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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 문국진 박사를 만나다!

  • 입력 2019.01.11 11:41
  • 기자명 신영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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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지금 우리는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모든 인간의 권리가 존중받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것이 곧 성숙한 민주주의 나라다. 그리고 이런 시대가 오기까지에는 수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기에 가능했다. 바로 대한민국 제1호 법의관인 문국진 박사와 같은 이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 의학의 살아있는 역사이자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인 국내 최초 법의학자인 문국진 의학박사가 의학자로는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서재필의학상의 제15회 수상자로 선정됐다. 서재필의학상 운영위원회는 “서재필 선생이 서양의학 한국 제1호라면 문국진 박사는 한국법의학 의사 제1호라 할 수 있으며, 서재필 선생이 독립신문을 발간해 의사로서 사회의 문화 창달에 기여했다면 문국진 박사는 의학계에 없었던 예술과 법의학을 연계한 ‘법의탐적학’을 개설하는 등 이때까지 없었던 우리사회에 꼭 필요한 것을 창안하는 등 서재필 선생의 사고와 사상을 본받은 유사한 공통성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며 수상 배경을 설명했다.

1950년대, 법의학의 불모지였던 이 땅에 산 자의 존엄도 짓밟히던 시절에 죽은 자의 권리를 찾겠다는 법의관이 된 문 박사. 그의 노력이 있었기에 법의학은 민주주의보다 더 빨리 뿌리를 내렸고, 그 결과 이제는 모두의 권리가 존중받을 수 있는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권리의 의학, 법의학을 만나다!

문국진 박사와 법의학의 만남은 비를 타고 운명처럼 나타났다. 1950년, 문 박사가 의과대학생 3학년이던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를 피하고자 마침 눈에 띄는 헌책방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서점인데 가만히 있기도 머쓱했던 문 박사가 헌책방 안을 둘러보다 한 권의 책이 눈에 들어왔다.

‘법의학 이야기’,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던 제목인지라 호기심에 이끌려 책장을 넘겼다.

<사람에게 중요한 두 가지는 생명과 권리인데, 임상의학이 생명 존중의 의학이라면 법의학은 권리를 존중하는 의학이다. 법의학은 생명보다 권리를 중요시 여기며, 사회와 문화가 발달한 민주주의 국가에서 필한 학문이다.>

첫 장에 쓰인 글귀는 문 박사는 심장을 요동치게 했고, 그 즉시 책을 구입해 집으로 달려갔다. 그 흥분된 마음 때문이었을까, 집에 가는 동안 비가 내렸는지는 아니면 그쳤는지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술회한다.

“동경제국대학 법의학과 후루하타 다네모토古畑種基 교수님께서 쓰신 책이었습니다. 법의학이란 문화가 발달되어서 사람의 권리를 옹호하는 곳에서만 필요하다고 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없는 것을 보니 ‘아직 이 나라는 사람의 권리를 소중히 여겨지지 않는구나’라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반드시 사람의 권리가 존중받을 시기가 올 것이고, 그렇다면 내가 법의학을 시작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제1호 법의학관의 탄생, 새로운 역사의 시작

법의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문국진 박사, 하지만 그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처음부터 헌책이었던 ‘법의학 이야기’를 몇 번이고 읽고, 또 기워서 읽었다. 하지만 책을 읽을수록 궁금하고 모르는 것은 늘어났다. 어디 물을 곳도 없고, 당시에는 일본과 단교 상태여서 저자인 후루하타 교수에게 연락할 길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또 한 번의 기적 같은 사건이 생긴다. 하루는 홍콩에 살고 있던 친구의 형이 한국을 방문했고, 문 박사와 함께 점심을 같이 하게 되었다.

“그 형의 말로는 홍콩은 일본과 교류가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 사정을 말씀드리고 혹시 편지를 대신 부쳐줄 수 없겠냐고 부탁을 하자 흔쾌히 그래 주시겠노라고 하신 것이죠. 제가 홍콩으로 편지를 부치면, 홍콩에서 다시 일본으로 편지를 보내는 것이죠.”

문 박사는 그렇게 홍콩을 통해 처음으로 후루하타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결국 2개월 후에야 후루하타 교수에게 답장이 왔다.

<한국에도 법의학을 공부하는 의학도가 있다니 매우 기쁘다. 당신은 나의 한국 첫 번째 제자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말하라.>

뛸 듯이 기뻤고,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그렇게 법의학이 이어준 사제는 서신으로 왕래를 하며 학문적 유대를 다져갔다.

