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art & medicine]몸짓언어에는 원시와 현대가 공존

  • 입력 2011.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죽음에 대한 불안은 인류가 시작하면서부터 지녔던 하나의 고유의 심리적인 특성으로 그것은 죽음이 영원과 어떻게 연결 될 것인가, 즉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한 세계에 대한 불안으로 죽음을 의식한 뇌의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고대인들이 지녔던 신앙행위는 자연숭배에 기초한 애니미즘(aminism 유령관 有齡觀)의 형태로 싹트게 되었으며, 이것이 점차 일상생활로 자리잡게 됨에 따라 불안 심리는 생활에서 생겨나는 길흉사에 대해서 이를 미리 점쳐 보려는 심리로 발전되고,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이익 추구의 소망기원을 목적으로 행하는 샤머니즘(shamanism 무격 巫覡)에 입각한 예언자, 주술자, 무인(巫人)이라는 특수한 감성을 지닌 사람들이 나타나 각종 주술적 신앙 행위를 집행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대인에 있어서 주술적인 의식행사는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음으로 그 의식을 집전하거나, 소리를 내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거나 아니면 그 부족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한 그림이나 조각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이 남기게 된 그림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는 북부 스페인에 있는 알타미라(Altamira) 동굴의 ‘들소’라는 벽화를 들 수 있는데 이 벽화는 구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는 믿어지기 어려울 정도로 그 형상이나 색채가 아름답게 그대로 남아 있어 구석기 미술의 우수성을 과시하고 있다. 이런 것으로 보아 예술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들에게 있어서 미술은 단순한 감상용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필요했던 수단, 즉 생존을 위한 먹잇감을 얻기 위한 주술적 의미의 수단으로 미술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의 라스코(Lascaux)동굴의 벽면에 그려진 ‘새머리 모양의 주술사와 부상당한 들소’를 보면, 들소와 들소 앞에 있는 새머리 모양을 하고 두 팔을 벌린 남자, 남자의 아래에는 긴 막대기에 앉은 새 형상이 있고, 새 그림 옆에는 수수께끼의 기호가 보인다. 들소의 몸 위로 긴 막대기가 사선방향으로 그려져 있고, 들소의 아랫배 쪽에는 이상한 형태의 둥근 물체가 그려져 있다. 부상당한 들소같이 보이기도 하나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해석하는데 어려움이 따른다. 아마도 주술적 의례를 위한 대상으로 그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들소 앞의 두 팔을 벌리고 있는 남자는 주술인으로 보이며 이 남자가 새머리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은 특정한 의식을 행하기 위해 새머리 모양의 동물가면을 쓴 것으로 보이며, 새를 토템(totem)으로 섬긴 씨족집단의 그림으로 추측된다. 새를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상징체로서 즉 하늘의 뜻을 땅에 전달하고 지상에 사는 인간의 바람을 하늘에 전달해주는 영적 매개자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주술사는 새머리가면을 쓰고 의식을 거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술의 생명이나 힘의 원점은 바로 이러한 동굴벽화에서 보는 기운생동(氣韻生動)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예술적인 사고가 한계에 달한 요즘, 예술인들 중에는 다시 한 번 생명과 힘이 넘치는 예술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원시로 돌아가자’ ‘자연으로 돌아가자’라는 구호로 옛사람들과 같이 자연과 더불어 살며 자연을 숭배하는 주술적인 예술이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러한 배경에는 과학이 발달되어 모든 합리주의가 점점 탈인간화(脫人間化)되는 것도 한 몫을 하게 되었다.


[1L]미국의 화가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은 뉴욕에서 활약한 미국 현대 미술의 대표적 거장으로,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을 창시하였다. 그는 소년시절 자기가 살았던 애리조나의 원시대지에서 체험한 인디안 그림과 샤머니즘에 입각한 원시미술(primitive art)을 도입하여 나름대로의 독득한 주술미술작품, 예를 들어 ‘No.1’(1950) 등의 많은 작품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다.


독일 태생의 미국화가 보이스 (Joseph Beuys, 1921~1986)는 1943년 비행기 추락을 당했는데 타타르족에 의해 구조되어 생명을 건졌다. 샤머니즘의 풍습을 지닌 타타르족은 펠트담요와 비계 덩어리로 그를 치료해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이러한 경험을 살려 그때 덮었던 동물가죽과 펠트 그리고 기름 덩어리를 작품의 소재로 사용하였다.


