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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가 취(醉)하는 날

  • 입력 2022.02.15 11:44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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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쌩하게 추운 고추바람이 부는 날은 날씨는 춥지만 하늘은 퀭하게 맑다. 연 날리기에 딱 좋은 날이다. 방패연은 만들기도 힘들고 연줄 맞추기가 어려우니 솔개연을 만들어보자. 망가진 대나무 우산대를 진즉부터 준비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솔개연 날개 가로대로 쓸 청대나무를 구해야 한다. 가로대의 탄력성이 좋아야 연이 바람을 잘 타고 높이 날 수 있다. 우리 집에는 대밭이 없어 동생과 밤나무골 대밭으로 향한다. 바람이 불 때까지 숨어서 기다리다가, 바람이 불자 울타리를 넘어 들어가 긴 대나무 하나를 베서 쏜살같이 내뺀다.

바람이 조용할 때는 댓잎 낙엽으로 덮인 대밭은 작은 발걸음 소리도 크게 들린다. 그러나 작은 바람이라도 불면 댓잎 스치는 소리에 주변 소리는 모두 묻혀 버린다. 뭔가를 만들 때 지금처럼 재료가 풍부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대나무는 아주 훌륭한 목재 재료였다. 울타리에서부터 지붕이나 벽채 등 대나무가 나는 지방에서는 집을 지을 때 대나무는 필수재료였다. 대나무는 가구를 만드는 재료로도 두로 쓰여 솜씨 좋은 장인은, 대나무로 만들지 못하는 물건이 거의 없다. 젓가락에서부터 죽순요리까지 우리 식문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대나무는 사람들에게 물질적 도움만 준 것이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정신문화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대나무를 무척 사랑했던 사람들은 랑간(琅玕)이라는 대나무를 이르는 시어(詩語)까지 만들었다. 동진(東晋)의 명필(名筆) 왕휘지(王徽之)는 대나무를 귀히 여겨 차군(此君)이라 부르고 집에다 대나무를 많이 키웠다. 송(宋)의 소동파(蘇東坡)는 「차군(此君)」이라는 시에서 “밥 먹을 때 고기반찬이 없는 것은 괜찮지만, 사는 집에 대나무가 없어서야 될 말 인가. 고기 없으면 수척해질 뿐이지만, 대나무 없으면 사람이 속물이 된다네.”라 하였다.

중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선비들도 대나무를 무척 사랑하였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오우가(五友歌)에서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키며 속은 어이 비었는가? 저렇게 사시(四時)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라 한 바 있다. 이 시조에서 말하는 대나무의 특징은 아래 진(晉)의 대개지(戴凱之)의 『죽보(竹譜)』의 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식물 중에 대나무라는 것이 있는데 굳세지도 않고 부드럽지도 않으며 풀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非草非木). 속은 비어 있거나 간혹 차 있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마디가 있는 점은 모두 같다. 어떤 것은 모래나 물가에 무성하고 어떤 것은 바위나 뭍에서 잘 자란다. 무성하게 드리워져 푸르게 엄숙한 숲을 이룬다.”

매년 5월 13일을 죽취일(竹醉日)이라 하며, 용생일(龍生日)이라고도 한다. 대나무 심기에 알맞은 날이란 뜻이다. 대나무는 절조가 강하여 무척 까다롭지만 이날만은 술 취한 듯이 몽롱해져서 옮겨 심어도 잘 살아난다고 한다. 대나무가 정신이 흐릿해지는 날이란 뜻으로 죽미일(竹迷日)이라고도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이날 대나무를 옮겨 심고 시를 지어 죽취일에는 대나무가 술에 취해 제 뿌리를 자르고 옮겨 심어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취한 대나무 언제 술이 깨려나(竹醉何時醒 죽취하시성)

뿌리를 옮겨도 대나무는 모른다네(根移竹不知 근이죽부지)

가지와 잎 다칠까 걱정만 할 뿐(唯憂枝葉損 유우지엽손)

뿌리가 옮겨지는 것 괘념치 않네(不念根荄移 불염근해이)

옛 사람들이 무척 좋아하는 대나무였지만 옮겨 심을 때는 무척 까다로워 고생을 했다. 강희안(姜希顔, 1418~1465)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는 대나무를 옮겨 심는 방법과 분재로 키우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아래와 같이 아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자세하고도 훌륭한 설명이어서 그의 과학적 관찰력과 연구에 찬사를 보낸다.