하지만 문 박사는 또 한 번의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1955년 졸업을 했지만 법의학으로는 갈 곳이 없었고, 그나마 비슷한 과목인 병리과를 지원하기 위해 당시 의대 학장이었던 이제구 교수를 찾는다.

법의학을 하고자 하는데 한국에는 법의학과가 없어 병리과를 가고자 한다고 하니, 이 말이 통할 리가 없었다.

막막한 마음에 평소 문 박사를 아껴주던 장기려 박사를 찾아갔다. 한국의 슈바이처로 통하는 그 유명한 聖山 장기려 박사였다. “스승님께서는 평소에도 ‘너는 체구가 좋아 사흘 낮 사흘 밤을 수술해도 지치지 않을 것 같으니 외과를 하는 것이 좋겠구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법의학을 하겠다고 하니 ‘이 놈아, 법의학은 학문도 아니야. 그러니 내 말대로 외과를 해!’라고 호통을 치셨습니다.”

결국 어디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자 문 박사는 상심에 빠진다. 그 뒤로 사흘이 지났을까, 다시 의대 학장으로부터 호출이 왔다. ‘아, 나를 병리과로 불러주시는구나’라고 생각을 하고 학장실로 간 문 박사는 뜻밖의 제안을 받는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의 창설을 위해 법의관이 필요하니 서울대학교에서 우수한 재원을 추천해 달라는 내무부장관의 공문이 왔다. 네 의향은 어떠하냐?”

그렇게 문 박사는 이제구 학장의 추천으로 국과수 제1호 법의관이 되었다.

내가 가야할 길은 법의학이다!

1955년 국과수가 창설이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지금의 그것과는 사실상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물론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실상은 너무나 달랐고,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해야 했다.

문국진 박사에게 닥친 첫 번째 어려움은 ‘고문수사’였다.

일단 의심이 가는 용의자가 있으면 잡아놓고 때리고 물 먹이면 쉽게 해결이 되는데 무슨 과학수사냐는 것이었다. 사실 ‘과학수사’라는 인식도 없어 고문수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되던 때였다. 하지만 문 박사는 수사관들과 계속 친분을 쌓으면서 과학수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대부분이 심증주의 재판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일단 법관이 심증만 가면 끝이었다. 증인이 있어도 법관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묵살되곤 했다.

문 박사는 이러한 재판과정의 부조리와 싸우며 심증주의 재판에서 과학적 증거주의 재판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그 결과 인권이 존중되는 풍토 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세 번째는 부검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전통적인 유교사상은 물론 뿌리 깊이 박힌 무속의 맹신은 도대체가 넘기 어려운 벽이었다.

한 번은 산에서 목을 맨 채로 죽은 고등학생의 몸에서 멍자국을 발견하고는 타살을 의심해 부검을 한 적이 있었다. 시신을 산 아래로 데리고 갈 수 없어 그 자리에서 부검을 하려고 하자 머리 옆으로 도끼가 날아왔다. 죽은 학생의 할아버지가 손자에 몸에 칼을 대면 가만두지 않겠다며 도끼를 던진 것인데, 다행히 옆에 있던 경찰관 덕분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 경찰관이 0.1초만 늦었어도 문 박사가 그 도끼에 맞았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그 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그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부지기수로 셀 수가 없었다. 세상의 편견과 싸우는 것도 힘든데, 목숨의 위협까지 받으며 이 일을 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문 박사는 다시 장기려 박사를 찾았다.

“선생님께서 청십자병원장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다시 저를 받아달라는 부탁을 드렸죠. 그런데 그분께서는 저에게 ‘벌써 5년 동안 한 우물을 팠으니, 앞으로도 그 우물을 계속 파거라. 네가 개척한 길이니 너에게는 그 길을 완성해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에 다시 한 번 용기를 냈습니다.”

그 때 장기려 박사가 문 박사를 다시 받아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문 박사가 존경받는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처럼 훌륭한 스승이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4·19 혁명이 터졌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뛰어나와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를 향했고, 그 사이에 흰 가운을 입은 학생들이 눈에 띄었다.

서울의대생들이었고, 문 박사는 ‘의대생들도 결국 뛰쳐나왔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총소리가 들렸다. 기관총이었다. 선홍빛 피가 낭자했고 총소리도 계속되었지만 시민들은 멈추지 않았다.

