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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늦가을 날 연가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 입력 2011.12.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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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 따스하던 너의 두 뺨이 몹시도 그리웁고나 푸르던 잎 단풍으로 곱게 곱게 물들어 그 잎 새의 사랑의 꿈을 고이 간직 하렸더니 아~ 그 옛날이 너무도 그리워라 낙엽이 지면 꿈도 따라 가는 줄 왜 몰랐던가 사랑하는 이 마음을 어찌하오 어찌하오 너와 나의 사랑의 꿈 낙엽 따라 가버렸으니 겨울의 문턱이다. 이 맘 때면 늦가을을 소재로 한 추억의 노래들이 맛깔스럽게 들린다. ‘찬바람이 싸늘하게 얼굴을 스치면~’으로 나가는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 빠지지 않는다. 차중락(車重樂, 1942~1968년)이 불러 히트한 이 노래는 늦가을 날 연가처럼 단골 곡으로 전파를 탄다. 오색단풍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고 나면 늦가을의 전령 차중락이 되살아나는 것이다. 지난날 젊을 때 불태웠던 옛사랑을 그리워하는 내용이라 팬들의 인기가 꾸준하다. 신세기레코드(주) 사장 아들이 작사4분의 4박자, 슬로우 록 리듬인 이 노래는 번안곡이다. 작사가는 강찬호. 미국가수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lesley)의 ‘Anything That's Part of You’를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이란 제목으로 부른 것이다. 원곡은 1962년 엘비스 프레슬리가 발표한 ‘Good Luck Charm / Anything That's Part of You’란 싱글음반에 담겨 있다. 작곡가는 돈 로버트손(Don Robertson).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원곡내용과 조금 다른 의미가 있는 노래다. 한 연인과 헤어진 뒤에도 그녀를 잊지 못하고 사랑했던 추억들을 찾아 헤매는 한 남자의 애절한 사연이 담겼다. 미국에선 엘비스를 대표하는 록 앤 롤(Rock-N-Roll)풍의 곡들과 대별되어서인지 반응은 별로였다. 차중락은 이 노래를 부를 때만해도 무명가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컬밴드라 할 수 있는 키보이스의 리드보컬로 가요계엔 1963년 데뷔했다. 엘비스 프레슬리, 폴 앵카의 모창으로 미8군 무대 등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에 얽힌 재미난 일화가 있다. 차중락은 이 노래를 취입하기 전 수년간 사귀어오던 이화여대생과 헤어지면서 실연의 아픔을 겪고 있었다. 엘비스 프레슬리 곡을 번안한 신세기레코드(주) 사장 아들 강찬호도 사정이 비슷했다. 강 씨는 실연의 아픔 속에 쓴 자작시(번안가사)에 ‘Anything That's Part of You’을 편곡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처음엔 독집음반을 준비하고 있던 쟈니리에게 주려했다. 하지만 실연을 당한 자신처럼 차중락도 여대생 집에서 결혼을 반대해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다는 걸 알고 동병상련으로 그에게 곡을 줬다. 그렇게 해서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은 1966년 11월 신세기레코드를 통해 발표됐다. 노래는 맨 처음 부산서 돌풍을 일으킨 뒤 전국을 흔들었다. 차중락 인기, 세상 떠나 뒤에도 여전미국서 크게 성공하지 못했던 ‘Anything that's part of you’가 우리나라에서 사랑을 받은 데에는 이유가 있다는 게 가요계 사람들의 평이다. 분위기에 어울리는 비음과 떨림이 섞인 차중락의 애잔한 목소리, 영문노래 말과는 다른 느낌의 번안가사, 곡이 발표됐던 시기가 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노래를 부른 차중락의 갑작스러운 요절과 슬픈 사연도 인기를 끄는데 한몫했다. 세상을 떠난 계절이 노랫말 속의 낙엽 지는 가을이어서 팬들이 많이 찾았다. 노래제목처럼 차중락 본인을 암시하는 듯한 곡이라 눈길을 끈다. 차중락의 인기는 세상을 떠나 뒤에도 여전하다. ‘차중락 기념사업회’가 만들어졌고 회장은 가수 최희준이 맡았다. 그의 동생 차중광과 사촌형인 차도균은 “중락의 뒤를 이어 훌륭한 가수가 되겠다”며 제2․제3의 차중락이 나왔다. 영화계에선 차중락 붐을 타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들도 만들어졌다.