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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소재로 한 선시(禪詩) 몇 편

  • 입력 2014.01.03 17:47
  • 기자명 엠디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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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봄이다. 지난 해 가을을 보내며 또 한해가 속절없이 저물어 가는구나, 하고 느꼈던 게 어제 일 같은데. 어느 덧 다시 봄이 찾아온 것이다. 참으로 쉼 없이 흐르는 물처럼 지나가는 세월이다. 나이가 더해 갈수록 세월의 흐름은 더욱 더 급물살을 타는 것만 같다. 이럴 바엔 아예 시간을 모르고 사는 게, 속 편한 일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 몸과 마음을 이 세상에 맡기고, 인연 따라 닿는 대로 미련 없이 살다 가면 상선(上善)일 거란 생각도 드는 것이다. 물론 제멋대로 살아간다는 말은 아니다. 이 커다란 우주 앞에 서면 우리는 누구나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안다. 주어진 목숨을 소중히 여기되, 어느 때든 자신을 불태워 주위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는 노고야 아끼지 말아야 할 일인 것이다.

봄이 오는 길목. 주말 아침 늦게 일어나 커피 한잔을 마시다, 서가에서 오랫동안 잠자던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다. 옛적에 읽었던 감회와 사뭇 차이가 난다. 새롭게 다가온 느낌이 봄바람 보다 더 훈훈했다. 오래 전 동국역경원에서 간행된 <조선 선가의 시문朝鮮禪家의 詩文>(저자, 이종찬)이란 책이다. 조선 시대 큰 스님들이 남긴 시를 저자가 연대순으로 간단히 정리해보고 해설을 한 내용이다. 이 가운데 봄을 소재로 한 선시만을 나름 몇 편 뽑아 보았다. 그 시에 대해 새로운 해설을 붙여본 것이다. 내 한문 실력이 미천한 관계로 한자(漢子)로 돼있는 원문의 번역은 저자의 번역을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다만 문장을 부드럽게 표현하기 위해 번역에서 일부 수정은 불가피 했다.

먼저 함허당(涵虛堂)의 시다.
九龍山下一條路 구룡산 아래 길은 외로이 뻗어있고
無限春光煥目前 끝없는 봄기운 눈앞에 아른거리네.
紅白花開山影裏 붉고, 흰 꽃들이 산 그림자 속에 피어 있어
行行觀地復觀天 다니면서 땅 보고 다시 하늘 보네.

봄날 산 아래 난 황톳길 위에 한없이 부드러운 봄볕이 펼쳐진 풍광이다. 산엔 산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거기엔 붉고, 흰 꽃들이 앞 다퉈 피어나 있다. 어둑한 산 그림자 속에 환하게 만발한 꽃이니, 그 어스름한 침묵이 하나 쓸쓸해 보이지가 않는다. 풍기는 정서는 서늘한 기쁨이다. 함허당 선사는 봄볕의 눈부심 한가운데를 스스로 만끽하면서 걷고 있다. 천지간에 정처 없이 아무데로나 다녀도 한가로운 마음은 그윽하기만 하다. 적적한 가운데 아무런 걸림 없이 노니는 삶을 봄의 풍광을 비유하여 드러낸 시다. 마치 어린 아이가 봄날 새 세상을 만난 기쁨에, 티 없는 마음으로 하늘도 보고, 땅도 보며 걸어가는 정경이 연상되기도 한다. 간명한 표현 속에 산뜻한 느낌이 전해진다.