목숨을 던져 불의와 맞서는 이들을 보고 문 박사는 ‘그래, 내가 가야 할 길은 법의학이다. 나는 권리를 지키는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결심하고 다시 법의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 교실을 열다!

1965년 일본과의 국교가 수립되면서 드디어 문국진 박사는 후루하타 교수를 만나게 된다.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서로 부둥켜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당시를 회상하는 문 박사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고, 그의 눈은 허공을 향했다.

“후루하타 선생님께서 한국의 국과수는 어떻게 운영되냐고 물으셔서, 직원 열 명에 자동차 한 대가 전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열악한 상황에 적잖이 놀라셨지만 저에게 두 가지 과제를 주셨습니다.”

후루하타 교수가 문 박사에게 준 과제는 ‘식물응집소’와 ‘플랑크톤 연구’였다. 문 박사는 연구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식물을 수집했고, 수많은 난관에도 부딪쳤지만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문 박사는 1974년 Rh 혈액형 발견자인 A.S. Wiener 박사와 공동으로 한국산 식물 누리장(Clerodendron trichotomum)을 재료로 새로운 혈액형 ‘Cl type’을 발견했고, 국제학회에 보고하면서 세계적 법의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또 플랑크톤 연구를 통해 익사자의 입수 장소를 정확히 가려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문 박사는 국과수 법의관으로 재직하면서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하지만 법의관이 된지 15년 만에 국과수를 나오게 된다.

“처음 법의관으로 갔을 때 처음 월급이 삼천 원이었습니다. 동기들은 만 오천 원 정도를 받을 때였죠. 법의관은 그냥 공무원일 뿐 의사의 대우는 아니었습니다. 업무는 많고, 급여는 적고, 인식을 개선되지 않으니 누가 법의관을 하려고 하겠습니까.”

문 박사는 대학차원에서 후진을 양성해야 한다는 생각에 서울대학교를 찾았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인가가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고려대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고려대학교 김상엽 총장을 만난 문 박사는 법의학교실에 대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김 총장은 “동경대학에 있을 때 후루하타 교수님의 법의학 수업을 들은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학문이라고 생각하며, 그렇지 않아도 적임자를 찾고 있었다. 고려대는 민족대학인데, 민족대학에서 법의학을 해야지 어디서 하겠나”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문 박사가 자신이 후루하타 교수의 제자라고 말하자 김 총장은 반가워하며, 당장 법의학교실을 개설하자며 반가워했다. 그렇게 1976년 9월 대한민국 최초의 법의학 교실이 탄생했고, 지금은 전국 41개 의과대학 중에서 13곳에서 법의학 교실이 운영되고 있다.

미술작품으로 예술가의 사인을 밝히다

문국진 박사의 삶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 법의학의 역사였다. 하지만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흐르는 법, 문 박사는 1990년 정년을 맞게 된다. 하지만 ‘정년’도 그의 법의학에 대한 열정은 막을 수는 없었다. 문 박사는 새로운 방향의 법의학을 시도했다. 법의학적 판단의 목적은 침해된 인권을 바로잡는 일로 고인의 경우에는 시신의 부검이 필요하다. 하지만 시신마저 없을 때는 어떻게 할까.

문 박사는 이런 경우 고인이 남긴 각종 문건이나 저서, 예술인의 경우 그 작품을 통해 법의학적으로 분석해 답을 찾기 시작했다. 바로 그것이 문 박사가 고안한 ‘문건부검(Book Autopsy)’이고, 이를 ‘법의탐적학(法醫探跡學, Medicolgal Pursuitgraphy)’이라 명명했다.

이를 통해 문 박사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인을 바로 잡고, 미술작품을 통해 작품 속에 가려져 있는 법의학적인 사항에 대한 평석을 하는 법의학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했다.

이를 바탕으로 문 박사는 예술가들의 사인을 주제로 한 16권의 책을 출간했으며, 2018년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제24회 국제법의학회 학술대회에 초청되어 ‘Forensic Medicine for the Artwork Autopsy’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하기도 했다.

1925년 평안남도 평양 태생으로 이제 95세를 맞은 문 박사, 하지만 그의 법의학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1953년 어느 비오는 날 헌책방에 뛰어들던 그 젊은 의학도의 모습과 전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 시대의 진정한 스승인 그는 우리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것, 당신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을 하라”라고 말한다.

오늘도 문국진 박사는 자신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그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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