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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여인’을 탄생시킨 ‘난시증’

모딜리아니 (Amedeo Modigliani 1884-1920)

  • 입력 2020.10.21 09:43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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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이탈리아계 유대인인 화가 모딜리아니는 기다란 얼굴의 인물상의 작품을 만들어 유명해졌는데, 그가 파리로 온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이다. 그 시기에 온 이유는 파리가 세계예술의 중심이 되기 시작하였기 때문이다. 거리에는 화랑이 속속 들어서고 대규모 전시회가 매년 수없이 열렸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예술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래서 전 세계의 예술 지망생들이 파리로 속속 모여들었으며 젊고 가난한 외국인 시인과 예술가들은 몽마르트나 몽파르나스의 서민 동네에 살면서 꾸준히 예술 활동을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화가로서는 모딜리아니, 키슬링, 파생, 샤갈, 수틴, 반통게를로, 위트리요, 로랑생 등을 들 수 있으며 그들을 ‘에콜 드 파리(파리 그룹)’라고 불렸다. 그들은 포비즘과 큐비즘 같은 새로운 미술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특정한 그룹에 속하지는 않았다. 그리고는 자기네의 처참한 처지와 불안한 생활을 술과 마약으로 달래가며 파리의 생활상과 번영되어 가는 도시의 모습을 그려 냈다.

특히 여성과 파리의 풍경을 섬세하게 표현했던 그들의 작품이 인정받게 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며 그래서인지 그들이 그린 인물화들은 모두 애수에 젖어있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시작하였으나 전위예술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또 구상(具象)인가 추상(抽象)인가에 문제에 대해서도 그렇게 흥미를 느끼지도 않았다. 단지 많은 실내의 공간에서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슬픔을 느낀 나머지 목이 가늘고 길어진 사람 얼굴을 조각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방심한 것같이 보이는 얼굴에서 양 눈에 눈동자가 없는 눈으로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제1차 세계 대전시 도시의 한구석에서 겨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에게 왜 긴 목과 코 그리고 동자 없는 눈을 고집하는가를 물으면 그는 “일부로 그렇게 그리기 위해 사람의 얼굴을 끌어당긴 것이 아니고 눈에서 동자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해서 조각한 것도 아니다. 단지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손이 움직였을 뿐이다.”라고 했다.

모딜리아니 작: ‘석두(石頭)’조각 (1911-12) 런던, 다트 미술관
모딜리아니 작: ‘석두(石頭)’조각 (1911-12) 런던, 다트 미술관

그의 조각 작품‘석두(石頭)’(1911-12)를 보면 돌에다 논지를 들여대고 힘껏 파헤쳐 나타난 새로운 형태는 그것은 추상 조각의 해석을 넘어서 독자적인 시상을 철저하게 구현시킨 순교자적 고집과 자부감을 느끼는 상징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모딜리아니 작품은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것을 볼 수 있는 형태로서 마치 내밀성의 공간에서 미개(未開) 상태로 개화해버린 봉우리 같은 느낌을 길어진 목에서 느끼게 한다. 목이 길어지다 보니 코는 덩달아 길어질 수밖에 없다. 결국은 몸 내부에 담겨있는 괴로움과 슬픔을 목으로 거쳐 코로 방출시키다 보니 그 아픔은 데포르메로서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실은 그는 심한 난시(亂視 astigmatism)이었다.

난시란 눈의 굴절계가 변형되어서 물체의 상(像)이 망막 위에 바르게 맺혀지지 않는 상태로서 우리 몸 밖에 있는 점광원(點光源)이 눈 안에 한 점으로 상이 맺혀지지 못하고 두 점 혹은 그 이상의 초점을 갖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그의 형태변형은 그의 눈의 심한 난시 때문이었다는 것은 영국의 안과 의사 Trevor-Roper가 보고하였다. 특히 인물상에 있어서 길게 늘인 얼굴과 가늘고 긴 목 형태의 데포르메는 그의 난시와 관계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화가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주위의 사람들도 그의 눈에 비친 세계가 난시로 인해 변형된 것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했으며 화가 자신도 이를 모르고 보이는 대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모딜리아니는 조각을 계속하기에는 경제적으로 너무나 어려웠고 또 돌을 쪼아내는 힘든 작업을 하기에는 폐 질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건강상태로서는 어려운 일을 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조각을 포기하고 그림으로 돌아서게 되었는데 그의 조각 작품에 그의 예술적인 특징이 나타나고 있었다.