다음은 허응당(虛應堂)의 시다.
春風吹黜竹房寒 훈훈한 봄바람 선방 추위 몰아내
豁開禪窓賞物歡 선창을 활짝 열어 놓고 즐거이 바깥 구경하네.
氷泮喜聞深澗響 얼음이 녹아 계곡의 물은 기뻐 소리 내어 흐르고
雪鎖驚見遠山顔 눈에 쌓였던 산은 홀연히 모습 드러냈고
靑歸巷柳嚬眉染 푸른빛은 골목에 들어 메말랐던 버들가지(미인의 눈썹처럼) 물들이고
紅入園桃笑顔斑 붉은 빛은 뜰에 들어 점점이 복사꽃에서 웃고 있네.
賞極飜然閒擧首 감상에 겨워있다 문득 머리 들어보니
烟中蒼翠數峯巒 아지랑이 자욱한 두어 봉우리

밖은 따듯한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댄다. 그늘진 방안의 창문을 열어젖힌다. 그 훈훈한 온기가 방안으로 들어온다. 개울가의 기뻐하는 물소리가 선사의 가슴팍을 뚫고 흘러나간다. 눈을 들어 앞산을 바라보니 며칠 전까지 눈에 덮였던 산이 어느 새 녹아, 말끔한 모습으로 봄을 맞을 채비다. 도둑처럼 다가온 봄에 문득 놀라움을 느꼈나 보다. 푸르른 버들가지가 바람에 연약한 모습으로 흔들리는 것을 보는데, 마치 미인의 눈썹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분홍 빛 복사꽃은 여인의 볼에 돋은 홍조에 비유를 한 것이다. 선사의 시라기 보다는 여느 세속 시인의 소박한 시적 표현쯤으로도 보인다. 하나 여기서 잠시 머리를 돌려 먼 산을 보니, 옅은 빛의 안개 자욱한 두어 산봉우리가 태연히, 고고한 자태로 머물고 있는 것이 보인다. 초봄의 경치를 세속의 관점에서 문학적으로 표현했으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멀리서 관조하는 자세도 드러낸다. 이 두 가지 자세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곧 자연 속에도 그러하듯, 선사의 마음속에도 버들과 복사꽃과 고고한 산봉우리들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다. 마치 한 폭의 전통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초봄의 경치가 눈에 환하게 들어온다.

벽송당(碧松堂)의 시다.
花笑階前雨 섬돌에 내리는 비에 꽃은 웃고
松鳴檻外風 솔바람 난간가에 불어오네.
何須窮妙旨 오묘한 선지 왜 찾으려 하나
這箇是圓通 저것이 바로 원융한 회통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 꽃은 비에 젖으며, 또 섬돌에 무심히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반갑게 웃고 있다. 소나무 잎 사이로 부는 소슬한 바람 소리, 선선하고 은은하다. 이 바람은 난간에 서있는 벽송당 선사 앞을 스치며 지나간다. 그런데 저자는 오묘한 선지(禪旨), 즉 참선하는 마음의 바른 종지를 애써 다른 데서 찾을 일이 없다고 말한다. 바로 여기에 드러나는 모습 그대로가 우주 법계의 여여(如如)한 실상이라 이른다.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사물들 간의 온갖 인연들, 그대로가 법계의 천연덕스러운 모습이 아니겠는가. 오묘한 선지란 법계(온 세상)의 두두물물(頭頭物物)에 불성이 있을진대, 비록 허깨비와 같은 색(色, 몸)으로 드러낸 것들로 보일지라도, 이들은 걸림 없이 서로 오묘한 교류를 하고 있다고 본 것이리라. (이른바 불성이란 공성空性이기도 하고, 모든 생명에 내재한 참된 성품이라 봐도 될 것이다.) 저자 자신도 잠시 이 봄 풍경의 대상들과 하나가 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있었다. 그러고 보면 이제 만물과 아무런 다툼이 없는, 원융무애(圓融无涯)한 경지에 서 있는 것이다. 그의 마음은 어느 것과도 하나가 되어, 말없음 가운데 만사가 서로 회통이 될 수 있는 마음에 이른 것이었으리라. 단박하고, 소탈한 느낌도 주는 시다.

청허당(淸虛堂) 서산대사의 시다.
語柳鶯聲滑 버들과 대화하는 꾀꼬리 그 소리 매끄럽고
飄天燕舞斜 허공을 가르는 제비 춤, 사선으로 비꼈다
春風惟可惜 서글프구나. 봄바람
吹落滿園花 꽃잎은 떨어져 정원 가득하네.

