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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간지럼의 몸짓언어

  • 입력 2009.1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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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어려서는 간지럼(tickling) 타기를 하며 놀았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간지럼 타기는 어머니가 아기에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자라서는 친구들과 노리로 하게 되며 성인이 되어서는 연인들 사이에서 하게 된다. 이렇듯 간지럼은 친밀한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며 낯이 선 사람과는 이루어질 수 없는 특징을 지녔다.

따라서 간지럼의 몸짓언어는 한마디로 친밀감의 표현이며 그것이 더욱 친밀해 질수 있다는 것을 예고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애정이 담긴 행위 이지만 간지럼에는 두 요소가 함축되어 있는데 그 하나는 웃음이라는 궁정적인 요소와 다른 하나는 불쾌라는 부정적인 요소이다.


어린이에게 간지럼을 태우면 깔깔대며 웃으면서도 그 장면을 피하려는 도피행동으로서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을 본다. 이 때 보는 도피행동은 간지럼 때문에 생기는 불쾌감을 없이하려는 자기방어반응이며 한편 나타나는 웃음은 ‘즐겁다’, ‘더 계속 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때의 웃음은 단순히 즐거워서 웃는 것과는 다르다. 즉 즐거워 마음에서 우러나 웃는 경우의 표정과 즐겁지는 않지만 마지못해 건성으로 웃을 때의 표정의 두 표정은 다른데, 간지럼으로 웃을 때는 이 두 가지 표정이 모두 나타난다. 즉 감각적으로서는 불쾌감이 들지만, 놀이로써의 즐거운 감정이 혼합된 표정인 것이다.


간지럼에 있어서의 쾌와 불쾌의 두 요소 중에 어느 것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가는 간지럼을 태우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작용한다. 즉 친밀한 사람의 경우라면 놀이로써의 즐거움이 더 강하게 작용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간지럼을 태운다면 감각으로서의 불쾌감이 더 우세하게 작용하여 간지럼은 타지 않게 되며 또 자기의 행위에 의해서도 간지럼은 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간지럼이 인간관계에 의해서 어떻게 영향 받는가에 대해서는 아직 모르는 것이 많아 최근에는 ‘간지럼 감각’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가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때까지의 알려진 사실을 요약하면, 사람의 피부에는 압각(壓覺), 통각(痛覺), 온각(溫覺) 등의 감각기는 있으나 간지럼에 대한 감각기는 없다. 그러나 실제 있어서는 간지럼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러한 감각들이 공동으로 작용하는 복합적인 감각에 의해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단순히 두드리거나, 압을 가하거나, 문지른다고 해서 간지럼을 타는 것이 아니라 친밀관계에 있는 사람이 가볍게 압을 가하면서 손을 움직여야한다. 즉 손을 움직여서 가하는 자극의 변화가 있어야한다는 등의 복합적인 요소가 간지럼 감각 생성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사람이 진화되는 과정에서 ‘아픔’에서 ‘가려움’이 생겨나고 ‘가려움’에서 파생적으로 진화되어 생겨난 것이 ‘간지럼’으로 보는 경향이다. 그래서 피부에 파리나 모기, 이나 벼룩 등의 해충이 붙으면 처음에는 간지럼을 느끼게 되는데 이것은 해로운 것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 때 재빨리 제거하면 되지만 그것을 감지 못하여 쏘이거나 물리면 그 자리에는 가려움이 생겨난다.


이러한 해충이 몸에 작용하였을 때의 간지럼 때문에 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서 해충을 잡는 것을 그린 거장의 작품이 있어 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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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룩 (1707-09)’과 이(蝨) 잡는 소년(1645-50)


18세기 이탈리아의 사실주의 화가 크레스피(Gluseppe Crespri 1665-1747)의 그림‘벼룩 (1707-09)’을 보면 한 부인이 잠자리에 들려다가 벼룩의 침입으로 몸이 간지러워 이를 잡기위해 옷을 헤치고 살피고 있다.


