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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천안함 용사들에게 바치는 노래,‘바다로 가자’

  • 입력 2010.06.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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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바다의 용사들아 돛달고 나가자 오대양 저 끝까지



2절


우리들은 나라 위하여 충성을 다하는 대한의 해군


험한 저 파도 몰려 천지진동해도 지키자 우리바다



3절


석양의 아름다운 저 바다 신비론 지상의 낙원 일세


사나이 한평생 바쳐 후회 없는 영원한 맘의 고향



(후렴) 나가자 푸른 바다로 우리의 사명은 여길세


지키자 이 바다 생명을 다하여



‘우리들은 이 바다 위에 이 몸과 맘을 다 바쳤나니~’ 지난 4월 29일 오전 10시 평택 해군2함대사령부 내 안보공원에서 열린 ‘천안함 46용사들의 합동영결식’ 때 흘러나온 군가 ‘바다로 가자’ 1절 첫 소절이다. 그날은 하늘도, 땅도, 바다도, 온 국민들도 울었다. 출동 전 임무완수결의를 다지던 안보공원이 이날은 ‘바다로 가자’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사랑하는 가족과 전우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이별의 자리가 됐다. 헌화, 분향 등에 이어 영령들 넋을 기리는 조총(9발)이 발사되고 앞바다에 정박 중인 함정들은 10초간 기적을 울려 46용사들과의 작별을 슬퍼했다. 해군 군악대 중창단의 목소리로 천안함 장병들이 즐겨 부르던 ‘바다로 가자’ ‘천안함가(歌)’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생존 장병 46명이 46용사 영정을 들고 전우의 마지막 길을 함께 했다.



‘철통 해상방어 다짐의 노래’


영결식장에 울려 퍼진 ‘바다로 가자’는 애도곡이기도 하지만 우리 해군의 안보결의를 다지는 ‘필승의 노래’이기도 했다. 생중계 방송된 행사장에서의 군가는 전파를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 귀에 익은 ‘추도곡’이자 ‘철통 해상방어 다짐의 노래’가 됐다. ‘천안함 사건’의 슬픔을 새 발돋움의 기회로 승화시켜 다시 바다로 힘차게 나가 싸우자는 결의를 다진 것이다.


‘바다로 가자’는 필자가 1960년대 고향 마산에서 중학교를 다닐 때 자주 들었던 노래다. 그 때 KBS마산방송국에서 군 프로그램의 시그널음악으로 틀어줘 귀에 익었다. 해군기지였던 진해가 마산 옆에 있어 그 군가를 프로그램 시작 곡으로 썼던 것이다. 이처럼 이 노래의 역사는 오래 됐다. 군가이면서도 노랫말이나 곡이 지나치게 비장하거나 전투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넓은 바다로 나가는 뱃사람들 마음을 잘 나타내고 있어 누가 불어도 거부감 없이 힘차고 흥겹게 들린다. 4분의 4박자 행진곡 풍으로 씩씩한 느낌이 든다.


이 군가는 긴 역사 못잖게 만든 사람이 모두 해군과 그 가족이어서 더욱 뜻이 있다. 작사, 작곡자가 ‘해군의 아버지’라 불리는 손원일 초대 해군참모총장(1909년~1980년)과 그의 부인(홍은혜 여사 1917년 8남매 중 다섯 번째로 마산에서 태어남)이라 눈길을 끈다.


[1L]노래가 만들어진 건 1946년. 손 제독 부부의 애국심과 ‘해군 사랑’에서 비롯됐다. 손 제독 부부에게 해군은 자식 같았다. 해군을 위해 뭣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늘 생각하고 행동으로 옮겼다. 홍 여사는 어느 날 새벽, 군인들이 행진하면서 부르는 노랫소리를 들었다. 일본군가에 우리말 가사를 붙여 부르고 있었다. 그녀는 “여보! 저 생도들이 부르는 노래는 일본 곡 아닌가요?” 어느 날 통제부 관사 창을 열고 생도들 행군을 바라보던 홍 여사가 손 제독에게 이렇게 물었다. 왜 아니겠는가. 일본군가 곡에 조선해안경비대가로 가사만 갈아 끼운 노래였다. 껍데기는 다 일본 것이던 시대에 노래라고 왜 일본 게 아니겠는가. 남편인 손 제독도 “저건 아니야. 우리가 고쳐야지”라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부부는 해군이 부를 수 있는 ‘우리 군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 제독은 가사를, 홍 여사는 거기에 곡을 붙였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노래가 손원일 작사, 홍은혜 작곡의 군가 ‘바다로 가자’다.



마산친정 나들이 바닷가서 악상


초등학교 교사였던 홍 여사의 군노래 만들기는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이은상 시인이 쓴 노랫말에 곡을 붙여 ‘해군사관학교 교가’도 만들었다. 1947년 제2대 해안경비대사관학교장인 김일병 부위(중위)가 마산출신의 노산 이은상 시인에게 작사를 의뢰한 사실을 알고 마산친정 나들이를 핑계로 바닷가를 찾아가 악상을 다듬어 작곡했다는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해군사관학교 교가는 그녀가 그렇게 한 달간 매달려 만든 노래다. ‘해방행진곡’, ‘대한의 아들’, ‘해사 1기생가’ ‘해사 5기생가’, ‘해사 16기생가’, ‘해군부인회가’ 등도 그녀가 작곡했다.


홍 여사는 해안경비대사관학교 음악담당교수로 일한 적도 있다. 마산고등여학교(마산여고 전신)를 나와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에서 음악을 공부한 그녀는 교양과목인 음악과목을 전담했다. 손제독이 정식 발령을 내 주지 않아 공식적으론 적이 없는 교수였지만 생도들의 선생님이자 누나, 이모·고모 격으로 인기가 대단했다.


‘마산의 미인’, ‘해군가 작곡가’, ‘초대 해군제독의 아내’, ‘해군부인회장’, ‘해군의 어머니‘…. 올해 94세인 홍 여사에겐 다양한 ‘이름’들이 붙었다. 해군부인회장 땐 부인들 삯바느질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함정 백두산함을 사는 데 한몫 했고 상이군인이나 전쟁미망인들을 보살피는 데도 힘썼다. 그는 요즘 해군중앙교회 원로권사로서 신앙생활에 열심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손 제독은 서울 정동교회 성가대원이었던 홍 권사와 만나 결혼했다. 해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휴전 뒤 국방부장관으로서 6.25전쟁 후 한국군의 현대화와 전력증강에 크게 이바지한 해군의 신화적 인물이다.


그는 해군사관학교 전신인 해안경비대사관학교(1946년 6월 15일 해방병단이 조선해안경비대로 바뀌면서 붙인 학교이름)교장을 한동안 겸임했다. 해군 창설 주역인 그는 1980년 2월 15일 향년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유언은 ‘예수님 잘 믿다가 오세요’였다. 2월 19일 손 제독 장례식은 해군 성가대의 찬양과 그가 작사한 ‘바다로 가자’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조촐하고 엄숙하게 진행됐다. 2006년 국내 최대 규모인 214급(1800t급) 잠수함 취역 땐 그 1번함 이름이 ‘손원일함’이었다. 손 제독을 기리는 뜻에서였다. 2009년엔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기념식도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