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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기 명예 교수의 가슴 속 묻어둔 ‘아직 다하지 못한 이야기’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영원한 의사

  • 입력 2013.12.05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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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로지 교실 안에서 의사의 길만을 걸으며 정년을 맞은 유석희 명예교수, 그 긴 기간 동안 만났던 환자를 그는 ‘잊지 못할 환자’와 ‘잊혀질 수 없는 환자’였다고 말한다. 그 소중한 기억을 모아 에세이를 폈지만 아직 그에게는 책 속에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너무나 많다.

다정다감 다재다능 동분서주가 트레이드마크인 우리 유 교수! 중도하차의 함정을 잘 비켜간 것도 대단하구요. 자유분방한 성격에도 고리타분한 내과학 교실에서 30여년을 잘 버티고 견디어 냈으니 그야말로 큰 소리로 축하합니다.
자신을 거쳐 간 수많은 환자들 중에서 도저히 잊을 수 없었던 분들의 이야기를 씁니다. 전문교수답게 제대로 쓴 의학 수필입니다. 의사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 모음입니다. 그의 비단결 같은 마음이 환자를 단순한 환자로 보지 않고 먼데서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시골 인심이 담긴 그런 글입니다.
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제 의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젊은이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그들은 사람 냄새가 나는 의사로서 거듭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축하합니다.
유 교수의 자랑스러운 정년을!
그리고 아름다운 책 ‘기억들의 환자들’의 출판을
- 권성원(강남 차병원 비뇨기과/수석회) 교수의 추천의 글 中에서-

처음부터 의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다.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기초과학을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의사이신 아버지의 말씀에 따라 의대를 택하고 66년 서울로 올라왔다.

그해 서울대학의과대학을 들어가고 6년을 공부했다.

그리고 1972년 미국 해외의사자격시험(ECFMG)에 합격하고 의사국가고시를 통과하고 의사면허를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41년 전 일이다.

하지만 유석희 명예교수가 의료의 길로 접어든 것은 아마도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그 전이었던 것 같다.

병원 집 아들이라 놀이 장소도 진료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고, 명절에는 집단 식중독이 발생해 온 밤을 지새우며 환자를 돌보던 아버지 옆에 있었다.

의대 시절 방학이면 부친이 시체 검안할 일이 생기면 조수로 따라나서기도 했으니 햇수로 따지기가 참 애매하다.

그렇게 의학을 연구하며, 환자만 바라보다보니 시간이 흘러 정년이라는 것을 맞았다.

물론 일선에서 의사생활하기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다.

오랜 경험이 가져다준 그의 의술을 보자면 오히려 병원에서는 정년을 취소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유 교수는 더 이상 환자를 보지 않겠다고 말한다.

환자가 좋아지면 나도 기분이 좋고, 환자가 나빠지면 나 역시 우울해지는 환자를 통한 감정의 이입이 두렵기 때문이란다.

그 대신 의사시절 만났던 수많은 환자들의 사연들을 적어 글로 적어 책으로 냈으니, ‘의사로 살아온 40여년, 기억 속의 환자’가 바로 그것이다.

연대순으로 적인 이 책에는 유 교수가 만난 환자들의 이야기를 수필로 적은 것은 물론 병명과 특징, 그리고 법률적인 해석까지 골고루 쓰여 있다.

추천인이 ‘의학을 공부하는 젊은이에게 꼭 권해야 할 책’이라고 강조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책 속에 적지 못한 ‘아직 다하지 못한 이야기’와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유 교수의 인생 2막에 귀를 기울이고자 한다.

의대를 거쳐 한명의 의사가 태어나기까지

“의대생이라고 하면 공부만 열심히 할 것 같은데 사실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여행 다니는 것을 좋아했어요. 의대에 들어간 곳이 산악반이었습니다. 북한산 인수봉에 가면 등반코스 가운데 의대길이 있습니다. 바로 저희 산악반이 개척한 길입니다.”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인 1971년, 북한산 인수 산장에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들어섰다.

