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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다, 코리안 닥터

  • 입력 2011.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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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고의 왕초’ 20명, ‘쩐의 두목’들 120명이 퍼레이드를 벌이는 G20을 보면 의대를 갓 졸업한 45년 전이 떠오릅니다. 괜히 가슴도 뭉클합니다. 1965년이니 당시 경제 현실에 맞물려 우리나라 의학 교육은 그야말로 열악 그 자체였습니다. 국립서울대병원의 인턴 월급이 700원, 사립대병원이 2000~3000원이었습니다. 쌀 한 가마가 4000원 정도였던 시절이니 우리 의료계가 얼마나 처량했는지 짐작이 갈 것입니다.


63년인가? 한국의 의과대학생들에게는 꿈같은 희소식이 날아듭니다. 미국 의사시험(ECFMG)에 합격하고 미국에 가 5년간 인턴, 레지던트 수련을 받고 전문의가 되어 귀국하면 10년간 군전문의로 복무시킨다는 법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입니다. 당시 육군 의무감이던 김모 장군의 이름을 따 킴스플랜(Kim’s plan)으로 불렸고 이름도 긴 ‘군 전문의 요원 해외 파견 계획’입니다.
암담한 현실에 주눅 들어 있던 그들에게 한 줄기 강한 서광이 비친 것입니다. ‘꿈에 그리던 미국으로 가자!’는 열병이 의대생들을 들뜨게 합니다. 학생들은 형편없는 영어 실력에도 사전을 끼고 자면서 미국 의사시험에 도전합니다. 무더기로 합격하고 각 병원으로 취업 신청서를 보냅니다. 한국 의사들의 실력에 미국 의료계도 놀랍니다. 이 법이 시행된 64~65년 무려 200여 명의 한국 의학도가 군복무 없이 미국의 각 병원으로 진출합니다.


미 의사시험 합격이 늦거나,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은 젊은 의학도들은 3년의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향합니다. 다행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을 치르고 월남전에 뛰어든 미국에서도 심각한 의사 부족에 시달리던 때라 웬만하면 재주 있는 한국 의사들을 다 반깁니다. 60~70년대 우리나라에는 의과대학이라야 7개뿐이었는데 그중 서울대 의대나 연세대 의대는 졸업생의 절반이 미국으로 갔습니다. 절반의 실패로 끝났지만 3년간 시행되었던 킴스플랜을 시작으로 봇물처럼 수천 명의 의사가 미국으로 갑니다. 미국의 의사 수급이 정상화된 70년대 말까지 도미 행렬은 계속됩니다. 훗날 그들은 한국 의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합니다. 몇 년 전 재미 한국의사회 연차 총회에서 초청강연을 한 적이 있습니다.

수십 명의 동료를 만납니다. 그들에 의하면 미국 의사면허를 가진 한국인 의사가 1만 명을 넘었고 의대 재학 중인 동포학생이 1만여 명에 달한답니다.
초기에 미국으로 간 1세대들 중엔 임상, 기초할 것 없이 각 분야에서 걸출한 석학들이 배출됩니다. 28년 전인 82년 한국과 일본의 비뇨기과 의사들이 한·일비뇨기과학회를 만들고 매 년 번갈아 한국과 일본에서 학술대회를 엽니다. 당시에는 한국과 일본의 학문적 격차뿐만 아니라 학회장 시설, 접대 방법에서도 너무나 차이가 커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올해 교토에서 300여 명의 한국과 일본 비뇨기과 의사가 학술토론을 했습니다. 로봇 수술, 내시경 수술 등 일부는 우리 의사들이 앞서갑니다. 더구나 중·고등학교를 미국에서 마치고 한국 의대를 졸업한 젊은 비뇨기과 의사들이 유창한 영어로 발표하고 질의를 해대면 많은 일본 의사의 기가 죽습니다. 옆에 앉은 일본의 원로 교수가 조용히 한마디 합니다. ‘스바라시이!’ 우리말로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G20처럼 경제가 다는 아닙니다. 이제 한국 의사들도 G20 수준을 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장하다 코리안 닥터들’입니다. 제발 우리 의사들을 색안경으로 보지 말아주세요. 고사목(古死木) 몇 그루만 보지 말고 숲을 보아주세요! 오늘날 한국 의사들의 숲은 푸르고 싱싱하다 이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