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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렘가의 가브리엘, Park Medical Center 신용호 원장

무법천지 속 한국인 의사가 전하는 희망 메시지

  • 입력 2013.02.05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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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가 있다면야 나이도 있고 하니 이제 그만 둬야죠. 그런데 누가 이런 곳에 오려고 하나. 그냥 내 일이다 생각하고 환자들 치료하고 있지요, 하하하.”
1970년대 중반 뉴욕의 빈민가 할렘은 마약과 살인이 판치는 무법천지의 도시였다. 그런 그곳에 작은 동양인 의사 한명이 들어왔다. 정부의 보조금이 아니면 치료조차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의사로 돈을 모을 생각이면 아예 발조차 들이지 말아야 하는 곳이다. 누구도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곳, 그런 그곳에 머나먼 땅 동양에서 온 의사가 아무런 대가도 원하지 않고 이곳에 들어왔다. 대가는커녕 신변의 안전조차 보장할 수 없는 곳,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한 번도 웃음을 잃지 않고 36년을 지켜왔다. 이제 38세의 젊은 청년은 이제 일흔이 훌쩍 넘어버렸다. 하지만 환자에 대한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은퇴도 생각했지만 후임자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자리를 지키겠노라는 말하는 Park Medical Center 신용호 원장. 그의 눈빛에는 36년 전 청년의 기운이 아직도 살아있다.

하루, 그래 하루만 더… 그렇게 지낸 36년의 세월

경남 거창군에서 태어나 6.25 이후 부산으로 가 경남고와 부산의대를 졸업한 신용호 원장. 그는 육군 군의관을 마치면서 의사로서 더 큰 꿈을 이루고자 1969년 도미渡美를 한다. 당시 외화 유출을 우려한 故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가족이 나갈 경우 한사람만 먼저 출국시키는 정책 때문에 신 원장이 도착한 다음해 가족이 다 같이 모일 수 있었다. 신 원장은 저지시티 Christ Hospital과 Newark Medical School에서 인턴과 레지던트를 마친 후 뉴욕 브룩클린 쥬이쉬 병원에서 정식으로 근무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신 원장은 뉴욕 할렘 병원에서 조숙아들이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을 보고 UCA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VOLUME CYCLE RESPIRATOR를 연수하고 돌아온다. 이후 5년간 연구와 교육에 전념한다.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녹록치 않았다. 어느 눈이 펑펑 오던 날이었다. 변변한 차 한 대 없어 먼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가던 아내가 그 눈처럼 펑펑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개원을 결심한다. 그런데 얼마 후 할렘가에서 병원을 운영하던 의사가 찾아오고 대신 병원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자신의 병이 심해 운영이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부탁을 외면할 수 없어 그 병원을 찾아간 신 원장, 하지만 그 의사는 이미 죽고 난 후였다. 그냥 모른 척 외면할 수 있었다. 빈민굴에 마약과 살인이 판치는 곳, 누구하나 그를 비난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신 원장은 구원의 손길을 바라는 환자들을 그냥 보고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 단 며칠만 있는 거야’, ‘그래, 이번 한주만 더 하는 거야’라고 했던 것이 36년이 된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환자가 있는 곳이면 내가 있다

