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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전설 ; 살아남은 자의 슬픔 Ⅱ

  • 입력 2012.09.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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받아들여지지 않는 죽음

트리스탄의 해결되지 않은 애도 반응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새뮤엘이 사망할 때의 환경이다. 사망 시의 환경이란 사망의 장소, 사망의 원인, 사망에 대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준비 정도가 어떤가 하는 점이다. 사람들은 사망 시의 환경을 받아들일 수 있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면 애도 과정은 쉽고 빨리 해결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집에서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평화롭게 천수를 다하고 임종을 맞았다면, 남은 가족들은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예견된 죽음은 비록 커다란 슬픔이 있다고는 하더라도, 환자가 앓아오는 동안 가족들은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게 되는 경우이다.

그러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 대한 준비를 할 시간이 없어 커다란 충격과 사후에 닥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느라 당황하게 되고 더 큰 고통 속에 놓이게 된다. 새뮤엘의 죽음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트리스탄은 준비가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가 동생을 잊고 자신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의 죽음은 모두 갑작스런 것들이었다.

새뮤엘은 그의 눈앞에서 전사했으며, 인디언 혼혈의 아내 이자벨은 경찰의 유탄에 맞아 사망했고, 마음속의 연인이었던 스잔나는 자살을 했다. 이런 갑작스런 세 차례의 죽음은 누구라도 견디기 어려운 고통일 것이다. 그는 한 번도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낼 마음의 준비 없이 애도 과정 속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또한 살아남은 자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게 되어도 애도 과정은 복잡해진다. 바로 죽음에 대한 죄책감이 애도 자를 괴롭히기 때문이다. 트리스탄은 항상 곁에서 돌보던 동생이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바로 눈앞에서 철조망에 얽힌 채 죽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방심이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을 가지게 되고,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러 곳을 떠돈다. 아내 이자벨도 트리스탄이 밀주를 판매하지 않았다면, 경찰이 그를 겁주기 위해 길목을 지키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트리스탄은 아내의 죽음에도 책임을 느꼈을 것이다. 스잔나의 자살은 어떤가? 스잔나는 트리스탄을 사랑했으며, 그가 방황을 끝내고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그는 그녀에게 자신을 포기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기다리다 지친 스잔나는 사랑하지도 않는 알프레드와 결혼해서 무덤덤한 결혼생활을 하게 된다. 이자벨이 죽은 후, 그녀도 자살하고 만다. 트리스탄이 방황을 끝내고 스잔나를 받아들였다면, 그녀는 자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극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가령 남편이 고혈압이 있다는 사실을 d라고 있으면서도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병원으로 가서 치료를 받으라고 권하지 않았던 아내는, 남편이 뇌일혈로 죽은 뒤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것 같은 일은 흔하다. 사망의 부적절성도 트리스탄의 애도 과정을 끈질기게 잡고 늘어진다. 어느 죽음이든 적절한 죽음이란 없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천수를 누리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게 되면 문상객들은 ‘호상’이라며 가족을 위로한다.

가족들도 이런 생각에 동의하며 애도 과정을 무난하게 마치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길로 들어섰을 때의 나이는 그래서 중요하다. 젊은 사람의 죽음은 가족뿐 아니라 여러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죽은 자가 하늘로부터 받은 명을 충분히 누리지 못했으며, 그의 꿈이 실현되지 못하고 꺾였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의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는 그래서 평생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죽은 새뮤엘은 몇 살이나 되었을까? 기껏해야 갓 스물을 넘긴 나이의 동생이 죽었다고 한다면, 그것을 바라보는 형의 입장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사망 전의 상황도 중요한데, 한평생 열심히 직장생활을 한 사람이 정년퇴직 후 이제 여생을 편하게 지내게 되었을 때 죽었다면 어떨까? 사람들은 참 죽음이 공정치 못하며 억울하다는 느낌, 인생이 허망하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마찬가지로 새뮤엘은 자기 나라의 전쟁도 아닌, 남의 나라 땅에서 단지 정의를 세우고자 하는 이상을 좇아 참전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는 너무나 허망하게 시체로 변한 것이다.