또 스페인 바로크의 대표적 화가 무릴료(Bartolome Esteban Murillio 1617-1682)의 작품 ‘이(蝨) 잡는 소년(1645-50)’을 보면 그림의 좌측 창에서 밝은 햇빛이 들어오고 바닥에 자리하고 앉은 소년의 더럽혀진 발과 누더기 옷은 소년의 처지를 말해 줘 사람들의 동정을 사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소년은 아무런 걱정 없는 표정으로 한가로이 옷에 붙어 있는 이를 잡고 있는 모습에서 수식하고나 미화하지 않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스페인 화가들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해충이 우리 몸에 침범하려 할 때 간지럼은 그 해충들에 의해서 파생될 가려움(물리거나 쏘였을 때)이나 아픔(그것에 2차 감염 등으로 화농 하였을 때)에 대한 것을 사전에 알려주는 신호로서의 몸짓언어로 작용하게 된다.


사람의 발가락과 발바닥은 촉각적 자극에 성적으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신체적 부위이며 발에는 1평방 인치당 수천 개의 민감한 말초신경이 모여 있는데, 이는 신체의 어느 부위보다도 조밀한 것이다. 발은 이처럼 민감한 감각 기관이기 때문에 관능적인 의사소통을 하려는 욕구와 능력이 엄청난데, 이것은 우리가 쉽게 알 수 있다.


가령 양손으로 철봉에 매달리면 발과 땅의 표면의 접촉이 떨어지기 때문에 발의 접촉 감각을 잃어버리게 되며 이것은 현실 세계와 연결이 떨어진 것으로 감각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현실 세계와 신체의 세계 및 뇌의 의사소통 통로가 발과 지표면 접촉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이다.


또 우리가 고층건물에서 빨리 하강하는 엘레베이터을 타서 발에서 체중을 빼앗길 때, 우리는 이상한 기분을 느낀다. 이것은 안전의 축을 이루는 접지(接地) 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발바닥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촉각이 예민한 부위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발의 간지럼으로서 성적 흥분을 유발하기 위해 동물의 부드러운 깃털이나 부드러운 붓 (毛筆) 등을 간지르개로 사용하였다. 이제 이러한 몸이나 발바닥을 간지럽게 하는 간지르개와 관계있는 그림이 있어 소개하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그랜드 오달리스크(1814)’


프랑스의 화가 앵그르(Jean Auguste Dmominique Ingres 1780-1867)의 작품 중에는 ‘그랜드 오달리스크(1814)’라는 그림이 있다. 오달리스크(odalisque)란 이슬람 세계의 최고 권위자인 술탄(sultan)에 수청 드는 여인을 말하는 것으로 17세기 당시 중동의 할렘에는 적은 곳에는 400명, 많은 곳에는 3,000명의 오달리스크를 수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술탄은 단 한사람인데 이렇게 많은 오달리스크가 있으니 술탄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로 어떤 여인은 할렘의 한구석에서 평생을 한숨으로 보내야만 했었다고 한다.


앵그르를 위시한 수많은 서양화가들이 여성의 나체화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처럼 발바닥을 이처럼 정라하게 보인 그림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이 오달리스크는 술탄이 찾지 않는 날의 무류한 날들은 발 간지르개로 성적인 충동을 달래는 것으로 보이며 그것은 오달리스크가 꿩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자기 발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여성에 있어서 발바닥은 중요한 성감대의 하나로서 예민한 부위인데 사람에 따라서는 특히 과민하게 반응해 성기 성교보다도 이 행위를 더 즐기는 사람도 있다.




‘테미라리움에서 (1881)’


이탈리아의 화가 태디마(Laorence Alma-Tadema 1836-1912)가 그린 ‘테미라리움에서 (1881)’라는 그림의 여인은 소위 ‘궁정 여인’라는 여인으로 당시 귀족이나 고관대작을 상대하는 접대부로서 개중에는 당시 유럽의 왕족만을 상대하는 ‘구정 여인’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 이 여인은 테피라리움에서 목욕을 끝내고 편히 쉬고 있다. 테피라리움이란 고대 로마의 온욕실(溫浴室)로의 열탕실과 냉탕실 사이에 있는 욕실의 휴게실로서 여인은 침대에 누어있는 고대 로마의 벌거숭이 여인이다.


왼손에 낙타 깃털로 만든 부채를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몸긁개(strigil)를 쥐고 있으며 그녀가 깔고 누운 것은 곰의 가죽이다. 즉 이 여인은 발 간지럼만이 아니라 몸 간지럼까지를 위한 간지르개를 모두 구비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들은 모름지기 몸 간지럼 기술쯤은 알고 있었을 것이며 여러 가지 간지르개도 구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성적 간지럼의 명수로 터키에 ‘오달리스크’가 있었다면 로마에는 ‘궁정 여인’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