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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꿈 이야기

  • 입력 2013.03.07 14:20
  • 기자명 신승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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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꿈
탁자 위엔 투명에 가까운 하늘빛이 은은하게 감도는 백자 항아리가 있었다. 배가 고픈 파리 한 마리는 그것이 사람들이 남겨둔 밥그릇인가 싶어 얼른 그 백자에 날아와 앉았다. 그러나 백자위에 앉자마자 파리는 금세 실망했다.
“보이는 것과 달리 직접 입 촉수를 대어 보니 아무 먹을 게 없구먼.”
파리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먹다 남겨놓은 게 있을 법 한데 이렇게 아무런 맛도, 향기도 없는 것이 있나. 그저 빈 그릇일 뿐이네. 참 이상하네. 알기 어려운 일이야.”
햇빛에 반질반질, 깨끗하게 빛나는 백자에 대한 호기심에 파리는 잠시 백자 위에 머무르며 이 물건을 요모조모로 탐색이라도 할 양 이곳저곳을 핥아 보기도 했다. 파리는 따뜻한 햇볕에 두발을 비비기도 하며 피로를 풀고도 싶었다. 그러다 어느 새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파리는 곧 꿈을 꾸게 되었다. 황당한 꿈이었다. 힘차게 파도치는 먼 바다가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바다 저 건너에서 이쪽으로, 그러니까 자신이 있는 쪽으로 한 마리 코끼리가 바다를 딛고 겅중거리며 다가오는 것 아닌가. 커다란 코끼리는 긴 코를 하늘 높이 쳐들고는 마치 푸른 풀밭을 거침없이 지나가듯,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자기에게로 달려오는 것이다. 이 광경을 보며 파리는 저것이 바다에 빠지는 일도 없이, 바다 위를 저렇게 나다닐 수가 있나, 하는 의심이 찰나에 지나갔다.
하지만 괴이하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파리는 전혀 두렵지가 않았다. 파리는 외려 코끼리가 내게로 오는 사연이 무엇 때문인지 궁금하기만 했다. 파리는 그저 태연한 자세로, 신기해하는 마음으로 이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막 내 앞으로 다가온 코끼리였다. 헌데 막상 코앞으로 다가온 코끼리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긴 코로 휘휘 공중을 몇 번인가 휘젓다가는 그를 지나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싱겁기 짝이 없었다. 코끼리가 사라지자 힘차게 파도치던 바다도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사방은 그지없이 고요해졌다.
아마 백자 항아리의 차가운 기운을 몸 속 깊이 느꼈을 무렵이었을 것이고 파리는 그때서야 꿈에서 겨우 깨어났던 것이다. 파리는 제 꿈이 수상하다는 듯 고개를 몇 번인가 가로저었다. 파리는 곧 제 현실을 알아차리고는 그 눈부신 백자 항아리를 떠나, 멀찌감치 떨어져 백자를 한번 휘돌아 보고는 음식 냄새가 풍기는 창밖으로 붕하는 소리를 내며 이내 날아가 버렸다.

# 해저 여행의 꿈
지난 밤 꿈에 잠수정을 타고 해저 2만 리쯤까지 여행을 떠났다. 사방은 깜깜한 어둠 속. 한데 잠수정에 있는 나는 별로 갑갑하다는 느낌이 없다. 호기심 반, 어떤 새로운 발견에 대한 기대감 반, 그런 기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잠수정 밖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좀 불안했다. 허둥대며 불빛으로 주변을 살펴봤더니 글쎄, 남산만한 커다란 괴물이 잠수정 유리창을 통해 눈앞에서 스멀거리는 것 아닌가. 이어 그 괴물은 내가 타고 있던 이 잠수정을 통째로 짓뭉개버리려는 몸짓이었다.
괴물 모습이 눈에 선연하다. 해삼처럼 거무튀튀하고 미끈거리는 살갗이었고 몸 전체가 노적가리를 쌓아올린 듯 뭉툭하여 참으로 징그럽고 괴이해 보였다. 양 미간 사이가 갯벌처럼 밋밋했고 코는 아주 납작해서 잘 안보이고 눈은 넙치의 눈알처럼 약간 튀어나오긴 했으나 가늘게 째진 두 눈은 퀭하니 반짝거렸다.

