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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전북 익산 황등역을 무대로 한 가요 ‘고향역’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 입력 2010.10.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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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뿐이 곱뿐이 모두 나와 반겨주겠지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2절)


코스모스 반겨주는 정든 고향역


다정히 손잡고 고개 마루 넘어서 갈 때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님을


얼싸안고 바라보았네 멀어진 나의 고향역


 



나훈아가 부른 ‘고향역’(4분의 4박자, 고고리듬)은 언제 들어도 정겹고 마음이 푸근해진다. 가을철 TV음악프로그램의 단골곡이다. 노래방, 술자리 등에서도 단연 인기다. 1960~70년대 산업화와 고속성장기에 고향을 떠난 사람들 ‘망향의 노래’는 그 무렵 대중음악의 중요한 메뉴였다. ‘고향역’은 그 가운데 대표적인 곡이다. 노래를 만든 사람은 임종수(林鍾壽 67) 선생. 노랫말을 썼고 곡까지 붙였다.


 



나훈아의 ‘차창에 어린 모습’이 원곡


‘고향역’은 1971년 신인 작곡가 임종수 작사·작곡, 나훈아 노래의 ‘차창에 어린 모습’에서 비롯됐다. ‘고향역’의 원곡인 셈이다. ‘(1절) 떠돌다 머무는 낮선 타향에 / 단 한 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 / 눈감아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 (2절) 우연한 인연에 만난 그 사람 / 이별이 있을 줄 알면서도 잊지 못하고 / 기적에 작별인사 열차는 무정해 / 멀리가도 떠오르는 차창에 어린 모습~’으로 나간다.


‘차창에 어린 모습’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발표되자마자 금지곡이 돼버린 것이다. 새마을운동이 한창일 때 군가에 익숙한 군사정권의 이해부족에서였다. 새마을운동에 걸림돌이 된다는 이유로 예술성 높은 곡들이 탄압받는 과정에서 시대의 뒤안길로 묻혔다.그러나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는 법. 야심작이면서도 작곡가로서 일생을 걸만한 수작을 ‘방송금지곡’이란 사형선고를 받고 비탄에 젖은 임씨에게 희망의 빛이 보였다. 나훈아가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좋은 곡인데 아쉽다며 노랫말과 리듬을 바꾸자’고 제의해온 것. 임씨는 자고나면 히트곡이 쏟아지는 가요계 스타인 나훈아 얘기에 감격,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임씨는 용기를 내어 자신의 학창시절 기차통학 하던 때를 생각하며 작업을 다시 했다.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던 시골 역을 떠올리면서 노랫말을 다시 쓰고 템포가 빠른 고고리듬으로 바꿨다. 그렇게 해서 1972년 나훈아를 통해 발표돼 영원불멸의 히트곡 ‘고향역’(오아시스레코드사)이 탄생했다.‘차장에 어린 모습’이 ‘고향역’으로 바뀌는 과정엔 기차역이 등장한다. 전북 익산의 황등역이 바로 그 무대다. 역이 노래소재로 등장한 사연은 1950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황등역은 익산시 황등면 황등리에 있는 호남선 정거장으로 임 씨가 고교학창시절 매일 지나쳤던 곳이다. 전북 순창에서 모두들 배고픈 시절 가난한 시골농가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중학교는 고향에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친형이 살던 익산(옛 이리시) 삼기면에서 다녔다. 삼기에서 황등역까지 나와 기차를 타고 익산 남성고등학교를 다닌 것이다. 그 무렵 농촌시골 역들이 다 그랬지만 길가에 꽃이 심어졌고 광장엔 화단이 있어 기차손님들을 반겼다. 황등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황등역에서 익산역으로 가는 철길엔 가을만 되면 코스모스가 활짝 폈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교생 임종수는 코스모스 꽃길을 만끽하며 기차통학을 했다. 역 풍경과 코스모스 꽃길은 그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생생히 남았다. 어른이 되면서 고향집과 더불어 그 철길 변 코스모스가 떠올라 가슴 한 곳에 자리 잡았다. 그 이미지는 음악으로 이어졌다. ‘신인가수 나훈아’에게 ‘고향역’을 만들어줄 때 그 때의 정서들이 스며들었다. ‘추억의 황등역’은 그렇게 해서 ‘고향역’으로 새로 태어났다.


 



‘고향역’ 히트로 유명작곡가 대열 합류


황등면 주민들은 “임종수 선생이 ‘고향역’ 노랫말 내용들을 그 때 모습으로 너무나 잘 그려냈다”고 말한다. 삼기에서 황등역까지 오가며 배고픔과 고향 순창에 대한 향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역과 철길의 코스모스에 접목시켜 만든 노래임이 밝혀진 것이다.


순창군 순창읍 순화리에서 태어난 임 선생은 작곡가로서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 ‘고향역’은 그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오늘날 ‘음악인 임종수’가 있게 한 명곡이기도 하다. 작곡가생활 처음 5년여 무명시절을 보낸 그는 나훈아의 ‘고향역’이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유명작곡가 대열에 오른 것이다.