특히 소녀 팬들이 많았다.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힌 차중락의 무덤가에서 밤샘을 하는 소녀들이 있을 정도였다. 여고 3학년인 H양은 언론에 보도됐을 만큼 열렬 팬이었다. 무덤 옆 돌로 만든 성(城)엔 아가씨들 편지가 쌓였다. 그 소녀는 차중락 무덤가에 돌을 모아 성을 쌓았다. 우체통역할을 한 성 안엔 고인에게 바치는 연서(戀書)들이 수북했다. 사연들이 구구절절 했다. 묘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아 잔디도 엉성한 무덤 옆 돌 우체통은 비를 가릴 정도이고 편지는 펼쳐볼 수 있게 ‘노트’로 엮어졌다. H양은 차중락이 입원했을 때 거의 매일 병원을 찾았고 임종도 지켰다. 그녀는 일기체로 된 3권의 연서를 무덤 앞에 내놨다. 팬에서 ‘오빠’로, ‘임’으로 바뀌었다. 망우리에서 열린 차중락 묘비제막식 땐 중3~고3 여학생 50여명이 와 눈물을 흘렸다. 1969년 2월 11일 건립된 최중락의 추도비엔 기념사업회 명의로 시가 새겨져 있다. 제목은 ‘낙엽의 뜻’, 조병화 시인이 짓고 그의 맏형 차중경이 썼다. 시 내용은 고인이 불렀던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 노래가사와 같은 느낌이 든다.사촌형 차도균 권유로 키보이스 리드보컬 합류차중락은 1942년 서울 신당동에서 8남3녀 중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차준달)은 큰 인쇄소를 경영해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다. 부친은 보성전문 마라톤선수, 모친(안소순)은 경기여고 단거리선수였다. 시인 김수영은 큰이모의 아들로 이종사촌간이다. 차중락은 장충초등학교, 경복중, 경복고를 다니며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대학(한양대 연극영화과 중퇴)에선 보디빌딩을 해 1학년 때인 1961년 미스터코리아 2위에 입상하기도 했다. 잘 생긴 얼굴, 건장한 몸매, 엘비스 프레슬리를 빼다 박은 뛰어난 목소리로 1960년대 말 젊은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누렸다. 미8군에서 ‘코리언 엘비스’로 불렸을 만큼 외국과 한국정서를 퓨전한 감정처리가 독특했다. 저음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매력적이었다. 영화감독을 꿈꿨던 그는 영화마니아였다. 음악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건 동화백화점(지금 신세계백화점) 4층의 음악감상실에서 접하게 된 팝과 재즈에 빠져들면서부터다. 좋아했던 가수는 폴 앵카와 엘비스 프레슬리. 무대에 올라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를 부를 땐 반응이 좋았다. 그러던 중 그는 일본서 노래아르바이트를 하며 영화감독수업을 받겠다는 꿈을 갖고 1963년 학교를 중퇴, 밀항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게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까지 겹쳐 방황했다. 그는 키보이스 맴버인 사촌형(차도균)의 권유로 1963년 키보이스 리드보컬에 합류, 새 인생의 전기를 맞았다. 고무장화를 신고 엘비스 모창을 멋들어지게 하며 대중들에게 첫 선을 보인 시민회관공연은 성공적이었다. 미8군 무대에서도 인기였다. 그렇게 되자 차중락에겐 솔로가수 독립 유혹이 거셌다. 1967년 솔로독립 후 아침에 눈을 뜨면 차가운 콜라를 2병이나 마셔야 정신을 차릴 만큼 피로가 쌓이고 눈코 뜰 새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배호와 라이벌… 27세에 별세그의 라이벌은 드럼연주자 출신으로 최고인기였던 가수 배호였다. 친구였던 둘은 가요황금기의 쌍두마차였다. 그룹출신이었던 둘은 전혀 다른 매력의 트로트와 팝 창법으로 여성 팬들 지지를 받았다. 배호는 기혼여성들, 차중락은 젊은 여성들 사랑을 독차지했다. 솔로독립 후 최대히트곡은 TBC 라디오드라마주제가 ‘사랑의 종말(신세기, 1967년).’ TBC 방송가요대상 남자 신인가수상을 받은 명곡이다. 그러나 차중락 개인이 좋아했던 곡은 ‘마음은 울면서’와 ‘철없는 아내’였다. 달콤한 노래, 낭만적이며 호탕하고 부드러웠던 차중락의 일거수일투족은 여성 팬들 관심사였다. 극성 여성 팬들의 접근이 스캔들로 비춰지고 미8군 시절부터 그를 사랑했던 외국인 여성 알렌의 존재도 정신적 부담이 됐다. 건장했던 젊은 가수도 인기란 족쇄엔 무기력했다. 건강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바쁜 연예생활과 잦은 스캔들에 시달리던 그는 서울 동일극장 무대에서 고열로 쓰러졌다. 그는 결국 1968년 11월 10일 27세의 젊은 나이에 뇌막염으로 숨을 거뒀다. 가수생활동안 그가 남긴 노래는 20여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