꿈에서 무척 놀랬다. 하지만 선잠에서 그 꿈은 희미하게 이어지면서, 그러니까 반쯤은 깬 정신 상태에서 그 장면이 생생하게 다시 떠오르면서 이런저런 연상이 이어지는 것이었다. 이 꿈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받아들여야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그리고 동시에 문득 내 전생이 너무도 한심하고 어리석었기에 그간 쌓아둔 업보가 괴물을 만들어냈던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 업보란 것의 귀결은 두려움인 셈이고 두려움은 힘을 얻기 위해 괴물의 탈을 쓰고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그리고 난 그 몹쓸 괴물을 위협적인 적(敵)으로서만 취급했던 것이다. 비록 꿈속일지언정 만일 그때 거기서 그 괴물과 맞서다 깔아뭉개어져 죽음에 이르렀으면 아마 난 심장마비로 즉사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 위험에 반사적으로 살짝 깨어나 그 참사를 겨우 모면했던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반쯤은 꿈속에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는 상황인데... 아마 이 생명체를 둘러싼 거짓 희망들, 헛된 망상들(통칭, 에고ego라 불러도 무방할 듯)은 우리가 깨어있는 낮 동안에도 호시탐탐, 이 삶을 지배하려 한다. 마치 그것은 꿈에서 괴물로 전변이 되어, 욕망하는 바, 닥치는 대로 이 삶을 집어삼키려 함이 분명했다. 다시 말해 그 헛된 망상들(괴물)이 내 삶을 지배하려는 것 아니냐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가기도 했다. 이런 ‘괴물’을 두고, 누구는 ‘현실’이라 부르기도 하고, 영적 각성을 위해 수행하는 사람은 일컬어 마귀라 지칭할 수도 있겠다.

두 개의 꿈은 최근에 내가 꾼 꿈 내용들이다. 모든 꿈들이 다 ‘엉터리’ 내용이긴 하나 내가 꾼 이번 사례는 누가 보더라도 아주 황당하고 괴이해 보일 것이다. 특히 파리의 꿈은 내가 꾼 꿈속에서 내가 파리 신세가 되어 꾼 것으로 봐야 되니 아주 특이한 꿈이랄 수 있다. 해저 여행의 꿈은 마치 가위에 눌리는 꿈과 비슷해서 그리 새롭게 놀랄 만한 내용은 아닐 것이다. 하나 이 꿈은 나름 꿈속에서도 내가 해석이랄까, 해몽까지 곁들이고 있는 꿈이어서 나로선 무척 흥미롭다(정신건강 전문의사이기에 꿈에서도 이렇게 티를 내는가, 모르겠다).

알다시피 꿈은 흔히 당사자의 무의식 내지 잠재의식의 표현으로 본다. 프로이트는 꿈이 현실에서 충족되지 못한 욕구나 욕망의 충족, 다시 말해 ‘소원 충족’을 시키는 순기능이 있다고 했다. 억압된 갈등은 꿈을 통해 드러낼 수 있다고도 했다. 몸이 아프면 몸 스스로 어떤 균형을 찾으려 애를 쓰듯 꿈 역시 꿈을 통해 마음의 갈등을 치유하려는 의지가 작동된다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동의되는 내용이다. 꿈 역시 이 마음이란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니, 그것이 개꿈이 됐건, 용꿈이 됐건 모두 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마음이란 의식, 전의식, 무의식을 다 포괄한다. 물론 초월의식도 포함될 것이다. 내 꿈을 두고 프로이트식의 정신분석을 해도 나름 의미 추출이 가능하리라 본다. (물론 내 스스로 판독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겠지만) 구태여 어지럽게 여기서 이를 세세히 논하겠다는 뜻은 없다.

