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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이사벨라’를 탄생시킨 ‘심술과 질투의 고민증’

- 화가 밀레이(Jhon Everett Millais)

  • 입력 2021.05.18 08:00
  • 기자명 문국진(의학한림원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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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이 작 ‘이사벨라’1848-49,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
밀레이 작 ‘이사벨라’1848-49, 리버풀, 워커 아트 갤러리

[엠디저널] 화가 밀레이(Jhon Everett Millais 1829-1896)가 그린 그림들 가운데 ‘이사벨라’(1848-49)라는 심술궂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잘 표현한 그림이 있다. 많은 사람이 식당에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고 있는 장면의 그림인데 맨 앞쪽에 앉은 남자는 호두를 거칠게 까면서 한쪽 발을 앞으로 쭉 뻗어 개를 건드려 괴롭히는 심술궂은 행동을 하고 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개는 어쩔 줄 몰라 여주인 쪽으로 가서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파묻으려 한다. 남자가 개를 괴롭히는 것은 여동생인 이사벨라가 하인인 로렌조와 다정스럽게 오렌지를 나눠 먹는 모습에 질투를 느꼈기 때문인데, 이사벨라와 로렌조는 남몰래 사랑하는 사이였다. 여동생이 이렇게 천한 하인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본 오빠는 그만 화가 치밀어서 험상궂은 얼굴의 표정을 지우며 엉뚱한 개한테 화풀이하는 것이다. 흰색 바지를 입고 쭉 뻗은 다리는 남자의 심술이 얼마나 고약한가를 말해주는 것 같으며, 시달림을 받는 개는 두 사람 사이로 다가서면서 앞으로 닥칠 끔찍한 운명을 예고라도 하는 듯이 보인다.

당시 유럽 사회는 신분에 차이가 있으며 서로 사랑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좋아하는 감정은 종종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게 마련이어서 이살벨라와 로렌조는 그들의 앞날의 사랑이 밝지 못하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상대방에게 끌리는 마음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것 때문에 무서운 비극이 일어나게 되는데, 분노한 오빠들이 로렌조를 죽여 숲속에 묻어 버리는 비극이 일어난다. 화가는 그 심술부리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심술부릴 때 표정은 참으로 추하기 짝이 없다. 심술이란 질투의 감정에서 파생되는 온당하지 않은 고집이다. 앞서 그림의 내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질투나 심술은 살인이라는 엄청나고 무서운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추한 꼴인 것이다.

질투는 한문으로 女변에 병질疾,즉, 시기할 嫉, 그리고 女변에 돌석石을 써서 투기할 妬로서 이를 합쳐 嫉妬로 표현한 것을 보아도 질투는 예부터 여성이 잘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성의 질투는 남성의 질투와는 달리 살인까지 가지 않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여성에게는 원래 자기가 우수한 남성에게 선택당하고 싶다는 생물로서의 의식을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의식이 본능으로 남아 있다가 무의식적으로 다른 여인과 자기를 비교해 본인보다 잘났다 생각되는 경우에 질투심이 발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성의 이러한 질투심은 비록 결혼을 의식할 필요가 없는 시기에 들어서 있는 여성이라 할지라도 본능으로 남아 있다가 발동하곤 한다는 것이다. 즉 지위가 낮은 여성의 질투는 주위의 여성이 차지 한 보잘것 없는 행운에도 질투하며, 지위가 높은 여성이란 원래 매사에 자신을 지니고 행동하였기 때문에 얻은 지위이기는 하나 자기가 다른 이보다 처지거나 못났다는 느낌에는 견딜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에 이런 여성들은 일이나 결혼생활에서 자기보다 잘하고 있어 나았다거나, 미모나 몸매가 자기보다 뛰어나거나, 자식이나 손자의 진학, 취직, 그리고 해외여행, 옷 자랑 등에 자기가 처진다고 느낄 때는 자기보다 앞선 이에 대해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다.

샌디스 작 ‘사랑의 어두운 면’1867, 개인소장
샌디스 작 ‘사랑의 어두운 면’1867, 개인소장

이러한 여성이 질투를 느낄 때의 감정을 적나라하게 잘 표현한 그림은 화가 샌디스(Anthony Fredrick Sandys)가 그린 ‘사랑의 어두운 면’(1867)이다. 질투심에 불타는 여인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 곳을 응시하며 사나운 표정을 지우고 있다. 윗입술을 말아 올려 입을 벌림으로 질투로 가득 차 부글부글 끓어올라 폭발 지경에 달한 내장의 압력을 손에 강하게 잡아 쥐고 있는 꽃묶음을 뿜어내 달래려 애쓰고 있는 듯이 보인다.