이 시 제목은 상춘(傷春). 봄을 잃어가는 마음을 비유한 시다. 꽃잎들이 부는 바람 따라 정원에서 하염없이 흩날리고 있다. 곧이어 꽃잎들은 땅위에 맥없이 떨어지고야 만다. 얼핏 봄을 떠나보내는 화려한 슬픔의 마음을 그리고 있다. 한데 뒤이어 버드나무 속에 들어 앉아 버들과 대화하는 꾀꼬리의 모습이 정겹기만 하다. 공중에는 제비들이 사선을 그으며 날렵하게 춤을 춘다. 하여, 가는 봄이 있지만 이 봄이 그리 서글픈 것만은 아니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그는 다만 새로운 인연들이 다시 지어짐을 바라 볼 뿐인 것이다. 지나가는 봄이 우리의 청춘이라면, 이어 우리는 다시 ‘새로운 청춘’을 맞이한다는 소리로도 들린다. 제비는 허공을 마음껏 날고, 꾀꼬리는 버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매끄럽게 노래한다. 자유자재한 이 마음에, 무슨 말을 꺼내 여기에 보탤 수 있으며, 혹은 무슨 말을 뺄 수가 있으랴.

부휴당(浮休堂)의 시다.
千年檜影溪邊古 시냇가 예스러운 천년 회나무 그림자
半夜疎鐘月下新 어스름 저녁의 종소리, 달 아래 새롭다
十里朝烟連海氣 십리에 이는 아침 연기, 바다 기운을 잇고
數聲春鳥喚山人 봄 새 두어 곡조 사람을 부르네.
樓前水碧風生面 누대 앞 푸른 물은 바람일어 얼굴 스치고
欖外雲濃露滴巾 난간 밖 구름 짙어 두건을 적시었다.
終日憑欄多勝事 종일토록 노닌 정자, 좋은 일 많지만
胸中如鏡自無塵 거울 같은 가슴에는 절로 먼지 없어라.

산 그림자가 물에 어리는 큰 시내가 있다. 이곳에 자리한 누대에서 읊은 시다. 저녁 어스름, 누대 앞에 천년 묵은 회나무가 그림자를 땅위에 떨어뜨리고 깊은 묵상에 빠져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맑은 달빛을 머금은 종소리는 마음속마저 고요히 사무치게 울리어 다시 새롭게만 들려오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한가한 마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저 십리 밖에 봄 안개가 일기 시작한다. 그것은 먼 바다에서 이는 해무와 잇닿아 있어 그 경계가 희미하다. 한데 돌연 새 두어 마리가 노래를 부르며 하루를 깨운다. 누대에 올라서니 시냇가 고요한 물위에선 푸른빛이 감도는 물바람이 일렁이며 냇가를 소요하고 있다. 난간 밖 짙은 안개가 서서히 밀려와서인가. 스멀스멀 이슬방울들이 맺혀져 두건을 촉촉이 적시는 것이다. 선사는 종일 이곳에서 한가롭게 시간을 보냈나 보다. 한데 마지막 두 구절이 오묘한 선미(禪味)를 느끼게 해준다. 좋은 일이 많았다니, 좋은 일이 무엇인가? 필경 이것은 밖에서 드러난, 즉 보이는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만을 감상하며 이를 찬탄했던 일이 아닐 것이다. 밖의 온갖 모습들은 결국 이 몸과 마음(오온, 십이처, 십팔계)에서 일어나는 환(幻)과 같은 일이 아닌가. 그러나 이 환(幻) 같은 일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음이니, 굳이 말로 할 것 같으면 ‘좋은 일이 많다’라고 세속적 시인의 표현을 빌린 것이리라. 또 외형상 딱히 좋은 일이 없었는데도, 좋은 일이 많았다고 했으니 그 좋은 일은 ‘나’라고 하는 사람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에 내재하는 온갖 사물들에게 본래부터 자재(自在)하고 있었던 그 ‘즐거움’ 쯤으로 봄이 맞겠다. 사람 역시 이 가운데 함께 몸담고 있느니, 이를 깨닫게 되면 어느 때든 좋은 날일 것이다. 이런 마음일 것 같으면, 도시 이 마음이란 곳에 무슨 먼지 같은 것이 낄 일이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보응당(普應堂) 영허대사(暎虛大師)의 시다.

