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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발견한 조선 문화적 기억

  • 입력 2014.02.10 08:3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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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상이나 골동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면 이 분의 이름을 모른다면 고미술품을 취급한다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골동업계에서는 유명한 분이다. 특히 우리 민화(民畵)라든지 조선시대의 민속품 그리고 목기(木器)와 도자기에 관한한 이 분이 쓴 책을 한번쯤은 읽어 보아야 한다. 조선이 미(美)에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우리 조선의 미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한 그의 이론과 행동이 함께 어울려져 현실감 있는 글과 수집으로 많은 존경과 평가를 받았다.

그는 바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로 특히 우리 조선 도자기의 아름다움과 그 만들었든 서민 도공의 무심무작(無心無作)의 경지에서 만들어진 막사발에서 그들의 다도정신에 무한한 선(禪)의 의미를 부여했고 조선의 민화와 조선의 가옥과 조선의 석공과 생활 잡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이 미를 찾아내어 저술과 강연을 통해 널리 알려왔었다.

얼마 전 광화문 4거리 동아일보사의 구 사옥을 일민미술관으로 개조해 ‘문화적 기억-야나기 무네요시가 발견한 조선 도자기 목기 석기와 일본’이란 주제로 민속품을 나란히 전시해 비교 분석을 하도록 해 놓았다. 전시품들은 우리 선조들이 사용했든 손때가 묻은 민예품들이다.

전시품들은 그가 세운 일본 민예전시관의 소장품 200여 점과 다큐멘터리 자료 60여 점이며 전시장 1층은 그의 저서들과 원고와 옛 신문에 개제된 것들과 원고와 사진들이 있고, 2층은 조선 초기의 막사발인 회유오오이도다완((灰釉大井戶茶碗)과 초화문(草花文)이 그려진 청화백자 호(壺)와 돌 냄비 석조 주전자 민화인 호랑이와 까치의 그림들과 잡다한 생활 용품들 이었다. 3층은 주로 일본 도자기와 민속품들로 진열 되어 전시해 놓았다.

토요일인데도 비교적 한산하여 여유 있게 1층부터 3층까지 차근차근 둘러보았다.

또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주장은 일본식 미(美)의식은 조선으로부터 유래 되었다는 사실과 일본의 국보가 대부분 조선의 강한 영향 아래 만들어 졌고 일본의 대부분 고대 예술은 조선에 그 연원(緣源)이 있다고 생각되며 호류지(法降寺)와 나라(奈良)박물관에 가보면 대부분 조선 예술품·모조품들이다.

그러므로 일본 고대 예술을 관찰하는 것은 말하자면 조선 고대 미술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1922년에는 일본 국보 대부분은 솔직하게 말하면 조선의 국보(國寶)라고 불러야한다. 따라서 나라의 정서에 변화가 있다 해서 조선의 예술의 가치를 비하하는 일본인들의 심리 상태는 매우 큰 모순이 있다고 그는 논하기에 이른다.

야나기는 조선의 도자기에서 위대한 의지의 미를 간파했으며 그것은 중국 명(明)나라 것과는 다르다고 보았다. 같은 아향색도 명나라의 자기는 비칠 듯 날카로운 순백이지만 조선 것은 옅은 물색을 보이는 한편 분(粉)같이 하얀 색에 쌓여 또한 가라앉기 쉬운 회백색을 지녔다고 했다.

야나기는 소선에 대하여 비애의 미를 강조 한 것도 끊임없는 외침 속에 억압과 정복을 통해서 고통과 슬픈 역사의 되풀이가 백색의 상복이 끝이지 않은 생활이 종종 비판되는 ‘쓸쓸함’과 결부되는 백색에 대한 해석이나 ‘쓸쓸하게 보이는 선’에 대하여서도 똑같이 이들 민족이 겪어 온 역사와 유기적으로 결부시켜 표현한 결과 이었다고 말했으나 이 표현은 과학적으로 연구한 미의 학술적인 표현이 아니라 마음의 표현으로 미술을 이해하였으면 좋겠다고 책의 서문에서 동의를 구했다.

