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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사랑하는 이의 눈물 뒤로 하고,무정히 떠나가는 배야~

  • 입력 2012.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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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푸른 물결 외치는 / 거센 바다로 떠나는 배
내 영원히 잊지 못할 / 임 실은 저 배는 야속하리
날 바닷가에 홀 남겨두고 / 기어이 가고야 마느냐

터져 나오라 애슬픔 / 물결위로 한 된 바다
아담한 꿈이 푸른 물에 / 애끓이 사라져 나 홀로
외로운 등대와 더불어 / 수심 뜬 바다를 지키련다

저 수평선을 향하여 / 떠나가는 배 오! 설운 이별
임 보내는 바닷가를 / 넋 없이 거닐면 미친듯이
울부짖는 고동 소리 / 임이여 가고야 마느냐

양중해 작시, 변훈 작곡의 가곡 ‘떠나가는 배’의 무대는 제주도다. 6·25전쟁이 한창 때인 1952년 7월 작곡·작시(作詩)됐다. 이듬해 레코드에 취입됐고 중·고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 초 제주로 갔던 피난민들을 싣고 뭍으로 떠나가는 배를 바라보면서 이별의 정서를 담은 양중해 시인(1927년 5월 2일~2007년 4월 4일)의 시 ‘떠나가는 배’가 바탕 노랫말이다.
양 시인이 이 시를 쓴 동기와 내용에 대해선 여러 설들이 있다. 6·25전쟁 중 모슬포훈련소에서 전장에 동원되기 위해 육지로 가는 병사들 모습을 보고 쓴 시란 설이 있다. 어느 유명시인이 사랑하는 여자와 제주부두에서 이별하는 장면을 보고 시상(詩想)을 얻어 쓴 시란 얘기도 있다. 이 노래는 같은 무렵 피난 왔던 실향민 변훈(邊焄, 1926~2000년 8월 29일)씨가 양 시인의 시에 곡을 붙여 국민애창곡이 됐다는 게 정설에 가깝다.

노랫말 된 시(詩) 먼저 만들어진 뒤 작곡
개인지도로 음악을 배운 변 선생은 전쟁이 나자 제주로 피난 와서 제주농업고등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작사자 양 시인은 이 학교 국어교사로 둘은 친했다. ‘떠나가는 배’ 노랫말(시)이 먼저인가, 작곡이 먼저인가엔 의문이 있긴 하나 양 시인의 원시(原詩)를 보면 시가 먼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999년 12월 28일 세워진 ‘떠나가는 배’ 시비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높이 3m, 너비 2.2m 크기의 시비는 제주항 여객선부두가 바라보이는 제주시 탑동 해변공연장 잔디밭에 세워졌다. 시비 건립을 주관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 예총) 제주도지회는 “새 천년에는 우리민족이 하나 되어 희망봉을 향해 떠나가는 배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하는 뜻에서 이 비를 세웠다”고 밝혔다. 비에 새겨져 있는 ‘떠나가는 배’(원시)는 지금의 노랫말과 약간 다르다. 노래 2절에 해당되는 가운데 대목이 지금의 노랫말과 꽤 다르다. 만들어진 곡에 가사를 붙였다면 1, 2, 3절의 운율을 맞췄을 것이므로 시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2002년 양 시인이 살아있을 때 잡지 ‘삶과 문화’에 수필가 조명철 씨가 쓴 ‘시인 양중해의 삶과 예술’이란 글을 봐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제주제일중학교 국어교사시절 양 시인이 쓴 시 ‘떠나가는 배’를 음악교사였던 변훈 선생이 보고 “곡을 붙이면 좋겠다”고 해서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다.
변 선생은 생전에 “하루 한 번씩 부산에서 피난민을 태운 배가 제주항에 닿으면 항구는 통곡으로 변했다. 뒤쳐진 가족이나 친구가 왔나 하고 먼저 와있던 피난민들이 모두 모였다. 만나면 기뻐서 울고, 못 만나면 비통해서 울고, 어떤 이는 기다릴 수 없어 다시 그 배로 가족을 찾아 뭍으로 떠났다”고 회고했다. ‘떠나가는 배’ 곡이 만들어진 배경이기도 하다.
또 하나 궁금증을 주는 건 양 시인이 살아있을 때 시집 ‘파도’(1963년), ‘한라별곡’(1992년), ‘수평선’(2003년)을 펴냈지만 3권 모두에 ‘떠나가는 배’가 실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일부 시인들의 경우 노랫말로 쓴 건 자신의 시에 넣지 않는다는 견해다. 시로 쓴 게 아니라 곡에 가사를 붙인 것이어서 시집에 싣지 않았을 것이란 얘기다.
물론 곡이 먼저란 시각도 없잖다. 변 선생이 세상을 뜬 뒤 2004년 성악가 구희용 씨가 펴낸 ‘변훈 작곡집’에 그런 내용을 뒷받침하는 글이 실렸다. 그 무렵 변 선생이 제주항에서 피난민들을 실어 나르는 배를 보며 악상을 떠올린 뒤 작곡, 같은 학교의 양중해 국어선생에게 ‘떠나가는 배’ 가사를 부탁했다고 돼있다. 곡을 먼저 만들어놓고 가사를 붙였다는 것이다.

