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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간만큼은 삼선 못지않은 선인이 되는 대둔산

  • 입력 2013.04.15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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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틈을 요리조리 부드럽게 흐르는 물줄기의 실로폰 같이 맑고 청명한 소리를 들으며 일주일정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담는다. 푸른 하늘은 눈에 담고, 청아한 물소리는 귀에 담고, 하얀 몽실 구름은 마음에 담고 아무 생각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1L]봄은 찾아가는 이에게 먼저 다가온다. 서울보다 남쪽으로 내려가면 봄은 와 있으리라 기대하며 떠난다. 고속도로를 가르며 봄의 향기와 나뭇가지의 연녹색 새순을 그려보는 행복감에 젖어본다. 이맘때쯤이면 생각나는 시인 박희진의 ‘새봄의 기도’가 어름어름 생각난다.
이 봄이 풀리게 내 뼛속에 얼었던 어둠까지 풀리게 하옵소서. 온 겨우내 검은 침묵으로 추위를 견디었던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을, 그리고 땅 속의 벌레들마저 눈 뜨게 하옵소서. 이제야 풀리는 아지랑이,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소리, 물소리에 귀는 열리게 나팔꽃인양, 그리고 죽음의 못물이던 이 눈엔 생기를, 가슴엔 사랑을 불붙게 하옵소서. 오래전 출장 중 기차 속에서 우연히 읽으며 봄을 맞는 숲속의 정경을 수채화로 그리는 듯 진한 감동을 느낀 이후 봄이면 생각나는 시다. 
많은 사람들이 봄은 꽃에서 시작된다고는 하지만 나는 화사한 꽃보다는 박희진 시인의 말처럼 나무엔 가지마다 초록의 눈이 더 좋고 골짜기마다 트이는 목청, 내 혈관을 꿰뚫고 흐르는 새소리, 물소리에서 더 진한 봄의 생동감을 느끼기 때문이지 않을까?

날이 밝아질 무렵 황진장군의 전승기념비가 서 있는 휴게소언덕에 도착했다. 이곳 이치전적지는 선조 25년인 1592년 왜장 <고바야가와 다카가게>가 이끄는 수만의 병력과 하동을 거쳐 올라온 왜병들과 연합으로 전주를 침공하려는 왜군을 맞아 권율(權慄)과 황진(黃進)장군이 1,500여 명의 의병으로 왜군 1만여 명을 격파하여 호남 진출을 저지했다고 한다. 당시 왜병의 시체가 수 십리에 즐비했다고 할 만큼 이치전투는 치열했고 적을 완전 섬멸한 승리의 장소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전란 3대 대첩지(한산, 행주, 이치대첩) 중 한 곳이다. 이치재(배티재)에서 바라보이는 대둔산은 한국의 100대 명산 중 6번째로 꼽힐 만큼 풍광이 빼어나 원효대사가 사흘 동안을 둘러봐도 돌아설 수 없었다는 명산인 대둔산(878m)은 금남정맥 줄기에 우뚝 솟은 절경으로 만경 평야를 굽어보는 곳이다. 
대둔산의 옛 이름은 한듬산, ‘한’은 큰 대(大)이며 ‘듬’은 시골더미, 즉 큰 바위란 뜻으로 산세가 계룡산과 비슷한 신 태극으로 수태극의 대 명당자리를 계룡산에 먼저 빼앗긴 것이 ‘한’이 되어 ‘한이 든 산’이라 불리면서 ‘한듬산’이 되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바라본 대둔산은 젊은 시절 이곳을 등반 왔을 때 산악회장께 들었던 이야기가 절로 떠오르게 한다. 지리산과 계룡산 산신인 두 여자가 서로의 중간인 대둔산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 나이도 비슷한지라 다음날 서로 내기를 해서 언니와 동생을 정하기로 했는데 그 내기가 하나, 둘, 셋을 시작으로 대둔산에 있는 돌들을 입 바람으로 날려 상대 쪽으로 많이 날려 보내는 쪽이 언니로 정했는데 다음날 두 산신이 만나 하나, 둘을 세는 도중 계룡산 산신이 미리 입 바람을 불어버려 충청도 쪽 돌들이 전라도 쪽에 모두 날아가 쌓였다고 전해지는 예기다. 그래서일까? 전라도 쪽 대둔산은 암봉이 많아 호남의 금강산이라 하고 충청도 쪽 대둔산은 완만한 능선의 산세가 형성된듯하다.