“예전부터 Park Ave, Main St. Broadway라고 하면 유명한 곳이었죠. 100년 전 Paterson. NJ는 방직공장 지역으로 면직물과 실크를 생산하는 도시로 번화한 곳이었습니다. Park Ave는 병원들의 거리였으나 방직공장이 사라지면서 흑인들의 마약 소굴로 변했습니다. 또 마약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살인이 따르게 마련이구요.”
그랬다. Park Medical Center는 그런 마약과 살인의 현장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신용호 원장의 병원에는 언제나 환자들이 넘쳤다. 주변에 몇 군데 병원이 생기기는 했지만 모두다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병원이 문을 닫을 때마다 환자들은 신 원장에게 ‘당신은 왜 가지 않느냐?’고 물었다. 환자들이 물을 때마다 신 원장은 말했다, ‘당신이 여기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물론 이곳을 지키는 의사라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조차 해내야 한다는 의미였다. 이 지역의 특징은 유난히 AIDS가 많다는 것이다. 처음 AIDS가 나왔을 때는 어른아이 할 것 없이 모두 설사를 해대며 북새통을 이룬 적도 있었다. 약도 없고, 전문병원도 없었다. 발병 후 1~2년이면 모두 사망하던 시절,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하고 진료를 해도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얼굴에 침을 뱉는 경우도 허다했다. 어찌 무섭지 않았을까, 하지만 AIDS에 대한 지식이 생기고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환자들을 편하게 대할 수 있었다. 한번은 AIDS 환자 진료를 할 때 맨 손으로 손을 잡자 오히려 그 환자가 기겁을 하면서 ‘선생님이 장갑과 마스크를 끼지 않으면 진료를 받지 않겠다’고 버틴 적도 있었다. 그 뒤 수년이 지나면서 약이 나오고 전문병원이 생긴 후에는 AIDS 환자들이 더 이상 오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예전에 있던 닥터 쥬이쉬가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마약류 처방을 남발했다는 것이다. 신 원장이 와서 더 이상 마약류 처방을 내려주지 않겠다고 하니 와서 행패를 부린 것이다. 검은 피부에 거대한 그들에게 어찌 감히 힘으로 대항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신 원장은 의사의 양심으로 결코 물러섬 없이 맞섰다. 그 오기에 기가 막혀서였을까, 큰 사고 없이 지금까지 있는 걸 보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힘든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는 남루한 옷차림의 한 남자가 찾아왔다. 의례 환자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이 동네 교회 목사란다. AIDS 환자 치료를 한다기에 교회로 초청하고 싶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어리둥절한 마음에 갔더니 모두가 기립해 박수로 신 원장을 맞아주었는데, 그 일이 지금까지도 그렇게 기억에 남는단다. 그 큰 위험과 고난에 대한 보상이 그것으로 다 되겠는가. 하지만 그 소박한 보람이 그를 지금까지 여기에 남게 한 원동력이었다. 

나에겐 이곳에서 할 일이 아직 남아있다

“가장 미안한 사람이라면 역시 가족들이겠죠. 그저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가족들에 대한 신용호 원장의 마음은 그저 ‘면목이 없다’다. 저녁 퇴근하고 돌아오면 온 몸에서 나는 냄새 때문에 아이들은 가까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아내도 그런 신 원장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다른 의사들은 돈도 벌고 외국 여행도 많이 다녀온다고 했다. 하지만 신 원장의 병원은 환자가 정부의료보조금을 받아야 한다. 예전에는 8.5달러였는데, 이제는 좀 올라서 25달러를 준다고 한다. 그러니 돈을 모은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다. 집도 35년 전 구입한 그곳에서 아직까지 살고 있다.
이제 일흔이 넘은 신 원장, 얼마 전부터 아내는 그에게 은퇴를 권한다. 동네 사람들은 의사 그만두면 시의원은 따 놓은 당상이라며 출마를 권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시의원은 생각 없고, 후임자가 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만 두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연 후임자가 올 수 는 있을지 걱정이다.
36년, 아니 40년을 연구와 교육, 그리고 진료를 위해 살아온 신 원장. 자신의 꿈을 쫒아 이곳까지 왔지만 한 번도 제대로 호강시켜주지 못한 아내에게, 그리고 어릴 적 햄버거 한 번 사주지 못한 것이 아직까지 그에게 한으로 남는다. 못내 미안하고 서럽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는 없다. 더 미안한 마음으로 남는 것은 아직까지 이곳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으며, 은퇴를 하더라도 이곳에 있고 싶다는 것이다.
36년 전 30대의 왕성한 혈기에 젊은 의사의 모습이 영화 미션에서 포르투갈과 남미 오지 사이로 한 손에는 성경,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오보에를 들고 인디언을 찾아가던 가브리엘 신부의 모습이 오버랩 되는 것은 필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