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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흙과 벗하며 사는 농부의 마음 그려,

‘마음에 자유천지’

  • 입력 2010.07.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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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L]1절

백금에 보석 놓은 왕관을 준다 해도

흙냄새 땀에 젖은 베적삼만 못 하더라

순정에 샘이 솟는 내 젊은 가슴 속엔

내 맘대로 버들피리 꺾어도 불고

내 노래 곡조 따라 참새도 운다

2절

세상을 살 수 있는 황금을 준다 해도

보리밭 갈아주는 얼룩소만 못 하더라

희망에 싹이 트는 내 젊은 가슴속엔

내 맘대로 토끼들과 얘기도 하고

내 담배 연기 따라 세월도 간다

손로원 작사, 백영호 작곡, 방태원 노래의 ‘마음의 자유천지’는 흙냄새가 물씬 나는 대중가요다. 4분의 2박자로 멜로디가 부드러워 따라 부르기가 쉽다. 트로트풍이어서 흥겹다. 가사를 잘 음미하면 묵묵히 일하는 순박한 농부, 자연 속에 살아가는 민초들이 떠오른다.

속이 꽉 찬 음성으로 기교를 부리지 않은 가수 방태원의 가창력도 두드러진다. ‘마음의 자유천지’는 그를 스타급 가수로 떠오르게 한 대히트곡이었다. 그가 이 노래를 취입할 때만 해도 녹음실 시설이 좋지 않아 애를 먹었다. 방음은 물론 난방조차 되지 않아 장갑을 끼고 마이크 앞에 서야했다. 지금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나는 얘기다.

특히 이 노래는 문선명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통일교) 총재의 애창곡이기도 해 눈길을 끈다. 문 총재는 가요를 즐겨 부르고 제자들에게도 노래를 잘 시킨다. 가정연합지도자라면 지명을 받았을 때 언제든지 부를 수 있는 3~4곡은 있어야 한다는 견해다. 그는 가곡, 가요 등을 가리지 않고 듣지만 즐겨 부르는 건 유행가다. 가정연합행사 피날레를 노래로 마무리한다. 몸을 흔들며 부인(한학자 여사)의 손을 잡고 유행가를 부르면 인기다. 환호성이 터져 나오고 박수가 쏟아진다. 그는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이란 자전에세이집에서 “내가 평생을 즐겨 부르는 노래가 있다. 남들도 다 아는 흘러간 유행가지만 그 노래를 부를 때마다 고향집 들판에 누워있는 것 같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눈물이 자꾸 난다”고 했다. 그 노래가 바로 ‘마음의 자유천지’다.

대구극장 콩쿠르출전 입상

노래를 취입한 방태원(1930~2005년)은 고등학교 때 가수가 된 이색이력의 가요인이다. 1950년대 우리 가요계를 평정했던 대스타로 에피소드들이 많다. 그가 가수가 된 건 1951년 6·25전쟁 피란시절 대구극장에서였다. 제1회 오리엔트레코드사 주최 전속가수선발 경연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 대회에 고교 3학년생이 까까머리에 교복차림으로 2등을 했다. 부른 노래는 ‘대동강 달밤’(문일화 노래), 그 때 이름은 방창만. 경북 경산서 태어나 경산초등학교, 창성중학교를 졸업했다. 콩쿠르출전 땐 경산고를 다니고 있었다. 그는 계성고 재학생이었던 도미(본명 오종수) 등과 뛰어난 성적으로 입상했다. 전속가수가 된 방창만에게 오리엔트레코드사 사장이자 작곡가였던 이병주 선생은 방태원(方太園)이란 예명을 지어줬다. 대구 송죽극장 건너 오리엔트레코드사에서 방태원은 처음 취입한 ‘꼴망태 시절’을 비롯하여, ‘낙방과객’ 등 6곡을 잇달아 발표했다. 작곡가 박시춘과의 인연으로 ‘여수야화’를 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 직후의 황폐한 사회적 여건 아래서 히트곡이 없는 가수생활은 힘들었다. 오리엔트레코드사 전속가수가 된 뒤 별 성과 없이 보냈던 방태원은 가수 남백송과 두터운 우정을 나누며 성공의 길을 찾고 있었다. 이럴 때 방태원은 작곡가 백영호 선생과 인연을 맺게 됐다. 방태원의 뛰어난 가창력을 확인한 백 선생은 서울 미도파레코드사(지구레코드사 전신) 전속가수가 될 수 있게 길을 터줬다. 이를 터전으로 여러 히트곡들이 나올 수 있었다. 예명도 방태원에서 방운아(方雲兒)로 다시 바꿨다. 그 무렵 방운아 노래엔 6·25전쟁을 겪으며 지친 대중들에게 위로와 격려가 담겼다. 대표곡이자 출세작인 1956년 ‘마음의 자유천지’를 비롯해 ‘부산행진곡’ ‘인생은 나그네’ ‘한 많은 청춘’ ‘두 남매’ ‘여수야화’ ‘경상도 사나이’ ‘일등병 일기’ ‘인생은 고해련가’ 등이 있다. 그는 1960년대까지도 활발히 활동하며 많은 곡을 취입했으나 홀연히 무대를 떠났다. 이후 1980년대 컬러TV시대가 열리면서 쇼프로에 원로가수로 출연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가요무대, 쇼 특급 등 가요프로그램에서 지난날 히트곡들을 불러주며 가요팬들에게 향수를 떠올리게 했다. 이후 원로가수들의 무대가 줄자 2000년대 들어 공중파방송엔 두 번 밖에 출연하지 않았다. 2005년까지도 건강이 괜찮은 편이었으나 갑자기 앓던 병이 악화돼 그해 6월 15일 75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변함없는 목소리로 팬들을 사로잡으며 바르고 검소한 생활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됐다. 잔잔하고도 정겨움이 감도는 노래는 추억의 가요팬들에게 애틋한 향수와 그리움을 안겨줬다 2009년 방운아의 노래를 사랑하는 경산지역주민들과 경산중앙로타리클럽이 뜻을 모아 노래비 건립에 나섰다. 지역이 낳은 가수를 기리는 노래비 건립을 계기로 해마다 가수이름을 붙인 가요제까지 열기로 했다.

작곡가 백영호 선생, 4000여곡 남겨

노래를 작곡한 백영호 선생도 우리나라 대중가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분이다. 백 선생은 이미자의 대표곡 '엘레지의 여왕', '동백아가씨'를 비롯해 수많은 트로트 곡을 남긴 국민작곡가로 가요계 거목이다. 작곡가로서 55년간 4000여곡을 남기고 2003년 5월 21일 83세로 별세했다. 작곡은 물론 가요계와 사회활동에도 활발했다. 한국음악저작권협회 이사, 한국연예협회 창작분과 지도위원, 가요작가협회 이사를 지냈다. 말년엔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평의원회 의장과 고문, 서울중구문화원 이사를 맡았다. 고인의 맏아들(백경권 원장)은 진주에서 운영하는 서울내과의원 안에 ‘백영호 기념관’을 열어 관련 자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백 원장은 2009년 7월 9일 밤 진주동방호텔에서 부친의 6주기를 맞아 명곡을 모은 추모작곡집을 펴내 ‘백영호 음악과 인생'이란 제목의 출판기념회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