[3L]지금은 공사 가림 막으로 막혀있는 용문골 매표소 입구의 길가에 차를 세우고 약500m를 내려가 동학혁명추모탑을 둘러본다. 19세기말 조선 조정의 실정으로 민심이 혼란하고 국력이 쇠진 했을 때 일본군의 대륙침공이 시작되어 전봉준을 필두로 전라도 삼례에서 수십만의 동학 농민 혁명군이 기포하여 서울로 북진 중 공주전투에서 무기의 열세로 퇴각할 때 최공우를 중심으로 한 高山, 錦山, 蓮山 군현의 동학 농민군 천여 명이 이곳 大芚山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3개월간 항쟁으로 순국한 영령들을 추모하는 비이다.

시작부터 가슴이 탁 막히도록 가파른 길이다. 아직은 겨울 기운이 여기저기 남아있어 그 어디를 봐도 봄을 기대하고 트레킹에 나선 내가 성급했음을 느낀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대둔산을 찾았지만 봄꽃은커녕 나무 가지의 푸른 새순도 보이질 않는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른다. 3월 하순임에도 그늘진 곳에는 아직도 눈이 쌓여있고 그 눈을 비집고 빠꿈이 목을 내민 산죽의 파란 잎이 봄을 애타게 기다리다 못해 마중 나온 듯하다. 
계곡 길 따라 얼마 오르니 신라 국사 원효대사가 처음 이 바위를 보고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3일을 이 바위아래서 지냈다는 동심바위가 마른 나뭇가지 사이로 아침햇살의 광채를 받으며 아슬아슬하게 1000년을 버텨내고 있다.가파르게 오르는 계곡위엔 임금바위와 입석대 사이에 아슬아슬 금강구름다리가 연결 되어있다. 발아래의 허공을 느끼며 한발 한발 내딛는 묘미는 유튜브에서 가끔 보는 빌딩과 빌딩사이를 작대기로 균형을 유지하며 줄타기를 하는 강심장의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쾌감을 느낀다. 

[2L]고려 말 딸 셋을 거느린 재상이 국운이 기우는 나라를 한탄하며 이곳에 살았는데 세 딸이 선인으로 변하여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그 형태가 삼 선인이 능선 아래를 지켜보는 모습과 같아 삼선바위라 명명되었다 한다. 삼선바위를 등지고 내려다보는 나도 이 순간만큼은 삼선 못지않은 선인이 된 기분이다. 삼선대의 철 계단은 36m의 51도나 되는 수직 '사다리'로 폭이 불과 50cm정도에 난간을 두 손으로 움켜잡지 않고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 한발 한발 내 딛을 때마다 철판사이로 내려다보이는 허공의 아찔한 공포가 주변풍경을 조금도 돌아볼 수 없을 만큼 여유를 안준다. 128개의 삼선계단은 일방통행으로 올라가는 것만 가능한 것이 억만금을 준다 해도 내려올 만큼 강심장은 없을 듯싶다. 바람이 불어와 약간씩 흔들림이 감지 될 때마다 수직의 계단도 철렁, 조금은 강심장이라는 나도 언감생심, 내 가슴도 철렁이다. 겨우 올라와 눈앞에 펼쳐지는 비천봉의 위용과 장엄하게 펼쳐지고 그 정상에는 동이 트는 햇살에 눈부시게 빛나는 철탑과 뒤돌아서면 호남의 산야를 내려다보는 맛 또한 일품 중 일품이다. 정상에 다다를수록 돌 더미의 길이 험난하고 넓고 파란하늘에 대둔산 정상의 개척탑이라는 스테인리스의 철판이 멀리서도 정상임을 금방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아침햇살에 눈부시게 빛난다. '하늘을 어루만질 만큼 높다'는 마천대에 올랐다. 내려다보이는 곳엔 굽이굽이 숨을 몰아쉬며 올라온 금강구름다리와 삼선대의 철사다리 사이사이 암봉들이 힘차게 떠오르는 햇살의 역광에 흑백사진 같은 실루엣으로 멋진 풍광에 매료된다.
또한 호남의 산야에서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에서도 속 시원한 가슴의 정화를 느낀다.

