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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면 극복되는 ‘불안‧초조’

  • 입력 2020.11.24 11:59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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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내 환자 셜리는 75세의 백인 미망인이다. 몇 년 전에 사랑하는 남편을 잃은 슬픔과 겹쳐서 또 다른 증상이 왔다. ‘공황장애’(panic disorder)라는 심한 불안증세이다.

특히 집 밖을 나갈 때는 이 증상이 심해진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하고, 숨이 가빠지면서, 꼭 죽을 것 같은 불안감이 온다고 한다. 손이 떨리고, 진땀이 난다고 한다. 몇 분간 이러한 상태가 지속 되면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한다. 남편과 함께 살 때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고, 무언가 세상에서 끔찍한 일이 당장 자신에게 벌어질 것 같은 초조감이 온 것도 이때쯤이라고 한다. 자녀들은 모두 장성해서 다른 주에 살고 있고, 큰 집에서 혼자 있기가 싫은데 집 밖에만 나가면 이런 증상이 오니 정말 견디기가 어렵다고 했다.

남편과 사별 후 공황장애 찾아와

자세히 가족력을 살펴보니 자신의 어머니가 고소 공포증이 있었던 듯 하다. 본인과 아무 연관이 없으리라고 믿었던 어머니 이 증상이 ‘불안증세’의 일부임을 알게 되었다.

셜리는 차츰 자신의 심리적 현상이 대뇌 작용과 관계됨을 이해하기 시작하였고, 드디어는 화확 물질 중에서 불안감을 줄여줄 수 있는 ‘세로토닌’(serotonin)의 역할도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팩실’(paxil)이라는 항우울제 복용을 시작했다.

그러나 약물만으로는 치유되기가 어려운 것이 정신질환이다. 약물로서 어느 정도 감정 조절이 된 상태에서 행동 요법과 심리적 치료를 통해서 자신의 감정을 달래가면서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녀가 아침에 깨어나서 잠들 때까지의 시간표를 짰다. 특히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두 나열해 보았다. 우선 셜리는 사람을 좋아하고,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남편이 있을 때는 친구도 많고, 파티도 많이베풀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옛 친구들은 그녀에게 슬픈 기억만을 불러올 뿐 더 이상 기쁨을 주지 못한다고 한다. 게다가 그들 중에는 이미 사망했거나, 죽음을 향해서 다가가는 노인들이 많아서 더욱 그녀를 불안하게 한다.

본래 예술을 좋아한 그녀는 집 근처에 있는 ‘게티 센터’에 자원 봉사자로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녀의 생활은 차츰 활기를 찾기 시작하였다.

약물과 함께 행동 • 심리요법 병행으로 활기 되찾아

아직도 ‘공황장애’의 증상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때마다 조용한 곳에 들어가서 자신에게 이야기를 한다. “아마 이 증상은 몇 분 후에는 끝날 거야. 천천히 심호흡을 하고, 잠시 기다리면 곧 편해질 테니까.” 그러면서 또한 ‘시각적 연상’을 한다. 자신이 들고 다니는 가족 사진을 펴고, 그 사진 속의 남편과 같이 시간을 보냈던 바닷가를 눈앞에 그린다. 바다의 장면만이 아니라, 그녀는 그 당시에 경험했던 편안한 휴식과 행복했던 기억까지 연상한다.

이렇게 연습을 하다보니, 이제는 언제라도 눈을 감고서, 편안한 자세로 앉으면 ‘시각적 연상’이 쉽게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녀가 일주일에 하루씩 시작했던 봉사 활동은 요즈음 훨씬 늘어났다.

쾌활한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다른 봉사자들이 서로서로 그녀를 불러내기 때문이다. 셜리는 이제 집안에 앉아서 남편 생각에 울고 있을 틈이 없단다. 자신이 과거에 일하던 백화점에서도 다시 그녀를 파트타임 판매원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얼마 후에 그녀는 두툼한 봉투를 남기고 갔다. 현재 전시되는 작품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있는 책자와 화보들이었다. 예술을 즐기는 자신의 정신과 의사에 대한 따뜻한 배려이리라.

어느 아름다운 주말에 나는 산등성이에 우뚝 서 있는 미술관을 방문할 계획이다. 그리고 이제는 힘든 슬픔과 죽음같이 어려운 ‘공황장애’를 이겨내고 노후를 즐기는 내 환자 셜리의 인생을 축복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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