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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말로써의 표현을 능가하는 몸짓언어

  • 입력 2010.09.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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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서양미술은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영국의 산업 혁명으로 인한 자유주의 사상은 전 세계로 퍼져나가 미술계에 있어서도 억압 되었던 종교와 왕권에서 벗어나 각자의 개성과 주관을 지향하는 형태로 발전하게 되어 고전파, 낭만파, 자연파, 사실파,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 인상파 등 다양한 화파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예술사조 속에 태어난 낭만파 미술(Romantic Art)은 합리주의에 반대해 객관보다는 주관을, 지성보다는 감성을 중요시해 격정적인 구도와 강렬한 색조로 인간의 개성과 감정을 감각적이고 역동적으로 표현한 화파다.


낭만주의 화가들은 ‘순수한 환상’, 즉 그들 자신의 상상력과 숭고한 비장감, 애국심 등을 그림을 통해 자유분방하게 표현하고자 했으며 특히 프랑스의 낭만파 화가들은 이념보다는 현실에 밀착해서 시사적인 문제나 역사적 사건 등을 그리기도 했다. 따라서 낭만주의 회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림의 주제가 아니라 그 주제를 통한 작가의 표현 의도에 있는 것 이었다. 즉 같은 테마를 가지고도 화가 개개인의 개성과 주관적 해석으로 인해 화면의 극적인 연출을 꾀할 수 있었으며 이에 따르는 사람들의 몸짓표현에도 많은 차를 보였다.


몸짓의 형태를 보고 그 의미가 무엇이라는 것을 같은 문화권의 있는 사람의 약 70%가 알 수 있다면 심리분야에서는 이것을 대체언어(代替言語)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머리를 좌우로 흔들면 부정적이라는 의미이며 상하로 끄덕이면 찬성의 말 대신에 하는 몸짓언어가 된다.


이러한 대체언어가 사용되는 것은 잡음으로 인해서 또는 상호간의 거리가 멀어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때, 예를 들어 파도소리가 거센 망망한 대양에서 조난당한 경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낭만파 화가로서 이런 경우에 몸짓언어를 다양하게 표현해 그 역사성, 현사회의 모순성, 과거의 피눈물 나는 행적 등을 한 장의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 즉 조난당한 선원들의 대체언어를 잘 표현한 그림이 있어 이를 보면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한다.



[1L]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


프랑스의 화가 제리코(Jean Louis Andre?The쳍dore Ge쳑icault 1791~1824)의 ‘메두사호의 뗏목(1818-19)’이라는 작품이 바로 이에 해당된다고 생각된다.


그는 학창시절에 은사화가인 카를 베르네로부터 영국 스포츠 미술의 전통을 배웠으며 동물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또 그 시대의 사건을 주제로 바로크적이고 낭만적인 정열과 격조를 가미하는 기법을 추구하였으며 1817년 26세의 제리코는 그 유명한 ‘메두사호의 뗏목’에 착수하였는데 이는 그가 그린 일련의 대작 시리즈 중에서 최초의 것으로 손꼽힌다.


메두사호의 난파와 그 생존자들의 표류 사건은 1819년에 제리코의 작품을 계기로 공개되어 프랑스 전역에 화제를 일으켜 사회적 사건으로 되었는데 그 사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816년 6월, 프랑스 식민지이었던 아프리카의 세네갈을 통치할 목적으로 이주자와 군인들의 관계요원을 태우고 출항한 범선 메두사 호는 항해 도중에 귀족 출신의 무능한 함장의 항해지휘 실수로 암초에 부딪쳐 난파되었다. 이때 함장을 위시한 지체 높은 사람들은 구명보트로 탈출하였으나 지체 낮은 사람들과 병사들 149명은 급히 만든 뗏목을 타고 표류하게 되었다.


뗏목을 타고서 12일간의 표류 끝에 범선 아르고호에 의해 구조되었을 때 생존자는 불과 15명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파도에 밀려 죽었고 남은 사람들은 극도의 기아와 정신착란 때문에 죽은 사람의 고기를 먹는 끔찍한 사태까지 벌어졌었다 한다.


제리코는 작품에 착수하기 전에 정확한 사건의 내용을 알기 위해 생존자들을 방문해 그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으며 또 그림을 실감 나게 그리기 위해 직접 뗏목을 만들어 보기도 하고, 시체 수용소에 가서 시체를 위시한 절단된 두부나, 팔과 다리 등을 스케치했으며 또 50여종의 초벌그림 을 그렸는데 그것이 세계 도처의 미술관에 소장되어 남아 있다.