보이스의 가장 잘 알려진 퍼포먼스 작품 중의 하나는 ‘나는 미국을 좋아하고 미국은 나를 좋아 한다’(1974)이다. 보이스는 자신을 펠트로 덮고 5일 동안 코요테와 함께 방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 ‘죽은 토끼에게 어떻게 그림을 설명할 것인가’(1974)라는 퍼포먼스 작품에서 그는 머리에 꿀과 금박을 뒤집어쓰고, 한쪽 발에는 펠트와 다른 쪽 발에는 강철밑창을 대고 세 시간동안 죽은 토끼에게 그림을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작품은 영적인(정신적인) 따뜻함과 경직된 이성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예술작품들은 주술미술을 통해서 옛으로 그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야함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고대인들의 묘를 발굴하면 시체와 더불어 여러 가지 꽃의 씨앗이 발견되기도 하고, 시신을 위해 화려하고 견고한 고분을 만들었는가 하면, 이집트에서와 같이 피라미드를 만들기도 하였다. 이렇게 소박한 무덤에 꽃씨와 함께 시신을 묻는 것은 시신이 꽃씨와 함께 환생되기를 바라는 소박한 마음의 발로이며, 고분이나 피라미드를 지운 것은 ‘생명의 혼은 죽지 않으며 영원과 연결되기 때문에 시신은 언젠가는 환생될 수 있음으로 소중히 모셔야 한다’는 생각에서이다. 비단 죽음이 불안한 것이기는 하지만 언젠가는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은 정신적인 안정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즉 예술은 불안과 사랑 속에서 태동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집트에서는 시신을 미라(mummy)로 만들었으며 이때 내부의 모든 장기를 적출해서 따로 보관하였다. 그것은 혼이 돌아와 사람으로 다시 환생할 때 유효하게 바로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옛사람들의 생각이 어떤 의미로는 오늘날의 발전된 의학에서도 그 개념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장기이식(臟器移植)이 바로 그것이다. 어떤 장기가 병변으로 망가져 생명의 위험이 닥쳤을 때 다른 사람의 두 개 있는 장기를 하나 양보 받거나, 뇌사에 빠진 사람의 장기 또는 인공장기로 대치하는 장기이식이 현대의학의 가장 발전된 요법인데, 그 배경에는 옛사람들이 미라를 만들면서 장기를 적출했던 개념적 사고의 일부와 부합되는 것 같기도 하다.


[2R]주술미술로서의 환원으로 액션 페인팅이나 퍼포먼스나 그리고 발전된 의학으로써의 장기이식이 있기까지의 배경을 과거의 동굴미술과 결부시켜 볼 때 주술이라는 신비한 능력을 지닌 반성인적(半聖人的)인 존재인 예언자, 주술사, 사제 또는 무인(무당)이 있어 신과 사람의 중간에서 인간의 뜻을 신에게 전달하고 소원을 성취시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즉 예언자라는 입장에서 공물(供物)과 기도로써 신의 뜻을 탐지하는 제의(祭儀)를 집전하였으며 주의(呪醫)라는 면목으로 주문으로 병을 고치는 역할을 하여 질병, 흉사 등의 근원이 되는 악령을 추방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무당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를 신을 통하여 판단하는 길흉점복(吉凶占卜)의 예언자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그렇고 보면 오늘날의 발전된 의학이나 미술의 원점은 예언자, 주술자 등이 그렸던 원시적인 동굴미술과 주술치료를 원점으로 인간의 창조의 세계에서 지(知)와 감성이 융합되면서 발전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과거의 역사 속에서 대를 이어온 현대인의 유전자속에는 동굴화와 주술신앙적인 사고가 다소나마 잠재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자란 사람이 연출하는 몸짓에는 하나의 관습적인 공통점이 있으며 몸짓언어에는 원시와 현대를 넘나들면서 배인 공통성이 있어 거장들이 미술작품으로 표현한 몸짓언어에는 예술성만이 아니라 의학적인 의미도 내포된 것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