원만한 애도 과정의 조건

외적 요인으로 인해 트리스탄의 애도 과정이 실패했다면, 애도 과정에 놓인 사람들의 내적인 요인, 즉 잘못된 생각으로 애도 과정이 길어지고 실패하는 수도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해 생기는 슬픈 감정과 비탄을 용인하지 않으려 한다. 커다란 슬픔을 갖게 되면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한 번 울기 시작하면 도저히 그칠 수 없을 것 같다고 애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그리 슬프게 통곡을 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데 자기만이 눈물을 흘리며 애도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또는 스스로에게 약하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이것은 남자에게 더욱 많이 나타나는 현상인데, 어릴 때부터 남자는 울음을 부끄럽게 여기도록 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는 평생 세 번만 울어야 한다는 등의 얘기 때문에도 남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등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사자에 대한 슬픔의 배출 통로는 막혀 버리고 해결되지 못한 채 가슴속에 남게 된다. 어떤 남자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날 때마다 아내 몰래 베갯잇을 적셨노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애도 과정에 스스로 흠뻑 빠져들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또 다른 이유로는 무의식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시신 앞에서 통곡한다는 것은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을 기정사실화한 것을 뜻한다. 그러기에 한사코 애도 과정으로 들어가지 않으려 버티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떠나보내지 않고 붙잡아 두려 한다.

애도 과정이라는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여 애도 반응이 해결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커다란 상실감을 맞닥뜨리는 것을 피하고 싶은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사자와 자신을 한 몸이라고 생각해서 애도 반응을 질질 끌기도 한다. 자신이 사자에 대한 슬픔을 모두 잊고 일상생활로 돌아간다는 것은 사자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사자와 한 몸이 되어 슬픔 속에 휩싸인 채 평생을 보낸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을 떠나보낼 수는 없어요.

당신이 불행한 죽음의 늪으로 떠났듯이 나도 이제 당신처럼 불행한 생활을 계속하렵니다.” 또 어떤 이는 사자와 자신의 관계를 되돌아보는 것이 두려워서 애도 과정을 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사자에 대한 증오나 분노, 서운한 감정을 갖는 것은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며, 자신이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감정을 묻어둔 채 사자에 대한 죄책감으로 세월을 보내기도 한다. 애도 과정을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점이다. 애도를 하기 위해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인정해야 한다.