이 보배롭고 성스러운 곳에 뭘 개척했다는 것인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이 철탑은 왜 세웠는지? 아이러니하고 역겹다! 명판에 새겨진 글이 참으로 궁색하다. 이 개척탑은 1970년 11월에 완주군민의 정성을 모아 군청 청원을 비롯하여 많은 군민이 자재를 직접 운반하여 해발 878m 위에 10m 높이의 콘크리트 탑으로 건립하여 등반객의 사랑(?)을 받아오다가 1989년 기존 콘크리트 탑 위에 스테인리스 판으로 정비하여 오늘에 이고 있음. 1989,10. 등반객의 사랑? 이 무슨 의미인가? 뭘 개척? 참 이해 못할 일이다. 자연 훼손의 극치 아닌가!? 주변 환경과 전혀 조화롭지 못한 설치물들… 어느 누군가 자신의 상징적 치적을 위해 고육지책으로 남겨놓은 산물이 아닐까? 

[4L]씁쓸함을 뒤로하고 낙조대로 향한다. 이곳은 서쪽으로 아직도 다져진 눈이 녹지 않아서 여기저기 빙판길이다. 산죽 잎이 나무사이로 햇살을 받으며 빛나는 모습들이 멋지게 눈에 들어온다. 이른 시간의 트레킹의 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대지의 기운과 소생하는 모든 것들의 생동하는 기운을 만나는 것. 서쪽은 암봉이 없이 황소의 등줄기 같은 산맥이 굽이굽이 햇살에 빛나고 있다, 낙조대의 정상! 이른 시간이라 등 뒤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으니 내겐 일출봉이 아닌가? 편안하고 찬란한 산맥을 바라보며 약간의 허기를 달랜다.

옛날 선도대사가 도를 닦고 있는데 용이 바위 문을 열고 승천하였다는 용문굴, 어디에나 용이 승천했다는 곳은 물이 있는데 주변에 물이라고는 그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서 의아하다. 용문골에서 바라본 칠성봉, 멋지다 웅장하다. 대단한 위용으로 압도한다, 마치 인수봉 일곱 개를 겹쳐 병풍을 두른 듯 아름답게 펼쳐진 암릉미는 그 어떤 화가도 그려내지 못할 것 같다. 마주한 용문골에서 용이 승천하기 직전 일곱 개의 별이 이곳에 떨어졌다하여 칠성봉이라 한다는데… 얼마 전 러시아에 자그만 운석낙하에도 폭발로 난리가 났는데 무려 일곱 개의 별이 떨어졌다하면 아마도 엄청난 웅덩이가 되었을법한데? 

오르는 길도 하산 길도 온통 돌 천지, 조금만 넙적한 돌들에는 수많은 아이젠과 스틱들이 할퀴고 간 자국들이 내 살갗의 상처들만큼 가슴이 쓰리다. 지루하리만치 길고 험난한 돌 더미를 내려와 흙길로 접어들 때 다리도 쉬어줄 겸 계곡의 넓은 바위에 누어 파란 하늘을 마음껏 보고 몽실몽실 떠있는 구름을 마음에 담곤 한다. 또한 바위틈을 요리조리 부드럽게 흐르는 물줄기의 실로폰 같이 맑고 청명한 소리를 들으며 일주일정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담는다. 푸른 하늘은 눈에 담고, 청아한 물소리는 귀에 담고, 하얀 몽실 구름은 마음에 담고 아무 생각도, 아무 짓도 하지 않는다. 그저 넓은 바위에 누워 파란하늘을 담는 것으로 복잡스런 심신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이고 기쁨의 전부이다.< 글, 사진 任容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