당시 극적인 상황 사실적으로 표현


이처럼 사실에 입각한 작품의 세부묘사는 주목할 만하다. 즉 화면을 지배하는 것은 그 비극적인 상황을 더욱 고조시킨 제리코의 낭만적 상상력으로 말을 하는 대신에 그림 속의 사람들의 몸짓으로 어떻게 하면 말로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사실을 전달할 수 있겠는가를 심각히 고민한 그의 노력이 함축되어 있어 낭만주의 표현양식의 진미를 맛 볼 수 있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삼각형을 이루어 매우 정적이며 안정감을 주고 있다.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삼각형 구도를 사용한다고 하는 것은 그 안정감으로 인해 화면 전체를 견고하게 한다는 이점은 있지만, 그 반면 단조로움으로 인해 그야말로 재미없고 지루한 구도로 되기 쉽다. 그런데 그의 그림에서는 삼각형 구도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조롭다거나 지루하다는 느낌을 전혀 받질 않는다. 그것은 전체적으로는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인데도 불구하고 지극히 사실적으로 표현된 인물과 난파된 뗏목은 마치 당시의 극단적인 상황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찍은 한 장의 스냅사진과도 같기 때문이다.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림에 나와 있는 인물들의 복잡한 몸짓, 격렬한 몸부림 등이 매우 다양하고 변화무쌍해 보는 이로 하여금 역동적인 힘을 느끼게 한다. 그림의 맨 앞쪽 그러니까 삼각구도의 밑바닥에 해당되는 부분에는 파도와 싸우다 이미 죽은 시체를, 그리고 중간 부분에는 반사(半死) 반생(半生)의 허탈에 빠진 병자, 그리고 맨 윗부분에는 아직 생명력이 남아있어 구원의 가능성이 보이자 높은 곳에 올라 살려달라는 몸짓언어를 필사적으로 발신하는 것으로 극한 상황을 잘 묘사하였다.



[2L]위치와 모양, 각도에 따라 해석 달라져


완성된 작품과 초벌그림을 비교해봄으로써 화가가 표류하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몸짓으로 대변하기 위해 즉 대체언어로 표현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으며 그가 지녔던 이 그림에 대한 집착성도 엿볼 수 있다.


각각의 초벌그림에는 큰 차이가 있는데 예를 들면 완성된 그림의 앞부분의 오른쪽에는 뗏목 밖으로 몸이 빠진 시체, 왼쪽에 누워있는 시체 등이 그려져 있지만 초벌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다. 또 완성작품의 중심에 선 사내와 그 밑의 사내가 들고 있는 옷가지 등이 초벌그림에는 그려져 있지 않으며 소극적 몸짓이다. 맨 윗부분에는 파도 사이에 보이기 시작한 구조선을 보고 미칠 듯 기뻐하는 순간을 그렸는데 완성된 작품에는 한 사람이 나무통위에 오라서 미친 듯이 헝겊을 흔들고 옆에서는 그가 떨어질 염려 없이 힘껏 신호를 보내라고 붙잡아 주고 있다. 그러나 초벌그림에서는 나무통위에 올라선 사람이 없다.


단순히 무엇이 있고 없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어느 위치에 어느 것이 어떤 모양과 각도로 있느냐에 따라 화면 전체에 주는 생동감과 몸짓의 대체언어로써의 해석은 달라지는 것이다. 즉 초벌그림의 사람들의 배치가 옆으로 퍼졌다면 완성된 그림은 위아래의 세로로의 강조가 눈에 띈다. 즉 절망에서 희망이 솟아 오르고, 죽음에서 삶으로의 생명력이 샘솟아 이에 따라 사람들의 몸짓언어에도 적극성을 띄고 있는 것을 완성작품에서는 느낄 수 있다.



그림 통해 하류계급의 고통 전달해


이처럼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격변기의 시대에 제리코는 비극적인 사건을 냉정 하리 만큼 사실적인 기법으로, 때로는 직접화법을 통해, 때로는 상징적 화법을 통해 그림속의 사람들의 몸짓만을 보고도 표류 중에 익사(溺死), 병사, 자살, 발광, 기아사, 심지어는 인육식(人肉食)이 있었다는 것을 대변하여주며 이런 상황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것이 지체 높은 상류계급은 보트를 타고 구명되었는데 하류계급은 이렇게 엄청난 고통으로 희생되었다는 사실로 표현되어 작품을 통한 몸짓이 대체언어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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