서의 ‘생각하는 사람’들의 그림이나 미켈란젤로의 조각 작품과는 다른 모습이다.


‘생각하는 사람’을 우측에서 관찰하면 허리와 잔등을 구부리고 얼굴은 밑을 향하고 있으며 그의 눈길도 밑으로 주고 있다. 또 잔등과 측복부의 근유들에 힘을 주어 그 근육들이 어떤 근육인가 근육의 이름을 알 수 있으며 발바닥에도 힘을 주어 특히 우측 발가락들은 구부러져 있다. 특히 호흡과 관계되는 측흉부의 대원근(大圓筋)이나 광배근(廣背筋)에는 힘이 가해져 돌출되어 그 근육들의 주행방향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흉부근육들에 힘을 주게 되면 호흡하기가 곤란해진다.



로댕의 작품에 주물사인 류디에가 제목 잘못 붙여 생긴 오류


[5R]이 ‘생각하는 사람’이 호흡이 곤란한 상태에 있다는 표현으로는 그 복벽(腹壁)에도 힘이 들어가 뒤로 당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복벽과 장등과 측흉부의 근육 모양으로 라면 횡격막도 움직일 수가 없어 호흡곤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자세이며 이런 상태로는 무엇을 생각하기는커녕 살아가는 것이 문제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마치 생각하는 사람으로 이해하게 된 것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우선 ‘생각하는 사람’을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의 일부로 높은 곳에 있는 것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된 작품으로 평지에 놓고 서의 관찰이고 보면 일시 흥분된 상태로 전신에 힘을 주고 ‘내려다보는 사람’의 개념은 없어지고, 무엇인가 심각한 것을 생각하는 것으로 오해하게 마련이다. 또 더욱 중요한 이유는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은 로댕이 아니라 이 작품의 주물(鑄物)을 뜬 류디에 라는 주물사(鑄物士)에 의해 붙여진 것인데 마치 로댕이 붙인 것으로 잘못 전해져 오늘에는 ‘내려다보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람’으로 둔갑하여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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