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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아픈 실화 바탕의 동요 느낌 주는 가요 ‘아빠와 크레파스’

배따라기 이혜민 작사·작곡, 양현경 1985년 첫 독집음반 취입해 크게 히트

  • 입력 2019.05.22 11:07
  • 기자명 왕성상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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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밤엔 우리 아빠가 /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 사가지고 오셨어요 (음음)

그릴 것은 너무 많은데 / 하얀 종이가 너무 작아서

아빠 얼굴 그리고 나니 / 잠이 들고 말았어요 (음음)

밤새 꿈나라에 / 아기 코끼리가 춤을 추었고

크레파스 병정들은 / 나뭇잎을 타고 놀았죠 (음음)

어제 밤엔 달빛도 / 아빠의 웃음처럼

나의 창에 기대어 / 포근히 날 재워줬어요 (음음)

[엠디저널]‘아빠와 크레파스’는 대중가요임에도 동요느낌을 준다. 가사가 서정적이라 어린이 노래로 잘못 아는 이들이 많다. 노랫말이나 곡의 분위기도 그렇고, 유치원생이나 초등학교 저학년들에게 율동까지 넣어 노래를 가르치기도 해서다. ‘어린이날’이 들어있는 5월이면 이 노래가 그래서 많이 불리고 들을 수 있다.

1985년 싱어송라이터(Singer-songwriter) 이혜민 작사·작곡, 양현경 노래인 이 곡의 분위기는 그리 밝지 않다. 4분의 4박자로 멜로디가 흥겹지만 노랫말을 찬찬히 새겨보면 슬픔이 배어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는 양현경(61, 본명 양현숙)이 어려웠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담은 그의 첫 독집음반 수록가요다. 그는 한 방송프로그램에서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빠한테 크레파스를 사달라고 했으나 6학년이 되고 나서야 사주셨다”고 말했다. 양현경이 “자신이 20대 초반일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 생각이 나 어느 날 이혜민 씨에게 얘기했더니 만들어준 곡”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런 이야기를 담은 노래가 ‘아빠와 크레파스’로 경쾌한 리듬과 달리 슬픈 곡”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양현경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크레파스를 사왔다는 추억담이 소재가 돼 태어난 가요임에도 동요처럼 불린다고 했다.

유흥업소에서 이 노래 나오면 아빠들 일찍 귀가

이 노래가 발표되고 난 뒤 유흥업소에서 이 노래가 나오면 술자리의 아빠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양현경은 무대에 오르지도 못한 일화가 있다. 아버지들이 자식들 생각이 나 술자리를 일찍 떠버리자 양현경이 이 노래를 부르면 장사가 안 된다는 판단에 그를 무대에 세우지 않아서였다.

노랫말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얽힌 뒷얘기도 있다. 1절 가사 중 ‘다정하신 모습으로’는 ‘술 취하신 모습으로’가 원 가사다. 작사자는 아버지가 술을 한 잔 하고 기분이 좋아 자식에게 크레파스를 선물하는 모습을 그리려 했다. 하지만 공연윤리위원회(현 영상물등급위원회) 심의과정에서 바뀌었다. 심의 관계자가 “그럼 전국의 아버지들이 알코올중독자 입니까?”라고 지적성 질문을 했다. 그래서 ‘술 취하신 모습으로’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고쳐져 심의를 통과했다.

노래가 나오고 인기를 끌자 재미있는 가사로 바뀌어 불리기도 했다. 크레파스와 립스틱의 사용방식이 비슷한 점을 들어 ‘어젯밤에 000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입술에는 크레파스를 떡칠하고 오셨어요’ 등으로 불리기도 했다.

동요음반, 꼴라쥬애니메이션(collage animation) 등으로도 만들어져 어린이들에게 인기였다. 꼴라쥬애니메이션이란 인쇄물이나 그림 따위의 모양을 자르거나 가위로 오린 납작한 사물의 조각들을 움직여 만든 애니메이션물을 말한다. LG사이언스가 이 노래 가사를 바꾸고 편곡한 교육용 ‘행성송(行星song)’을 만들었다. LG상남도서관이 운영하는 온라인 과학포털사이트 LG사이언스랜드(www.lg-sl.net)를 통해 보급된 이 노래는 어린이, 청소년들이 과학을 쉽게 공부할 수 있게 애니메이션과 노래를 결합해 만든 에듀테인먼트콘텐츠(edutainment contents)다. 가사는 우주와 관련된 내용이다. ‘우주만물 너무 신비해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 / 태양계는 8개 행성 각각 행성 특징도 달라 (음음) / 수성 밤낮 기온 차 크고 금성 가장 밝게 보여요 / 행성 순서 나열해보면 수~금지화목토천해 (음음)’ 등으로 나간다.