노래 만들어지고 20년 지나 유명해져
‘떠나가는 배’는 노래가 만들어지고 20년 가까이 빛을 보지 못하다가 그 뒤에 대중들에게 알려진 가곡으로 흥미롭다. 노래는 전쟁 때인 1952년 가을 부산서 열린 ‘젊은 작곡가의 밤’ 음악회에서 테너 안형일 씨가 처음 불렀다. 이날 변 선생의 또 다른 신작 ‘명태’도 발표됐으나 혹평을 받으면서 ‘떠나가는 배’까지 국민들에게 잊혀진 노래가 됐다. 변 선생은 이때의 충격으로 작곡가 길을 접고 대학을 다닐 때인 1953년 외무부 특채공무원으로 외교관이 됐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그러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작해 1970년대에 들어와서 ‘떠나가는 배’는 되살아났다. 우리 가곡이 붐을 일으키면서 ‘명태’와 함께 부활했다. 두 곡은 그 뒤 대중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일약 유명가곡으로 떴다.
변훈 선생은 1926년 함흥에서 태어나 1954년 연희전문학교(현재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 부영사, 파키스탄 총영사, 포르투갈 대리대사를 지냈다. 1947년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인 ‘금잔디’를 시작으로 윤동주 작시 ‘무서운 시간’(1948년), 시인 김광섭의 ‘차라리 손목 잡고 죽으리’(1952년) 등의 노래를 만들었다. 6·25전쟁 땐 육군종군작가였던 양명문의 시에 음을 붙여 대표작 ‘명태’를 대구에서 작곡했다. 그 때 변훈은 국군연락장교(미8군 통역관)로 전투에 참가 중이었다. 이 노래는 바리톤 오현명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졌다. ‘낙동강’ ‘떠나가는 배’ ‘한강’ ‘설악산아’ ‘쥐’ ‘님의 침묵’ ‘초혼’ ‘설야’도 작곡했다. ‘자장가’ ‘갈매기’ 등은 작시까지 했다.

