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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제를 제시간에 못하는 딸아이

  • 입력 2020.03.09 10:51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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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Dr.B는 제가 일하는 카이저 병원 응급실에서 일하는 동양계 의사입니다. 17년 전에 제가 이 병원 근무를 시작할 때, 처음 응급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환자를 응급치료하다 보니 한 번도 속 이야기를 나눌 경황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Dr.B가 제게 조용히 다가오더니 딸의 이야기를 꺼내었습니다. 두 살짜리 아이가 무척 영리하고 밝은데 밤이면 잠을 자지 않는다면서 걱정을 하였습니다. 본래 스튜어디스로 일하던 아기의 엄마는 아주 직장을 그만두었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아무리 정성을 들이고, 사랑을 주어도 아기의 잠자는 버릇은 전혀 좋아지지가 않는답니다. 가만히 얘기를 들어보니, 아기는 원래가 예민한 체질의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 같았습니다. 엄마와 아기가 서로를 너무나 힘들게 만들며, 여유를 갖지 못하는 듯 했습니다.

“이제 세 살이 가까워오는 아기는, 다른 아기들이나 보육원 선생님들을 통해서 새로운 재미를 찾을 수 있고, 자신의 성격을 조절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저는 Dr.B에게 조언했습니다. “아마 낮의 생활이 즐겁고, 흥미로우면 밤에 자는 것도 많이 좋아질 거”라면서. ‘만일 그래도 잠을 들지 못하면 소량의 항히스타민제인 베나드릴(Banadyl)을 써보라는 것’ 도 곁들였습니다. Dr.B를 통해서, 저는 한 달에 한 두 번씩 응급실 당직을 설 때면, 딸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중년이 넘는 Dr.B가 외동딸의 얘기를 할 때면, 평소의 근엄한 동양남성상과는 딴판으로 눈을 반짝이며, 표정이 어린아이처럼 밝아지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지난주에 저는 Dr.B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간 딸을 상담하던 심리학자가 아무래도 약물복용이 필요하다고 조언을 합니다. 우리 딸을 진단해 보실 수 있겠습니까?”

13세의 딸은 무척이나 불안증세가 심했습니다. 본래 태어날 때부터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었을 주의산만증세는 아직도 변함이 없는 듯해서 수업시간이면 주의집중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 동안에는 부모님의 열성과 가정교사의 도움, 심리학 박사와의 상담으로 어느 정도 좋은 성적을 유지해왔는데, 아마 사춘기가 되면서부터는 감정적 동요가 더욱 커진 바람에 도저히 숙제를 제 시간에 할 수가 없다는 하소연이었습니다. 숙제를 한 번 끝내려면 어머니와 함께 12시까지도 앉아 있어야 하고, 게다가 최근에는 D학점을 받는 과목도 생겼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정도가 심한 주의산만 증세를 그간 본인도 열심히 장시간의 주의집중을 요하는 숙제는 그녀의 참을성에 한계가 왔었던 갓 같습니다. 소녀와 부모님의 동의를 얻어 12시간 동안 효과가 유지되는 Concerta라는 각성제를 복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어제 응급실에서 만난 Dr.B는 다시 옛날의 행복한 표정을 보이며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아이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릅니다. 본인이 자신의 주의력을 집중시킬 수 있으니, 학교공부나 숙제가 이제는 지루하지 않는다는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천만에요! 따님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었지만, Dr.B와 Mrs.B가 차마 결정을 내리지 못하시던 것을 중요한 순간에 용기를 내셔서 결단해주신 것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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