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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꿈 그림의 예고성(豫告性)과 화가의 상상력

  • 입력 2012.04.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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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에게는 꿈이 대단히 불가사의한 것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을 꿈에서 만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신기하게 여겨 사람이 꿈을 꿀 때는 자기의 혼에 신령의 힘이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특히 질병은 정령(精靈) 또는 악마 같은 초자연적인 것에 의해서 야기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런 초자연적인 마력(魔力)을 극복하여 이를 몸 밖으로 쫓아낼 수 있는 힘은 오로지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신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어느 민족을 막론하고 의약의 창설자는 전지전능한 힘을 지닌 신이라 믿어 의신(醫神)으로 모셨다. 따라서 이 세상의 대부분의 문화민족들은 자기 민족에게 처음으로 의술(醫術)을 전수(傳受)한 의신을 모시고 있다.
그리스의 경우 신화시대 의술의 신인 아폴론에게는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라는 아들이 있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에피다우로스에다 요즈음의 의과대학 겸 부속병원 비슷한 신전을 세우고 의술을 가르치는 한편 환자를 진료하였다. 저자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과 박물관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 그 박물관 직원의 설명에 의하면 그 당시 에피다우로스에서는 환자가 오면 우선 신전에서 잠자게 하였는데 꿈속에 뱀이 나타나 온몸을 감싸며 기어 다니며는 병이 낫는다는 예시의 꿈을 꾸게 된다는 것, 즉 뱀을 의신의 사자(使者)로 여겨 그 뱀을 만나기를 원하게 된다는 것, 그래서 이 신전을 지키던 신관들은 이 신전에다 독이 없는 흙빛 뱀을 키웠다고 하는데 신관들은 이 뱀들을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다음날 흙빛 뱀을 풀어놓아 환자의 잠자리에 같이 있게 하면 며칠 내에 병은 나았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신전에서 잠을 자기 전에 꿈에서 뱀을 만나게 되면 병이 나을 수 있는 증조라는 사전 암시를 주기 때문이 아니었는가 생각된다.
그래서 의술을 상징하는 오늘날의 마크에서까지 지팡이와 뱀이 그려지는 것은 바로 그리스의 의신 아스클레오피스에 유래된 것으로 지팡이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이며, 뱀은 바로 아스클레피오스의 사자인 독 없는 흙빛 뱀인 것이다. 즉 꿈을 통해서 신령의 의지가 계시된다고 믿어 좋은 일이 있거나 재앙이 닥칠 때는 자신의 꿈을 통해서 그것이 예고되는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1L]스페인의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Francisco de Goya.1746 ~1828)의 작품은 에스파냐의 독특한 니힐리즘에 깊이 뿌리박힌 작품들을 그려왔는데 이러한 경향에서 일대 전환하는 동기가 된 것은 청각을 잃을 정도의 중병을 앓은 체험과 나폴레옹군의 에스파냐 침입으로 고조된 민족의식 때문에 당시 사회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와 고발을 담은 작품을 내놓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의 하나가 ‘로스 카프리초스 Los caprichos (변덕)’(1796∼1798)라는 80장으로 된 연작판화로써 그 풍자의 대상은 귀족, 성직자, 예술가, 선생, 사기꾼 등 다양하다. 그중에서 plate 43인 ‘이성(理性)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 The Sleep of Reason Produces Monsters’(1799)라는 그림을 보면 얼굴을 파묻고 잠에 든 것은 화가 자신이며 꿈을 꾸는 장면이다. 그 배후에는 수리부엉이, 산고양이, 박쥐 등의 동물이 나타나 있다. 즉 이성이 잠자는 것과 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으면 온갖 잡것들이 날뛰어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잠든 이성에게 수리부엉이 한 마리가 펜을 들고 잠에서 깨어나 펜을 놀릴 것을 종영하고 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세상이 하도 어지러우니 사람들이 꾸게 되는 것은 악몽뿐이라는 것이다. ‘악몽을 꾸는 이성의 잠’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즉 이 판화는 그 당시 사회의 지성들에게 주는 도덕적 비판을 꿈이라는 그림을 통해서 신랄하게 하고 있다.