비애의 미에서 복합의 미(美)로 또한 위대한 미로 위엄의 미로 건강의 미로 논하게 되었고 1922년 조선 총독부가 새 청사를 건축하기위하여 조선식 건축물인 광화문(경복궁 정문)을 허물기로 한 것을 반대를 표명 하여 결국 다른 곳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총독부의 석굴암 수리에 관한 비판과 조선 미술관 건립을 추진한 것도 문화적 저항을 의미한 것이었다.

조선은 일본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문화운동에서 저항운동을 전개한 그였고 3.1운동 때 일본의 조선 정책을 비판한 극소수의 일본인 중에 하나였다.

비폭력을 중시하고 문화영역에 활동을 집중 시켜 정치에 영향을 미치게 하는 방법이 순진하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문화적인 개성을 발휘하는 것은 국제적인 지위 향상에 연결될 수 있으며 또한 인도의 마하 트라 간디는 비폭력으로 인도를 이끌어냈지 안는가. 따라서 야나기의 독립운동도 조선 독립운동에 대한 하나의 방법으로 평가할 수 있다.

야나기의 복합 미(美) 이론은 각기 다른 자연과 역사와 문화와 전통과 풍습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각기 다른 전통 속에 살아가고 있는데 아무리 국화가 좋다 고하여 전 세계를 획일적으로 국화로 덮는다면 얼마나 단조롭고 견딜 수가 없는 짓이 아닌가. 동양을 서양처럼 만든다는 경우가 존재한다면 이 또한 헛된 일이다. 세상은 한 가지 색을 띌 수 없지 않는가.

그는 조선 문화를 존중하고 조선의 고유한 문화의 독창성을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며 보호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고, 복합의 미(美)라고 하는 평화사상을 형성하면서 그 커다란 틀 속에 서로서로 공존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화라는 기치 아래 강자가 약자를 무력으로 지배하여도 테러의 반발과 끝없는 저항과 폭력이 연쇄적으로 이어지고 수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르고 있지 않는가.

일본과 한국 사이에도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게다가 한일 쌍방에 있어서 편협한 내셔널리즘이 점점 강해지고 있으며 우리들은 이러한 내셔널리즘을 막고 그것이 배타적인 것이 안 되도록 힘을 써야하고 양국의 평화를 유지하고 발전 시켜 나가기 위해서 민간 차원에서의 많은 교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이보다 더 어려운 시기에서도 야나기가 보여준 문화적인 영역에서 일본정책에 비판하고 저항하지 않았든가.

현재 다시 한 번 일민미술관에서 그의 일대기를 참관하며 그가 가진 사상과 그가 발견한 우리 문화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의 탁월한 식견에 경의를 표하며 그의 사상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며 일민미술관을 나왔다.

한 신문에 ‘그 일본인 조선 막사발에 마음을 담다’를 큰 제목으로 ‘조선 미에 심취 일본인 야나기 수집품 일민 미술관에 전시’라는 바이라인과 함께 일면을 장식한 회유오오이도다완(灰釉大井戶茶碗)의 사진을 보면서 그때의 감동을 다시 한 번 기억해보며 본다.

가야의 철기

인류의 역사란
끊임없이 일어나는 전쟁의 역사
문명도 전쟁의 악순 환속에 발전한다.

청동기 거처 철기시대로
쇠를 다룰 수 있는 문명이
그 나라의 운명과 번영을 좌우하고
향상된 철의 생산 능력

가야의 정치 경제 문화에
커다란 변화를 낳고
대가야를 만들어 놓았다.

가야는 철의 나라
다양한 철제 무기류의 제작
철정(鐵釘)은 고대의 반도체
병사의 신체 보호 장비로
철제 갑옷을 만들고
효율적인 전쟁을 치루웠다.

전쟁이 없는 세상은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