남성의 경우는 여성의 경우와는 좀 달리 우선 가장 강한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연인이나 부인이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쏠리는지 의심이 들 때 그 상대방 남성에게 불타는 질투심이 생기며, 파티나 모임에서 자기보다 인기가 좋아 주목된 상대, 학창시절 자기보다 처지던 친구가 일에 성공하고나 출세하는 경우, 질투를 느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남성의 질투심을 잘 표현한 그림은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가 그린‘질투’(1895)라는 연작 그림이 있다. 뭉크는 친구인 프시비지예프시키와 그의 연인 다그니 유을 사이에서 삼각관계의 사랑을 경험한 쓰라린 기억을 고스란히 그림에 담았다.

뭉크 작 ‘질투 I & II 연작’1895, 석판,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 작 ‘질투 I & II 연작’1895, 석판, 오슬로, 뭉크 미술관

뭉크로 하여금 ‘질투’의 연작을 그리게 한 여인은 아름답고 지성적인 노르웨이 출신의 여류 작가 다그니 유을 이다. 이 발랄한 여성은 스칸디나비아 예술가 그룹인 ‘검은 돼지’회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신비한 매력을 지닌 여인이었다. 많은 예술가 작가들이 그녀에게 프로포즈 하였는데 그중에는 뭉크도 끼어있었다. 이렇게 많은 남성이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자 그녀는 이들과 사귀며 사랑을 저울질하다가 마침내는 폴란드 출신의 상징주의 작가인 프시비지예프스키를 남편으로 택하자 뭉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 강렬한 질투에 사로잡히게 된다. 친구의 아내가 된 여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아픔에, 친구를 속여야 하는 죄책감까지 겹친 삼각관계의 이중 체험의 고통을 겪으면 서의 아픔을 표현한 작품인 것이다.

질투로 창백해진 남자의 얼굴과 유난히 희번덕거리는 눈빛은 질투가 얼마나 저주받은 감정인가를 느끼게 하는데 이는 마치 셰익스피어의‘오셀로’에 나오는 질투를 표현한 구절‘질투란 파리한 눈빛을 한 괴물인데 사람의 마음을 먹이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먹기 전에 마냥 조롱하는 그런 놈이다.’라는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이렇듯 질투의 감정이나 심술궂은 행동은 도덕적으로는 비난의 대상이 되고 나쁜 것으로 되지만 이를 순 생물학적 이론으로 볼 때, 모든 생물은 자기의 유전자를 남기고 이를 퍼뜨리기 위해 노력하는 행동에서 그 근원을 찾아볼 수 있다. 수컷은 자기의 유전자를 되도록 많은 암컷에 남기기 위해 행동하는데 이것을 사회적으로는 일부다처라는 말로 표현된다. 또 하나의 현상은 수컷은 자기의 유전자가 확실히 암컷에 전해졌는가? 혹시 다른 수컷의 것이 들어 온 것이 아닌가를 의심하는 본능을 지녔다. 이것이 질투 심술로 나타나는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또 암컷은 자기의 유전자가 남기 위해서는 힘세고 생존력이 강한 수컷의 생식세포와 자기의 난자가 결합 되기를 원하며 일부일처로서 임신 기간은 물론이고 애가 자라는 동안 옆에서 애와 자기를 지켜주며 다른 암컷에 한눈팔지 않기를 원하는데 이것이 암컷의 질투의 근원인 것이다.

이렇게 순 생물학적인 해석으로 보면 질투라는 감정은 자기의 유전자를 남기려는 본능의 발로이며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강한 감정이어서 다른 이를 미워하고 다른 이가 잘못되면 희열을 느끼며 어떻게 해서라도 잘난 것과 동격으로 되고 싶다는 욕망에서 나오는 감정이며 행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만물의 영장으로 다른 생물보다 우수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이면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한몫 한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고 보면 질투를 너무 추한 감정적인 처사라고만 몰아붙일 것이 못 되지 않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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