작사가 이름 수십 년 만에 바로 잡아
‘떠나가는 배’의 또 다른 에피소드는 작사자 이름이 수십 년 만에 바로잡혔다는 점이다. 여기엔 양 시인과 언론사에 일했던 그의 제자와의 얘기가 얽혀있다. ‘떠나가는 배’가 만들어진지 32년 지났을 때로 양 시인이 제주대 교수로 있을 때였다. 양 교수는 1984년 9월 어느 날 제주시 관덕정 부근의 제주MBC에 들렸다. 매주 한번 방송출연을 위해서였다. 제주MBC엔 양 교수가 제주 오현고 국어교사로 있을 때의 제자(아나운서 출신 김순두 씨)가 라디오 편성부장으로 있었다. 김 씨는 제주 최초의 TV아나운서로 유명하다. 그는 제주MBC 아나운서실장, 편성국장, 보도국장을 거친 뒤 1999~2006년 KCTV 제주방송 사장을 지냈다.
김 부장은 편성국으로 들어온 은사(양 교수)를 반갑게 맞았다. 출연에 앞서 두 사람은 차를 한잔 마시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떠나가는 배’가 흘러나왔다. 순간 양 교수는 “저거 내 노래”라고 말했다. 김 부장이 “무슨 말씀이세요? 내 노래라뇨?”하고 묻자 양 교수는 “저거 내가 작사한 거야. 내가 쓴 거지”라고 답했다. 마음이 곱고 부드러웠던 양 시인은 ‘떠나가는 배’가 오랫동안 다른 사람 이름으로 방송과 음악교과서에 소개됐어도 “자신의 작품”이란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가 그날 무심결에 한 것이다. 양 교수는 “6.25전쟁 때 피난민들은 물론 문학인들도 많이 제주에 왔었다”며 “그 분들이 제주를 떠나가는 모습을 서부두에서 보며 그 때의 감상을 쓴 것”이라고 설명했다.
전쟁 때 제주엔 소설가 계용묵 씨 등 문인들이 40명 가까이 와있었고 미술가 이중섭씨도 1951년 한 해 서귀포에서 가족들과 살다 부산으로 돌아갔다. 김 부장은 그 자리에서 가깝게 지내던 서울MBC 본사 FM부 박경식 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 차장은 그 때 FM에서 하는 ‘나의 음악실’ 담당PD로 양 교수 얘기를 한 것이다. 그 뒤 양 교수는 서울MBC FM방송의 ‘나의 음악실’ 프로그램에 출연,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됐다. 이어 박 차장은 문교부(현재 교육과학기술부)에, 김 부장은 제주도교육청에 이런 사실을 알리고 잘못된 작사자 이름 바로 잡기에 나섰다. 김 부장은 이어 자신의 기획으로 그해 11월 5일 제주시민회관에서 ‘제1회 제주MBC 가곡의 밤’행사를 열었다. 사회자는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기에 앞서 “떠나가는 배 작사자는 제주도민들이 존경하는 시인 제주대 양중해 교수”라고 소개했다. 관객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 후 음악교과서를 비롯해 모든 자료에 작사가 이름이 ‘양중해’로 바뀌었다. 제자인 김 부장이 은사를 위해 이뤄낸 결실이었다.

박목월이 시(詩)로 쓴 ‘시인 양중해’
양 시인을 아는 제주사람들은 그를 ‘제주의 마지막 선비’였다고 떠올린다. 인격적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전 생애를 통해 주위사람들에게 많은 감화를 줬기 때문이다. 그는 박목월(1916~1978년) 시인과도 친분이 있었다. 박목월이 작고하기 전인 1977년 6월 어느 날 양 시인이 도쿄대로 연구차 가게 됐을 때 서울 원효로(청파동) 목월선생 집으로 찾아갔다. 이때 목월은 대학노트에 적어놨던 초고를 원고지에 옮긴 ‘양중해 씨를’이란 제목의 시를 줬다. 양 시인 모습과 성품을 한 눈에 그려볼 수 있는 시이다. 1992년에 낸 양 시인의 두 번째 시집 ‘한라별곡(漢拏別曲)’에 그 때 받은 원고지를 찍은 사진과 실렸다. 양 시인은 이 시를 받고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다. 이듬해 한참 뒤에야 박목월 시인의 부음소식을 들었다. 많은 이들이 양 시인에 대해 하는 이야기들이 이 시에 담겨있다. ‘왜 떠나가는 배’ 작사자 이름이 노래가 만들어진지 32년이나 지난 1984년에야 양중해로 바로 잡혀지게 됐는가?’ ‘왜 그렇게 오랜 세월을 흘려보냈을까?’ 하는 그 이유를 이 시는 행간에서 말해준다. 제주시 화북동에서 태어난 양 시인은 1959년 박목월, 유치환의 추천으로 ‘사상계’를 통해 등단했다. 등단 시는 ‘그늘.’ 양 시인은 제주대 교수, 한국언어문학회장, 제주문화원장 등을 지냈다. 양 시인은 2007년 4월 4일 오후 4시 55분 자택에서 숙환으로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