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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웅덩이 사색 3

  • 입력 2019.09.04 10:49
  • 기자명 신승철(블레스병원장,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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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그런데 물웅덩이 앞에서 그림자 같던 내가
갑자기 무겁게 느껴지면서... 측은하게
여겨지게 됨은 무슨 까닭에서인가.

도시 풀리지 않는 물음처럼 떠나지 못하고
가부좌를 틀고서 -
향기도 없는 무無를 향유한다고

밤낮없이
버티고 앉아 있는 이 맑은 물웅덩이

끝내 응답이 없어

아마 이 생에 도달할 곳 없음에
크나큰 실의에 빠져있는 것이리라.

구멍들이 숭숭 뚫린 그 물건 - 마땅히 갈 곳도 없어
물에 비친 구름이나 입에 물고 무거운 산 뚫을 의지 있었다.
날개 있어 어두운 바다 밑바닥까지 훤히 둘러볼 참이었다.

그러다 비상非常하게 - 지평선 저 너머에서
한줄기 희망의 연기가 피어오름을 보게 되었다.
; 그러나 이건 익명으로 버림받아왔던 살이 내는
하나의 비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 이곳엔 예전부터 푸른 용이 살아있었다.
날이 가물면, 먼저 나서 비를 부르는
그러나 여태 자물쇠로 굳게 잠가 두어
몸 웅크린 채 가는 숨만을 조용히 뱉어왔던 용

그간 목숨 간신히 부지하며 시간을 크게
원망하고 있었던 전생前生의 그 용
이 물웅덩이 속에서 어른거리며 남모르게 몸을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리라.

이렇게 흐린 날이면, 이 물웅덩이 속에서
그 놈 한번쯤 길게 울고 싶은 심정...(안다)

세계의 한계 상황으로 절망했던 그 시절의
시퍼런 그 비참을 붙들고 크게 소리 내어 울었던 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 흥에 겨우면, 그 놈
산들을 연이어 뒤집어버리고 강물을 한 입에
다 마셔버렸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어느새 내 앞에 나타난
자그마한 눈 먼 자라 한 마리에
그만, 나 들켜버리고 말았다네.

머리도 없는 그 놈, 상한 이 음식의 냄새를
흠칫 맡고는 이내 재빠르게
깊은 물웅덩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네.

▲ <물결에 대한 기억> Acrylic on canvas, 32 x 41
▲ <물결에 대한 기억> Acrylic on canvas, 32 x 41

하일지 작가

프랑스 프와티예대학교 불문학 석사, 리모쥬대학교 박사

1990년 소설 <경마장 가는 길>로 소설가로 등단. 1994년 영시집 <Blue Meditation of the Clocks>(시계들의 푸른 명상)을 미국에서 출간함으로서 미국에서 시인으로 등단. 2003년 불시집 <Les Hirondelles dans mon tiroir>(내 서랍 속의 제비들)을 출간함으로서 프랑스에서 시인으로 등단. 2019년 첫 개인전 <시계들의 푸른 명상>을 열어 화가로 등단.
소설, 시집, 소설이론서 및 철학서 등 다수 저술, 미술작품으로는 ‘우주피스 공화국’ 등 89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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