여느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보였던 그들, 하지만 그들은 북한산 산행사에 역사를 남긴 ‘1971년 8월~9월 암벽개척등반보고서’를 통해 인수봉 의대길 개척의 주인공들이었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학생들이 개척한 이 루트는 본래 ‘인수봉 귀바위 슬립 코스’라 부르기로 합의한 바 있으나 그 후 여러 암벽등반 동호인들이 의대생들의 노고를 인정하며 ‘의대길’이라 부르기로 했고, 그 가운데 유석희 명예교수가 있었다.

꿈같았던 의대를 졸업을 하고, 72년 유 교수의 인턴 생활이 시작된다.

그 당시에는 전공과를 미리 정하고 인턴을 해야 했기 때문에 대부분 첫 번 근무처는 자신이 남을 과에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유 교수는 의사를 생명을 다루는 귀한 직업이라며 여기며 천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인턴생활이라는 것이 병실과 숙소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생활에 초짜 의사에게는 하루하루가 좌충우돌에 움직이는 사고뭉치였다.

밥 때는 놓치기가 일쑤여서 늘 배가 고파있고, 전공의들은 어찌 하나같이 눈치를 주는지…

“혹시 인턴의 삼신이라고 들어보셨습니까. 그게 일하는 데는 병신, 먹는 데는 걸신, 눈치 보는 데는 귀신이라는 뜻입니다. 하하”

그 외모만큼이나 호탕하게 웃어 보이는 유 교수, 하지만 오죽했으면 그런 소리까지 나왔을까 생각하니 한명의 의사로 태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짐작이 간다.

선택, 그리고 나만의 길을 개척하다!

기침처럼 감출 수 없는 것이 가난이라지만 꿈 많은 처녀가 18세의 나이로 들어올 때보다 훨씬 가벼워진 몸으로 ‘훨훨’ 날아 하늘나라로 갔다.
“여드름 없는 백지 같은 얼굴에 항상 졸리고, 항상 피곤하고, 항상 배고팠던 2교대 근무도 네가 가는 그곳에는 없을 거야. 새가 되어 뜨거운 네 눈물로 무거운 어둠을 뚫고 날아라. 하늘을 날아라.”
굶주린 사람에 대해 눈을 감고 상처받은 사람의 울부짖음에 귀를 닫는 이 세상. 완치된 환자보다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은 가난한 환자가 더 잊히지 않는다. 뜨거운 눈물과 함께…
-기억 속에 환자 中에서-

인턴을 마치고 전공의가 되었다.

인턴 시절 죽음 앞에 무기력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면, 전공의가 되면서 가난이 죄가 되어 죽어야하는 현실에 눈물을 참아야 했다.

또 지금이라면 충분히 죽지 않아도 될 질병이었지만 당시 손조차 써보지 못해 가슴을 치며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전공의를 마치고 드디어 유 교수는 1980년 5월 중앙대병원 신장내과로 가게 된다.

“전문의를 마치고 군대에 다녀왔을 때 대학 몇 군데에서 오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마침 중앙대병원에는 신장내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신장내과를 창설할 수 있게 해 주는 조건으로 중앙대병원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느껴본 사람들은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뛰는 일인지를 말입니다.”

처음이라는 것은 충분히 흥분되는 일이지만 그만큼의 대가가 따른다.

몇 개의 중요한 분과 이외에는 다른 분과 교수들이 없어 제일 막내였던 유 교수는 신장내과 환자는 물론 혈액종양과 감염 분과 환자들까지 맡아볼 수밖에 없었다.

강의도 신장학 전부는 물론 감염학까지 도맡아야 했다. 충분히 불평불만이 생길법도 한데 유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요즘은 각 분야가 너무 세분화되어 있고, 의사들도 많기 때문에 옆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없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그런 경험을 통해 많은 환자들을 섭렵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신장내과 이외에도 지금까지 다른 과목을 강의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편한 과를 선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 교수는 자신만의 길을 만들고 싶었다.

비록 거칠고 힘들었지만 후회 없이 묵묵히 걸었다.