가수 양현경, 인천서 라이브카페 운영

‘아빠와 크레파스’를 부른 양현경(1958년 3월 15일생)은 노래그룹 배따라기 소속으로 데뷔했다. 그는 통기타 붐이 일던 시절 스스로 기타를 익혀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1980년대 초 우연히 나간 아마추어 통기타 노래자랑대회에서 대상을 받아 음악의 길을 걷게 됐다. 이후 그는 가수 이진관의 소개로 배따라기 소속 이혜민 씨를 만났다. “촌스럽고 목소리도 저 모양인데…” 라며 모두가 양현경의 첫 인상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으나 기회가 찾아왔다. 그 무렵 군에서 제대한 김범룡이 그녀의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높은 점수를 받은 그녀는 이혜민의 반대에도 배따라기에 어렵게 끼어들 수 있었다. 그녀가 배따라기에서 처음 부른 노래는 2집 음반에 실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 하나요(봄비)’다. 그는 노랫말 중 ‘나는요’ 부분이 마음에 들어 “그 부분만 부르게 해 달라”고 울기까지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씨가 녹음실에서 ‘봄비’를 불러보라고 하자 양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 노래가 1984년 세상에 나왔고, 이를 계기로 양현경은 1987년 배따라기 7집 음반까지 이 씨와 함께 했다.

그 후 그녀는 배따라기에서 나와 솔로가수가 돼 발라드, 포크계통 노래를 부르고 있다. 양현경 독집음반 ‘솔거의 그림’(1990년), ‘20년 후…’(2004년), ‘양현경 2005 다시 부르기’(2005년), ‘2007 Fusion& Memory’s’(2007년) 등을 발표했다. 그는 2007년부터 인천시 미추홀구 학익동에서 ‘양현경의 열린 음악회’란 라이브카페를 운영하며 통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른다. 그는 건강이 허락하면 90세까지 노래 부르는 게 희망이다. 노래를 듣고 퍽퍽한 삶을 견디며 살아가는 많은 분들이 감동 받고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다.

노래 만든 이혜민, “배따라기는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

이 노래를 만든 이혜민(1959년 1월 15일 출생)은 1981년 데뷔한 작곡·작사가 겸 가수다. 그해 제1회 연포가요제에서 ‘첫사랑은 다 그래요’로 우수상을 받았다. 강은철이 불러 히트한 ‘삼포로 가는 길’을 고교 때 작사·작곡했다. 김흥국의 ‘호랑나비’·‘59년 왕십리’, 이동기의 ‘춘희’, 김재희의 ‘애증의 강’, 이예린의 ‘포플러 나무 아래’ 등도 작곡했다. 그는 1983년 ‘은지’란 노래를 부르며 가수로 이름을 올렸다. 배따라기로 활동하며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 하나요’, ‘아빠와 크레파스’, ‘비와 찻잔 사이’ 등을 불러 히트했다. 노래 ‘골목길’로 히트한 세미 로큰롤 테크노 팝 1세대 음악가 겸 작사가인 이재민이 그의 6촌 형이다.

이혜민은 자신이 주도하는 배따라기에 대해 할 얘기가 많다. 배따라기를 자신이 혼자 이끌어왔다고 견해에서다. 그는 2009년 2월 9집 음반을 낸 것을 계기로 한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배따라기가 자신의 솔로 프로젝트임을 강조했다. “1983년 데뷔, 20년 넘게 활동해오면서 배따라기는 너무도 당연하게 듀오로 인식돼 왔다. 앨범을 낸 이유 가운데 하나도 그런 오해를 바로잡는 것”이었다고 밝혔다. ‘배따라기=이혜민’을 알리려 새 음반을 냈다는 것. 2집 음반도 ‘그댄 봄비를 무척 좋아 하나요’에서만 여성객원보컬을 썼고 나머지 노래들은 이 씨 혼자 작업했다. ‘그댄 봄비를…’ 인기 덕에 배따라기가 (혼성)듀오로 알려져 왔고, 그 때문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배따라기는 이혜민과 노근식의 남성듀엣으로 시작, 1981년 연포가요제 때 우수상을 차지했다. 그 후 이혜민 혼자 활동하다 1984년 양현경이 합류, 남녀듀엣이 됐다. 배따리기는 평안도 민요 곡명이자 김동인의 단편소설(1921년 6월 ‘창조’ 제9호에 발표) 제목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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