“대나무는 봄에 비가 오는 날이면 옮겨심기에 좋은 날이다. 대나무를 옮겨 심을 때는 2~3개월 전에 미리 큰 뿌리를 잘라 흙으로 덮어주고 물을 자주 준다. 이렇게 하면 잔뿌리가 많이 생길 수 있다. 대나무는 서남쪽으로 뿌리를 뻗기를 좋아한다. 그러므로 남북을 표시해두었다가 남쪽이나 서남쪽으로 뻗은 것을 골라 북쪽이나 동북쪽을 향하게 심어야 한다. =중략= 심은 후 첫해 나는 순을 죽이고, 이듬해 나는 것도 죽이고 삼년 째 것을 키우면 아주 힘차게 잘 자란다. 동북의 높은 언덕에 심는 것이 좋고 해가 보이지 않는 그늘이면 더 잘 산다.”

“한양은 날씨가 추워 오반죽(烏斑竹)만 있을 뿐이다. 반죽은 한 해가 지나면 오죽으로 변한다. 5~6월에 매우(梅雨)가 내릴 때 새로 난 대나무 중에서 줄기가 곧게 뻗고 잎이 짧으며 가지가 빽빽한 것을 골라 화분에 심는다. 여러 마디의 뿌리가 있게 잘라내어 뿌리와 줄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해서 심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잎이 오그라들어 죽는다. 오래되어 화분이 비좁아지면 양지바른 곳으로 옮겨 심어야 한다. 화분에 처음 옮길 때는 해를 가려주어야 한다. 갈무리하며 너무 덥거나 차게 하면 안 된다. 물을 주어 건조하지 않게 해주고 사기화분이나 질 화분을 사용한다.”

대나무는 벼목 벼과 대나무아과에 속하는 여러해살이식물로 세계적으로 약1,250종이 있다한다. 우리나라에도 19종이나 있지만 크게 나누면 왕대, 산죽, 해죽 3종류다. 남부 지방, 특히 경상, 전라남북도와 충청남도에서 많이 자라고, 한두 종이 중부 지방이나 북부 지방에서도 자란다. 대나무를 한자로는 죽(竹)이라고 한다. 대나무가 북방으로 옮겨질 때 명칭도 중국 남방발음이 따라 들어왔다. ‘竹’의 남방 고음이 ‘덱(tek)’인데 끝소리 ‘ㄱ’음이 약하게 되어 한국에서는 ‘대’로 변천하였고 일본에서는 한국어의 '대'가 ‘다'가 변천되었고 나무를 뜻하는 '케(木)'와 함께 '다케'로 된 것으로 본다.

옛말에 봉황(鳳凰)은 오동나무가 아니면 깃들지 않고, 죽실(竹實)이 아니면 먹지도 않는다고 한다. 이 죽실이 굶주린 백성을 먹여 살린 기록이 조선시대 『지봉유설』에 있다. 태종 때 대관령 산죽(山竹)이 열매를 무척 많이 맺었는데 보리처럼 생겼고 율무처럼 찰기가 있었으며 맛은 수수와 같았다. 마을사람들이 가져가 술과 밥으로 먹었다. 치악산, 인제, 지리산, 한라산, 진주 등에 산죽 열매가 많이 나며 많을 때는 수만 섬까지 수확하기도 하여, 흉년에 백성들의 식량을 대신한다하였다. 광해군 때 허균(許筠)도 감과 밤 가루와 섞어서 만든 것을 몇 숟갈 먹었는데 종일 든든했으며, 참으로 신선들이 먹은 식품이라 하였다. 그러나 완상용으로 키우는 사람에게는 대나무가 꽃이 피면 죽고 말기 때문에 큰 문제다.

예부터 대나무는 다양한의미를 지녔다. 곧게 자라기 때문에 지조 있는 선비의 대쪽 같은 기질은 절개(節槪)와 정절(貞節)을 상징했다. 유가(儒家)에서는 아버지를 상징했으며 그 속이 비어있기 때문에 득도(得道)를 뜻하기도 했다. 무속신앙에서는 대나무를 신령스러운 나무로 여겨, 무속인 집에는 대나무를 세워두기도 한다. 대나무는 동양의 수묵화(水墨畵)에서도 중요한 소재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묵죽화(墨竹畵)를 그렸다고 한다. 고려나 조선의 화병과 주전자 등 도자기에도 대나무는 다양한 형태의 문양으로 등장한다.

죽순 요리로 쓰이는 맹종죽(孟宗竹) 같은 왕대는 우리나라에는 자생하지 않았고, 신라 때 최치원(崔致遠)선생이 중국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기후 온난화로 요즘은 서울에서도 야외에서 자라는 왕대를 볼 수 있다. 올봄 5월 13일 죽취일에는 집 앞 양지바른 언덕에 왕대를 옮겨 심고 싶다. 대나무가 자라 사철 푸르며, 바람 불 때 일렁이는 멋진 군무를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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