이 꿈을 여기서 소개한 것은 이 꿈이 한참의 시간이 지났어도 쉽사리 잊히지 않는 까닭도 있으려니와 선뜻 보아 문학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꿈이 아닌가, 하는 자평(自評)에서였다. 꿈도 꿈 나름이겠지만 이것은 하나의 산문시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예컨대 파리의 꿈은 꿈속에서 내가 파리가 된 존재임을 능히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평소 백자 항아리의 은은한 그 빛깔과 모남이 없으며 담백하고, 소박한 그 모습을 좋아했다. 이 꿈에 대한 나름 표면상의 해석은 백자를 보되, 파리로 변신한 낯선 존재가 느껴 보는 흥취는 어떨까 하는 상상의 모습이 꿈 이야기로 재현된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다(꿈이 아니더라도 현실에서 우리는 간혹 자신이 낯선 존재로 세상을 다시 바라보는 상상에 젖게 되는 경험을 겪기도 한다). 꿈에서는 시·공간의 차원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자유자재로 들락날락 한다. 아울러 꿈은 상징, 치환, 환유, 말장난 같은 것을 동원시켜 그럴 듯한 드라마를 엮어 낸다. 그러니 파도치는 바다가 갑자기 나타나고, 먼 바다에서 겅중거리며 달려오던 큰 코끼리가 순식간에 내 코앞으로 다가오는 광경이 가능해진다. 꿈속에 나타난 코끼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궁금한데, 나도 정말이지 알 길이 없다. 꿈에서의 느낌으로 감을 잡자면, 뭔가 좋은 소식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님’ 쯤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서 앞으로 뭔가 좋은 일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진 적은 없었다. 백자 항아리의 그윽하고, 한가하고, 고적한 그 아름다움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에 현실적으로 여러모로 볼 때 나라고 하는 이 몸뚱이는 한갓 하찮은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깔려있었던 것 같다. 꿈이지만 거기서 내가 파리로 변신된 모양이 그러하고, 음식 냄새에 이끌려 창밖으로 이내 날아가 버렸으니, 그 행태가 바로 내 존재의 위치성이랄까, 그런 특성이 얼마간 반영된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이전에, 상서로운 메시지를 전해주려던 코끼리는 이런 사실을 능히 미리 알아챘으리라 본다(이 꾀죄죄해 보이는 파리와 무슨 대화가 가능이라도 하겠는가). 상황이 그러하긴 해도 당시 파리로서는 꽤나 괜찮은 기분이었던 것 같았다. - 한편 이 파리는 우리의 에고 ego라는 것이 코끼리 같은 ‘청정한 마음’의 입장에서 보자면 붙잡을 만하거나 집착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점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두 번째 꿈은 꿈속에서의 해설로 얼마간 이해가 됐으리라 생각된다. 꿈속에서 나타난 괴물이란 알다시피 무의식 속에 잠재된 억압된 공격성, 분노 또 이와 관련된 죄의식 같은 부정적 감정의 덩어리가 투사되어, 형상으로 드러나게 된 상황이라 볼 수 있겠다. 그리고 달리 보자면 그것은 내 카르마의 출현인 셈이고, 내 속에 살아있는 마구니라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평소 의식에서는 못 느끼겠지만 마음 저 깊은 곳(해저 2만 리나 되는 곳)에서는 나 역시 아직도 전생의 업으로 인한 그 빚을 다 갚지 못해 이렇게 고군분투하고 있구나 하는 성찰을 해주게 된 꿈이었다. 깨어있는 의식 세계에서 우리는 흔히 갖가지 방어기제를 써가며 스스로를 속이는 일에 아주 능숙하다. 예컨대 스스로 아주 솔직하다고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솔직하다는 것을 내세워 자기를 합리화시키거나 주지화(intellectualization)시키는데 바쁘다는 것을 우리는 일상에서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가 있다.
사람이 확철대오(廓澈大悟) 하지 못하는 바에야 이런 장애는 사람이라면 피할 수 없이 갖고 다녀야 할 번뇌일 것이다. 이런 상황에 대해 “지금 여기서 우리가 도망 갈 곳이 있겠습니까. 깨어나 있어도 그 어디로도 우리는 도망갈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 본다.

그러면 각자는 이 같은 번뇌의 덩어리에서 벗어날 방도가 없다고 봐야 되는가. 다시 말해 내 두 번째 꿈에서 예시 되었듯이, 우리 각자는 스스로 쌓아둔 카르마에서 벗어날 방도가 정녕 없다는 말인가. 다른 식으로 말해, 우리는 윤회의 삶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에 대해 자문해 보게도 된다.
이는 분명 무슨 수학 문제를 풀듯 풀어질 성질의 문제는 아닐 것이고, 열심히 청소를 하듯 노력한다하여 쉽게 정화될 성질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훌륭한 교양서적이나 경전을 제 아무리 읽고 통달한다 해도 거기서 얻는 소득에는 분명 한계가 있을 것이다.
내 꿈속의 그 마구니, 내 깨어있는 의식의 저변에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있는 그 마구니는 아마 애욕에 물든 이 삶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일인 것이다. 이 괴물은 직접 대면하여 대적할수록 힘이 더욱 강해져 결코 이런 식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가 없는 노릇이다. 힘으로 억제나 억압을 써서는 그 괴물과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갈등 해소를 위한 인간의 여러 예술 활동이란 것도 기실 파편적인 노력에 불과할 뿐 궁극의 해결책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일상에서 겪는 어느 번뇌이든 그것은 전부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통찰. 그리하여 떠오르는 대로 부정적인 생각이 들거들랑 그때마다 두루두루 자신을 용서해주려는 자세(사실 이게 대상과의 싸움보다 몇 배나 더 힘든 일이다). 아울러 드문드문 스스로를 자비롭게 보살피는 일(이런 일은 누구나 본래의 심성은 다 착하므로 차분하게 자신을 들여다 볼 것 같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일들이 습관이 되도록 해서 마음에 익숙해질 것 같으면 그 괴물의 마력이 점차 힘을 잃게 될 것인데, 그리되면 온갖 번뇌의 검정 색깔이 점차 엷어질 거란 뜻이다. 이것은 고려 보조지눌(普照知訥) 선사께서 쓰신<권수정혜결사문 勸修定慧結社文>에도 대략 나와 있는 언구이기도 하다.

(어이쿠, 잠깐 사이에 내 꿈을 갖고, 제 멋대로 해몽도 하고 직접 나에게 충고를 하는 꼴이 되고 말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