그는 KBS-1TV 전국노래자랑 심사위원을 17년째 하고 있다. 더욱이 그가 작곡한 노래로 성공한 가수들이 많다는 점이다. ‘히트곡 제조기’로 통하는 그는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 1976년) △대동강편지(나훈아, 1981년) △옥경이(태진아, 1989년) △부초(박윤경, 1991년) △남자라는 이유로(조항조, 1998년) △모르리, 빈 지게(남진, 2003년) △사랑이 남아있을 때(문희옥, 2006년) △청주사랑 직지(장윤정, 2007년) 등 300여 명곡들로 가요계를 끌어오고 있다.


그는 2008년 3월 전국 대학 최초로 생긴 충청대 음악과(트로트전공) 초빙교수로 실용음악 등을 강의한다. 작곡가 이전엔 남인수, 백년설 등의 영향을 받아 가수 꿈을 키웠다. 그러나 1960년대 초반 미8군 무대 출신가수들이 서양음악으로 가요계를 장악하자 자신의 창법이 시대에 떨어진 것이라 생각하고 가수 꿈을 접고 작곡가 길로 들어서 음악성을 발휘했다. 피아노를 독학으로 익혔을 만큼 뛰어난 음악적 재능을 살려 1960년대 말부터 작곡가 길을 택해 40여년 외길을 걷고 있다.


나훈아로 볼 때도 ‘고향역’은 의미가 크다. 노래리듬 변화를 시작한 분기점을 이루는 곡인 까닭이다. 그의 노래는 4비트 음악인 트로트리듬에 쏠려있었다. 그러나 ‘고향역’을 시작으로 8비트인 고고리듬음악이 시작돼 리듬감이 더 살아나는 명곡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초기노래는 대부분 한마디 안에 4개의 비트가 연주되는 쿵작쿵작하는 4비트음악, 즉 트로트리듬이 주를 이뤘다. ‘사랑은 눈물의 씨앗’, ‘가지 마오’, ‘님 그리워’, ‘바보 같은 사나이’, ‘두 줄기 눈물’, ‘강촌에 살고 싶네’, ‘후회’, ‘행복을 비는 마음’, ‘헤어져도 사랑만은’ 등이 그런 곡들이다. 그러다가 ‘고향역’을 계기로 달라졌다. 한마디 안에 8개의 비트가 연주되는 쿵작짝자 쿵작짝자 하는 고고리듬이 시작돼 노래가 8비트음악으로 바뀌는 전환점을 이룬다. ‘고향역’, ‘우정’, ‘감나무 골’, ‘산마을 처녀’, ‘고향의 그 사람’, ‘햇님과 달님’, ‘아! 미워도’ 등이 그런 곡이다. 지금의 나훈아 노래는 대부분 고고리듬, 디스코리듬이다. 가끔 16비트로 된 테크노리듬도 나온다. ‘18세 순이’ 등이 그렇다.


나훈아는 2006년 12월 공연을 끝으로 무대에 서지 않고 있다. 2008년 1월 악성루머를 반박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 언론과의 접촉도 피하고 있다. 그는 1966년 ‘천리 길’로 가요계에 발을 내디딘 뒤 ‘청춘을 돌려다오’ ‘울긴 왜 울어’ ‘머나먼 고향’ ‘사랑은 눈물의 씨앗’ ‘잡초’ ‘갈무리’ ‘무시로’ 등 많은 히트곡을 냈다. 게다가 수준급의 작사·작곡능력까지 보이며 40년 넘게 국민가수로 자리 잡고 있다.


 



[1L]노래무대 황등역 간이역으로 움츠려들어


한편 ‘고향역’ 무대로 밝혀진 황등역 입구에 소공원과 노래비를 세우고 ‘황등역의 고향역 지정’과 영화촬영 등 개발방안들을 찾아야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 2008년 황등역 일대를 중심으로 ‘고향역 축제’가 열렸지만 크게 알려지진 못했다. 순창군에서 몇 번 기념비를 세우려 했으나 가사에 ‘순창’이란 지명이 들어있지 않다는 이유로 물거품이 됐다.


일제가 조선총독부(중앙청)를 황등돌로 세웠을 만큼 황등지역은 국내 최대, 양질의 화강암 생산지다. 이를 활용한 조각공원 건립과 코스모스 심기, ‘고향역 고구마’ 지정 등 여러 방안들을 찾아 황등을 알리고 소득증대와 지역개발을 꾀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황등역은 일제 때를 거쳐 1970년대까지 황등돌을 일본에 팔기위해 역 앞에 산더미로 쌓아 놓은 유서 깊은 곳으로 호황을 누렸다. 30여년 전만해도 도시로 실어나가기 위한 지역명물 ‘황등고구마’로 인산인해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의 황등역은 간이역으로 움츠려들었다. 2008년 12월 1일자로 여객취급이 멈췄다. 1943년 3월 6일 영업을 시작해 한 때 역장, 부역장 등 여러 명이 근무했으나 KTX 개통 뒤 무배치간이역(2004년 12월 10일)이 됐다. 2005년 8월 1일 역무원이 철수, 문을 닫아버려 지역인구감소와 함께 황량한 느낌마저 주는 초라한 역 건물만이 옛 영광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