유석희 교수가 정년을 맞는 날까지 언제나 신장내과에서 최고 의사로 인정을 받는 것은 바로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책에 쓰지 못한 ‘아직 다하지 못한 이야기’

“40여 년 동안 의사생활을 했으니 그동안 본 환자가 한두 명이겠습니까. 때로는 하지만 눈을 감으면 그동안 만났던 환자들이 눈앞에 필름처럼 흘러갑니다. 그래서 저에게 환자는 ‘잊지 못할 환자’와 ‘잊혀질 수 없는 환자’ 뿐입니다. 책에 소개하고 싶은 환자도 있지만 또 과연 써도 될까 하는 갈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혹시 책 속에 소개되지 않은 잊혀질 수 없는 환자에 대한 소개를 부탁하자 32년 전 한 발작성 야행성 혈색소뇨증 환자에 대해 말한다.

“이 병은 빈혈과 백혈구수의 감소로 떨어진 면역상태로 조금만 상처를 입어도 염증이 자주 걸리고, 다른 사람들 같으면 외래에서 투약치료로 끝날 후두염이나 피부의 간단한 염증으로도 입원이 필요합니다. 중요한 치료법은 수혈이지만 종교적인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약물요법으로 치료를 했습니다. 81년 11번이나 수시로 입원을 했으며,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치료를 위해 두 달에 한 번씩 저를 찾아왔습니다. 환자라기보다는 저의 친구였고, 제 휴대폰 번호를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환자 중에 한명입니다.”

30년을 같이 했으니 잊혀질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발작성 야간 혈색소뇨증은 언제든지 재생불량성 빈혈, 급성 백혈병 및 골수 섬유종으로 변할 수 있는 무서운 병으로 국내 임상보고에 따르면 30년을 치료해 살린 경우는 이 환자가 처음이라는 것이다.

의사라는 이유로 환자의 종교적인 신념을 무시하고 치료를 하려고 했다면 어떠했을까.

의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지만 어떤 누군가에게는 그보다도 더 소중한 것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존중해주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유석희 교수를 통해 알게 된다.

정년은 없다, 제2의 인생이 있을 뿐!

최근 유석희 교수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다.

예전부터 법 판결에 관심이 많아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입학을 한 것이다.

또 유 교수는 의협공제회 심사에 내과전문위원으로 30년을 봉사했고, 의료배상보험 심사위원장으로 10년을 넘게 있었으니 더더욱 법학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체계적인 법 공부를 위해 편입이 아닌 1학년부터 차근차근 다니기로 했다.

“제가 법학과를 간다고 하니 아내가 자기와 다짐을 하지 않으면 절대로 다닐 수 없다고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래 도대체 어떤 약속이냐고 했더니 그게 ‘사법고시 본다고 법석 떨지 않기’였습니다. 그래서 알았노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의사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40여 년은 “돈 벌고 싶으면 의사 하지 말고 사업을 해라”라는 선친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오로지 환자만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명예로운 시간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 환자를 살리겠다고 30분만 되어도 가망이 없다는 심폐소생술을 1시간동안 계속 하다가 결국 환자 보호자가 억지로 말려서야 내려와야 했던 오로지 생명을 살리는 일에만 몰두했던 영원한 의사 유석희 교수.

이제 그는 더 이상 병원에 없다.

유 교수는 아스클레피오스(의술의 신)의 지팡이를 내려놓고 유스타치아(정의의 여신)의 칼과 천칭으로 다시 한 번 수많은 목숨을 구하고자 한다.

이제는 생명만큼 소중한 진실의 권리를 찾기 위해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기자가 유석희 명예교수의 연구실이 있는 흑석동을 찾은 날은 국립현충원 옆 가로수 길이 낙엽으로 가득 덮여있는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리고 인터뷰를 마치고 유 교수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때 그 자리에는 정년을 마친 노 교수가 아닌 새로운 내일을 준비하는 1966년 과 변함없는 모습의 새내기 법학도가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