만약 죽음을 부정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사실을 거부한다면, 당연히 애도 과정은 시작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은 죽지 않았고, 잠시 헤어져 있을 뿐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애도 과정은 시작된다. 애도 과정이 시작되기 위해 시신을 봐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시신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은 욕구를 막는다.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사자에 대한 애도를 할 이유가 없다. 그래서 죽음의 확인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비행기 추락사고, 배의 침몰 사고, 건물의 붕괴 사고 등에서 생존자를 구하고 난 뒤 가장 중요한 것은 시신을 찾는 일이다. 시신을 찾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것은 법적인 절차 외에도 유가족들의 애도 작업을 돕기 위한 하나의 이유가 된다. 사람들이 애도를 할 수 있고, 애도를 시작하려면 사망의 증거가 있어야만 한다. 이러한 증거가 없으면, 아직도 살아 있다는 희망 또는 어떻게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이유로 애도를 연기한다. 삼풍백화점 사고에서 몇 십 구의 시신을 찾아내지 못했다. 당연히 유가족들은 지금까지도 어쩌면 그가 어딘가 살아있을 것이라는 기대감, 금방이라도 문을 열고 들어올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아니면 기억상실증에 걸려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질 수 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상화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피가 마르는 조바심을 가지게 되고, 애도 과정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으려고 안타까운 몸부림을 치게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의 불행은 시신을 찾은 유가족보다 더욱 클 수밖에 없다. 사자에 대한 포기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상에서의 적응이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인한 고통과 이별을 경험해야 한다. 가장 힘든 순간이며, 피하고 싶은 마음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한 인간의 소멸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망자가 자신에게 했던 많은 역할과 관계마저 한 순간 사라진다는 것을 뜻한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 있다고 했을 때, 아내는 남편에게 좋은 동료이자 두 아이의 양육을 책임지며,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가이자 여행의 동반자이며, 수줍은 성격의 남편이라면 아내는 다른 사람과 연결하는 다리의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다. 남편은 위에 열거한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잃게 된다. 고통을 경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모순적인 얘기지만 고통을 극복하고, 고통 안에 있어야 하고, 고통의 주변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애도 과정을 지연시키고 거부하려고 애쓴다. 위에 열거한 많은 상실을 생각하지 않으려 하거나 생각날 때마다 그런 생각을 없애 버리려 한다. 의도적으로 상실을 최소화하려 한다. 다른 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려고만 할 뿐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이런 애도 반응은 쓸데없는 일이며, 사후에 재결합할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도 있다. 상실과 분리의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일부러 바쁜 일정을 짜고 일에 몰두하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애도의 지연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애도 과정을 해결하고 싶고, 건강하게 아무런 후유증 없이 지내고 싶다면 결국 고통의 바다를 건너야만 한다. 바다를 건너는 동안 도리어 고통은 도움을 준다. 그렇다고 애도의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마음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피학성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고통을 즐겁게 받아들일 사람은 없다. 고통을 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지만, 마냥 피해 다니기만 한다면 미래에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은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현재 고통의 계산을 끝내든지 아니면 나중에 대금을 지불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나중에 계산한다면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 미루게 되면 더 많은 방어기제를 요구하게 된다. 애도 감정을 피하기 위해 견고화된 방어와, 오랜 기간 동안 축적된 고통의 공포와 증상이 있게 된다. 애도 반응이라 하더라도 마냥 고통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 애도의 고통에서도 잠깐씩의 휴식은 필요하다. 다음의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한 발짝 물러날 필요도 물론 있는 것이다. 그치지 않고 계속되는 애도의 고통은 사람들을 지치게 한다. 그럴 때면,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는 이런 고통을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다른 곳에 집중하고 싶고, 애도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자신을 스스로 통제하던 일상생활로 돌아가고 싶다는 징후로 볼 수도 있다. 이 때 집안을 청소한다든지 영화를 보거나 친구를 만나 잡담을 나누기도 하는 등 휴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휴식은 고통스런 애도 과정을 다시 돌아보는 데 필요하다. 애도 과정에서 벗어난 휴식은 도리어 애도 감정에서 생기는 불안한 에너지를 분출하는 출구가 된다. 휴식은 애도의 고통으로부터 지치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하다. 고통을 겪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했던 사람과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다루어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제 사랑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에 익숙해야져 하고, 자신의 삶에 집중해야 한다. 자신과 특별한 관계를 가졌으며, 자신을 자신답게 했던 고인 없이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고인이 있어야 가능했던 자신의 희망·꿈·기대·감정·사고 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러한 망자와의 이별은 우리가 원했던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고 이런 사실에 저항하게 된다. 애도 과정을 잘 마치려면 고인을 붙잡아두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포기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없는 새로운 세계에서 적응할 수밖에 없다. 전설이 된 사람사랑하는 사람 없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은 많은 인내와 노력이 요구된다. 적응은 매우 더디게 한발 한발 진행되지만 그렇게 인생에서 갑작스럽게 비워진 커다란 공간을 메워나가야 한다. 아내를 잃은 남편이라면, 아이들을 위해 손수 음식을 만들어야하고, 과제물을 챙겨 주고, 자신이 갈아입을 옷도 스스로 준비해야하며, 중요한 결정도 혼자 내려야 한다. 아버지가 사망한 후 1년 이상 심한 우울과 불안을 호소하는 여성이 있었다. 이 여성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가장 이상적인 남성으로 여겼으며, 결혼 후에도 중요한 결정은 모두 아버지와 상의하곤 했다. 갑작스럽게 없어진 아버지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세상이 무너져버린 느낌이었다. 아버지 없는 세상은 도저히 살아갈 희망이 없었다. 다행히 그녀의 우울증은 점차 나아지기 시작했는데 남편과 자녀의 도움 덕분이었다. 그녀는 이제 아버지로부터 받아오던 조언과 격려를 남편으로부터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편의 헌신을 받아들이면서 그녀의 우울증은 조금씩 나아졌다. 그녀 자신도 이런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했으며, 주변의 도움도 그녀를 애도 과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에서도 자기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 여성은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사후에 달라진 환경의 변화에 대처하는 것만이 애도 과정을 해결하는 열쇠가 된다. 애도 과정을 해결한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여러 가지 외적인 여건과 자신의 성숙된 심리 상태 등 여러 요인이 작용한다. 사람들은 흔히 시간이 흐르면 상실의 아픔은 해결된다고 하지만, 정말 해결된 사람은 많지 않다. 단지 가슴속에 묻고 지내고 있을 뿐이다. 트리스탄은 전사한 새뮤엘의 심장을 꺼내 집으로 보낸다. 그가 심장을 꺼낸 이유는 인디언 풍습에 짐승의 뜨거운 심장을 쥐게 되면, 인간의 영혼은 자유가 된다는 풍습에 따른 것이다. 트리스탄은 새뮤엘의 영혼을 자유롭게 하기 위한 의식을 치렀지만, 결국 그의 영혼은 새뮤엘의 심장에 갇히게 된다. <가을의 전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트리스탄은 다시 집을 떠난다. 그는 알프레드에게 아들 새뮤엘(동생의 이름과 같다)을 맡긴다. 트리스탄의 비극은 동생 새뮤엘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죄책감 속에 자학적인 생활을 한 데 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아들 새뮤엘을 형에게 맡기긴 했지만, 그가 맡긴 것은 너무나 부담스러운 또 다른 새뮤엘-죽은 동생의 영혼-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의 짐을 벗고 전설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