모딜리아니 작: ‘여인의 초상’(1917-16) 개인 소장
모딜리아니 작: ‘여인의 초상’(1917-16) 개인 소장

그는 여인들의 초상을 많이 그렸는데 ‘여인의 초상’(1917-18)과 ‘르니아 체코비스카의 초상’(1919) 등 역시 얼굴과 목이 긴 여인상을 그렸다. 그의 아내이자 모델이었던 잔 에뷔테른(Jeanne Hebuterne 1898-1920)을 그린 ‘푸른 눈의 여인’(1917)의 그림 앞에 서면 왜 그런지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더욱 발길을 잡고 놓지 않은 것은 그 푸르고 깊은 애수에 찬 눈이다.

그녀는 양가집 규수로서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모딜리아니와 동거하기 시작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소중하게 기른 딸을 열네 살이나 연상, 술주정뱅이, 마약 복용자, 게다가 결핵으로 몸마저 성치 않은 무명의 화가에게 딸을 줄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내면 나름대로 예술적인 안목이 싹트고 있어 모딜리아니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에 사로잡힌 것이었다.

모딜리아니 작: ‘루리아 체코브스카의 초상’(1919) 개인 소장
모딜리아니 작: ‘루리아 체코브스카의 초상’(1919) 개인 소장

잔은 화가에게 영혼을 다 쏟아부었고 화가는 이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사랑이 영감을 낳는다는 것을 깨우친 그는 마침내 평생의 모델이 된 아내 잔을 만나서 푸른 눈에 얼굴과 목이 길긴 여자라는 불후의 캐릭터를 완성한 것이다. 그 배경에는 그의 난시라는 병적상태가 한몫했다. 화가는 난시이었기 그의 눈에는 대상이 세로로 길게 보인다는 것은 당연하였을 것이다. 이렇게 길게 보이는 것이 병적인 눈의 시력 때문이라는 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대상을 보이는 대로 길게 표현하다 보니 그 특징을 살리려고 화가는 나름의 데포르메를 썼기 때문에 긴 얼굴과 긴 목 그리고 푸른 눈의 여인이라는 걸작이 탄생 된 것이다.

모딜리아니 작: ‘푸른 눈의 여인’1917,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
모딜리아니 작: ‘푸른 눈의 여인’1917, 파리, 국립 현대 미술관

모딜리아니의 건강만 허락되었다면 아마 두 사람의 세속적인 삶은 극적인 영관으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허락된 운명이 아니었다. 결핵으로 고생하던 모딜리아니가 숨을 거두자 영혼을 아낌없이 주고 난 뒤에 남은 모델의 육신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외친 그녀는 모딜리아니가 사망한 지 6시간 만에 그를 뒤따랐다. 이렇게 해서 모딜리아니와 잔은 그림 역사상 신화를 남긴 것이다.

영화 ‘모딜리아니와 잔’의 주연배우들의 모습
영화 ‘모딜리아니와 잔’의 주연배우들의 모습

그의 예민한 감수성으로 죽음의 그림자가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낀 그는 죽음에 대한 공포감보다 잔에게서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두려움이 그를 더 사로잡았다. 그래서 그 짧은 기간에 그는 잔의 초상화를 무려 26점이나 그렸는데 그 눈은 모두가 해맑은 푸른 눈이다. 즉 시력이 없는 ‘제3의 눈’으로 그린 것이다. 그 푸른 눈에는 무엇이 비추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푸른 눈의 깊고 깊은 곳까지 따라 가보면 그곳에는 일찍이 모딜리아니가 잔의 순결하고 고결한 예술 사랑의 혼이 느껴지고 아내로서의 절개를 예지한 화가의 예리한 눈결이 마주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그 맑고 푸른 눈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랑 이야기의 하나이다. 3년여의 세월 동안 두 사람은 열렬히 사랑했고 그 사랑에 힘입어 불후의 명작인 잔의 초상화를 함께 만들어 고결하고도 순수한 미적 감각을 창출했다. 비록 이룬 죽음으로 짧은 사랑의 생활이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오늘날까지도 진한 여운을 남겨 그림을 보는 이들의 가슴을 파고든다. 이러했던 그들의 사랑 이야기는‘모딜리아니와 잔’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이 어쩌면 모딜리아니와 잔의 생존 시의 사진과 꼭 같이 달 맞았기 때문에 첨부하였다. 주인공은 바로 리디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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