潚?又潚? 맑고 깨끗하고, 깨끗하고 맑으니
一塵念不生 먼지 하나, 일지 않는 한 생각
忘機唯合道 기미마저 잊음이 도에 맞으며
信步只閑行 걸음에 맡김이 한가로운 나들이
雨霽花更發 비 개자 꽃들이 일제히 피고
春深鳥自鳴 봄이 깊어지자 새들은 절로 울고
淸風明月夜 맑은 바람, 밝은 달 밤
歷歷復惺惺 또렷또렷 역역한 그 마음

영허대사께서 묘향산에 가 지은 시라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깊이 살펴보면 본래 한량없이 넓다. 이 우주를 덮고도 남을 만하다. 좁기로 말한다면(좁게 쓴다면) 겨자씨보다 작다. 이 마음을 쓰는 일에 우리는 흔히 에고(ego)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에고를 타파하는 순간을 일컬어 깨달았다는 말을 쓴다. 깨달음이란 어떤 특별한 의식의 각성이 아니다. 한량없는 마음을 자증(自證)하는 일일 터. 하여, 영허대사는 가없는 이 마음을 노래한 것이다. 본래 우리의 마음은 청정한 것.(사실 깨끗하다느니, 더럽다느니 하는 말조차 붙일 수가 없는 자리이다.) 어떤 기미마저 잊는다는 말은, 카르마적 소여(업.業)에서 자연 발화(發火)가 되는 상념들을 ‘무심코’ 잃어버리거나 잊는다는 말이다. 흔히 관법(觀法) 또는 알아 챙김(mindfulness)에 의해 그때그때마다의 어떤 기미(잠재적 갈등 같은 것을 드러내는 그림자라고나 할까)를 털어내는 일이 도(道)에 이르는 맞는 길이라고, 이른 것이리라. 이런 표현은 시적 표현이라 보기에는 다소 생경하고, 문학적 감성이 좀 부족한 표현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러나 그 다음 대사는 무심히 걸음을 걸음에 맡기며, 정처 없이 걷는다. 봄날의 정경을 바라보며, 이 모든 정경이 다 이 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임을 환기시킨다. 그 마음자리가 늘 또렷하고, 맑고, 고요하고, 성성하기만 하다. 온갖 사물들은 그로 인해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해서, 다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 것으로, 모든 사물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제 자리로 회귀를 하게 된다.
묘향산에서 꽃이 피고, 새가 우는 시절, 그 인연시절에 따라 한가로운 나들이를 하던 영허대사였다. 그는 오래 전에 열반하였지만, 우리는 다시 봄을 맞이하고 있다. 산과 들엔 꽃이 피고, 봄이 깊어지면서 여기저기에서 새가 절로 울고 있다.
역역하고 또렷한 그 마음은 아직도 여전한 것인가? 고금(古今)을 통하여 여여(如如)한 그 마음은 여전할 진대…

만고에 푸르른 봄날의 달밤이여. 신묘하게도 살아 숨 쉬는 것들이여. 우리도 함께 이 생명의 흐름을 따라 돌아가고, 돌아갈 뿐인 것이다. 다시 봄이 와, 꽃은 피고 새들은 노래하고. 가까이서, 먼 곳에서도 따듯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아, 그대처럼 이 맑은 바람은 온다는 소식도 없이 왔다가, 간다는 소식도 없이 가고야 마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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