꿈이 수면상태에 들어가면서 일어나는 뇌내과정(腦內過程)에서 꿈의 표상현상을 보는 수가 있는데 이것은 수면에 들어갈 때 또는 반각성시에 볼 수 있는 입면시 환각(入眠時 幻覺)으로 정상적인 사람에게도 간혹 볼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입면시의 환각을 잘 표현한 그림으로는 프랑스의 화가 부그로 (Adolphe William Bouguereau 1825~1905)가 그린 ‘프쉬케와 에로스’(1889)를 들 수 있다.
이 그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쉬케와 에로스의 이야기의 한 장면을 그린 것인데, 신탁의 명령에 따라 프쉬케는 죽음의 신부(新婦)이기에 산의 정상에 버려졌다. 산위에 홀로 누워있는 프쉬케의 주위에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더니 어두워져버렸다. 모든 것을 체념하고 눈물만을 흘리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프쉬케는 별안간 아주 기분 좋은 서풍이 불어옴을 느끼자마자 몸이 가볍게 하늘로 기분 좋게 떠 올라감을 느꼈다. 에로스가 품에 안은 것이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한 것인데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더불어 에로스가 프쉬케를 가슴에 안고 하늘로 오르는 장면으로 프쉬케는 탈진된 반수면 상태에서 자기의 몸을 가누지 못하는데 어떻게 보면 황홀해서 무아지경에 빠진 것도 같다. 에로스는 자기의 소원대로 프쉬케를 얻었으니 만족과 기쁨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사람들이 수면에 들 때 또는 반각성(半覺醒) 상태에서도 꿈의 표상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직관상 체험(直觀像 體驗)이라고도 하며 정상적인 사람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것을 잘 표현한 그림으로는 미국의 화가 엘리후 베더(Elehu Vedder 1836-1923)의 ‘죽음의 잔, The Cup of Death’(1885)이라는 작품이 있다. 이 그림은 중세 페르시아의 시인 오마르 하이얌의 시집 ‘루바이야트’의 시를 작품화한 것으로 그 시집에는 이러한 문구가 쓰여 있다.
“검은 천사가 그대에게 잔을 내밀며… 그것을 입에 대라고 그대의 영혼에 호소하면, 그대는 이를 뿌리치지 못하리라.”
그림 왼편의 날개달린 여인은 죽음의 신이며 죽음의 잔을 오른편의 여인의 입술에 갖다 대고 여인은 죽음을 마치 잠자는 것 같이 생각하였는지 죽음의 잔을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
결국 꿈에는 시간적인 축이 없고 주관적인 시간만이 지각되기 마련인데 주관적인 시간에서 인간은 자신의 과도한 욕망을 저지하려 하지 않고 그러는 과정에서 각종 스트레스와 고민에 쌓이고 또 꿈속에서 그것을 푸는 길이 없을 때 결국 사람은 의지와 확신을 잃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여 꿈의 직관상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일시적이나마 그 상황을 모면하려는 도피현상이 되는 것이다.

[2L]스위스 출신의 영국화가 퓌슬리(Johann Heinnrich Fussli (1741~1825))는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선보인 화가로 유명하다. 그는 ‘예술에서 가장 탐사되지 않은 부분은 꿈’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인간의 내면에 대한 끝없는 호기심을 지닌 화가였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악몽(惡夢)’ (1781)이라는 그림은 바로 그 미지의 영역을 소재로 그린 그림이다.
아주 불편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는 여인의 꿈을 그린 것이다. 여인의 가슴위에 작은 괴물 하나가 올라앉아있다. 영악해 보이는 그 괴물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여인의 몸을 굽어본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여인이 지금 얼마나 흉악한 꿈을 꾸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배경에는 한 마리의 백말이 커튼을 헤치며 머리를 내밀고 있는데, 눈동자가 없는 장님 말이다.

이 그림에서처럼 우리도 악몽을 꾼다. 그러나 우리의 악몽 속에 출몰하는 기괴한 존재들을 현실에서는 만날 수 없다. 그것들은 우리 안에 있다가 우리의 의지가 약해지고 확신이 무너질 때 그것들은 감옥에서 탈옥한 범죄자들처럼 우리의 꿈속을, 우리의 무의식 속을 헤집고 다닌다. 퓌슬리의 그림은 우리가 의지와 확신을 잃거나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을 때 악몽이 우리 영혼을 낚아채는 장면을 포착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특히 이런 공포를 조장하는 시대가 있다. 퓌슬리는 자신의 시대에서 이런 징조를 보았고, 거기서 느낀 전율을 이렇게 표현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