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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우정의 경계를 초월하다
  •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 승인 2019.10.0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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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라와 슈만

[엠디저널]현대의 가을은 더 이상 달력의 숫자로 아는 것이 아닌 냉방기의 필요성이 없어짐을 깨닫는 순간 확인하게 된다. 또한 음악 애호가들에게 가을이 왔음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있다. 바로 ‘가을의 작곡가’로 인식되는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의 음악이 들려올 때 그 어느때보다도 짙은 우수(憂愁)가 느껴지는 때가 그러하다. 독일 북부의 함부르크 출신 작곡가인 그는 매사에 신중했고 쉽게 곡을 발표하지 못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수차례 악보를 고친 후에 공개 연주와 출판을 허락했다. 곡을 계속 수정하는 과정을 통해 작품에 점점 두텁고 묵직한 정서가 쌓이면서 그의 작품이 우수를 불러일으킨다.

브람스와 슈만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 클라라

브람스는 그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린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부인 클라라를 사랑했던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클라라 슈만(Clara Josephine Wieck Schumann, 1819~1896)은 슈만의 아내이자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 그녀의 삶은 끊임없이 영감과 감동을 주는 존재 그 자체였다. 200년 전 독일에서 태어난 이 여성은 19세기에 이미 자신의 시대를 열어가는 예외적인 존재였다. 신동 음악가, 뛰어난 작곡가, 대가 연주자, 악보 편집자, 그리고 유명한 교수로 그녀는 평생 자신의 길을 확장했다. 그녀로 인해 여성 음악가에 대한 인식도 함께 확장되었으며 그녀의 삶과 음악은 많은 이들에게 진정한 영향력을 주었다고 할 수 있겠다.

낭만파 음악의 선구자인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의 일생에서 가장 큰 사건이자 예술의 분기점은 클라라 비크 슈만과의 결혼이라고 할 수 있다. 슈만은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되기 위해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피아노 교육자인 프리드리히 비크(Friedrich Wieck, 1785~1873)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슈만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 피아노 연습에 몰두했는데 약지의 움직임이 만족스럽지 못해 끈에 손가락을 매달아 피아노를 치는 특이한 방법을 시도할 정도로 집요하게 연습에 매달렸다. 무리한 연습으로 여러 차례 손이 마비되기도 했다. 비크 교수에게 피아노를 배우던 중 손가락 부상으로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을 위기에 처한 그에게 작곡가의 길은 필연적인 운명의 길이었다.

그러나, 슈만의 직업상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음악인의 생활을 알고 있는 비크 교수로서는 클라라에게 청혼한 슈만을 반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반대로 결혼을 할 수 없게 되자 슈만과 클라라는 결국 법정까지 가게되었고, 법정은 둘의 손을 들어주었다.

1838년 슈만이 클라라에게 편지와 함께 보낸 <다비드 동맹춤곡집(Davidsbundlertanze)> 은 클라라가 슈만의 여인임을 보여주는 듯 작품 속에 결혼 전후의 연회를 넣어 클라라에게 헌정하였다. 클라라와 약혼한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때부터 쓰기 시작한 작품이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했던 슈만이 결혼에 대한 생각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는 것을 풍요로움과 황홀한 이 곡의 감정들에서 알 수 있었다. 클라라의 슈만을 향한 사랑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숨어있는 듯하다. 그녀의 음악적 재능과 천재성은 슈만의 음악 인생에 있어 필연적이자 운명적이라 할 수 있다.

슈만은 악보를 클라라에게 보내면서 ‘당신이 비르투오조(virtuoso)라는 사실을 잊어야 연주할 수 있을 거야’라고 적은 대목은 이 작품에 담긴 복합적이고 모순적인 정서를 느끼게 한다. 여기서 ‘비르투오조’란 ‘탁월함’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vitus’에서 나온 말로 예술이나 도덕에 상당히 특별한 지식을 가진 사람 또는 예술의 기교가 뛰어난 사람이라는 뜻으로, 오늘날에는 음악에 한해 후자의 뜻으로 사용된다. 슈만과 사랑에 빠지기 이전부터 훌륭한 피아니스트였던 그녀에게 슈만의 이 메시지는 어떻게 들렸을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이러한 복합적인 정서로 인해 이 작품이 위대한 걸작이라고 불리는 것일까?

실제로 부모보다 사랑을 선택한 그녀이지만 피아니스트로서의 꿈을 키웠던 그녀에게 결혼은 오히려 장애물이 되었다. 남편 슈만의 작곡에 방해가 될 것을 걱정해 집에서 연습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했고, 6명의 자녀들을 양육하며 그렇게 음악의 길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1843년 부부가 라이프치히 음악원 교수로 초빙되며 안정되고 다복한 가정의 울타리 안에서 슈만은 수많은 곡을 작곡했고, 자신의 곡을 발표해주는 클라라는 듬직한 조력자가 되었다. 1844년 드레스덴으로 옮겨가며 슈만의 명성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까지 넓혀갔고, 1850년에는 뒤셀도르프 관현악단 지휘자가 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이처럼 클라라의 음악 활동은 결혼 후에도 계속되었다. 슈만과의 결혼 후 남편의 작곡 활동을 꾸준히 도왔고 남편의 죽음 이후에는 남편과 브람스 음악의 해설자로서도 활약하며 작곡 활동에도 힘썼다. 

<다음호에 계속>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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