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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쭉들과 영산홍(暎山紅)
  •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 승인 2022.06.13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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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산길로 접어들자 울창한 숲속이라 낮인데도 소쩍새가 울고 솔부엉이가 부엉부엉 거린다. 소쩍새를 불러놓은 진달래는 이미 져버렸지만, 이어서 달걀 같은 둥근 새 잎들이 떠받든 연분홍 철쭉꽃들이 만발하였다. 키 큰 참나무 가지들을 뚫고 들어온 햇빛에 빛나는, 도톰한 다섯 장의 꽃잎들의 기품이 예사롭지 않다. 점심때면 늘 한글창제길을 벗어나 산길로 세종대왕의 손자인 오산군파(烏山君派) 묘역을 오르곤 한다. 가파른 언덕을 올랐다가 한글창제에 공이 큰 정의공주(貞懿公主) 묘로 내려와 8백년 은행나무가 지키는 연산군묘로 향한다.

철쭉

우리나라 봄꽃 잔치에서 어떤 꽃이 가장 기품 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나는 철쭉꽃이라 답하겠다. 먼저 철쭉꽃은 연약한 마른 가지에 핀 도톰한 꽃잎의 은은한 분홍빛만으로도 존재감을 나타내기에 충분한다. ‘큰키나무’들보다는 작지만 여느 ‘작은키나무’들보다는 큰, 적당한 크기도 기품을 나타내는데 한 몫을 한다. 꽃송이 크기도 목련을 제외하고는 가장 클 성싶다. 바람이 불어도 꽃잎이 도톰하여 일그러지지 않는다. 꽃잎이 시들 때도 영산홍(暎山紅)처럼 가지에 붙어 있지 않고 깨끗하게 떨어진다. 영춘화, 생강나무, 산수유로 시작하여 살구꽃, 벚꽃, 복숭아꽃 등으로 이어지는 봄꽃 잔치의 마지막 주자가 철쭉이다. 철쭉꽃은 고산지대에서는 6월 초순까지 피어서 가는 늦봄을 붙잡아 두기도 한다.

진달래

철쭉, 산철쭉, 영산홍, 자산홍, 만병초, 블루베리, 들쭉, 진달래 등은 모두 진달래 과이다. 이들 중에서 한국, 일본 중국이 원산지인 철쭉, 산철쭉, 영산홍, 자산홍, 진달래는 구별하기도 쉽지 않고 헷갈리게 쓰기도 하며, 중국에서는 엄밀히 구분하지 않고 혼용하기도 한다. 이들 중에서 꽃은 진달래가 가장 먼저 피는데, 잎이 나기도 전에 꽃이 핀다. 꽃잎도 진달래가 가장 얇으며, 독성이 없어서 먹을 수 있다. 진달래는 먹을 수 있기에 참꽃이라 한다. 앞에서 말한 다른 꽃들은 먹을 수 없다.

서두에 언급한 철쭉은 진달래에 비해 꽃 빛이 연하여 연달래라고도 한다. 꽃이 크고 서울지방에서는 왕릉주변에 잘 가꾸고 자라며, 철쭉 종류 중에서 가장 꽃이 커서 왕철쭉이라고도 한다. 철쭉에 비해 키가 작고 화려한 붉은 꽃이 피는 산철쭉이 있다. 산철쭉은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으며 물가나 습기가 있는 곳에 잘 자라서 수달래라고도 한다. 지리산, 주왕산 등 주로 남부지방의 고산지대나 산골의 깊은 곳 냇가에 잘 자란다. 요즘 아파트나 공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흰색, 자색 등 갖가지 색깔의 철쭉은, 왜철쭉이라 하며 일본이 원산지이거나 일본에서 개량한 품종들이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흰 철쭉도 있으며, 일본에서는 붉은 빛이 옅은 철쭉을 조선철쭉이라 한다고 한다.

영산홍

철쭉과 혼돈할 수 있는 화려한 꽃으로 영산홍이 있다. 온 산을 밝게 비춘다하여 영산홍이라 이름 할 만큼 화려하며 일본이 원산지이다. 꽃은 진달래나 철쭉에 비하여 작으며 홑꽃이고 나무도 작은 편이다. 철쭉, 산철쭉, 진달래 등에는 꽃에 주근깨 같은 반점이 있으나 영산홍에는 없다. 철쭉(왕철쭉)은 겨울에 완전히 잎이 떨어지는 떨기나무이고, 산철쭉과 영산홍은 겨울에도 완전히 잎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셋 다 꽃이 잎과 함께 핀다.

영산홍은 연산군(燕山君)이 좋아하여 궁궐에 많이 심었다하여 연산홍(燕山紅)이라고도 한다. 기록에 의하면 연산군은 궁궐에 만여 그루 이상 연산홍을 심었고, 전국에 명하여 뿌리 채 연산홍을 진상하라는 명을 내렸다. 강희안(姜希顔)의 『양화소록(養花小錄, )』에 세종 23년 대마도 도주 종정성(宗貞盛)이 토산물과 함께 영산홍으로 추정되는 왜철쭉(倭躑躅)을 바쳤는데, 홑꽃이었지만 흔히 보던 겹꽃 철쭉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고 꽃이 오래갔으며 궁중에만 키운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연산군이 전국에 진상하라고 한 꽃은 영산홍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여러 종류의 철쭉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철쭉꽃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 수로부인 향가에도 나오듯이 아주 오래되었다. 미당(未堂)서정주시인은 이를 소재로 「수로부인은 얼마나 이뻤는가?」를 남겼다.

 

그네(韆)가 봄날에 나그넷길을 가고 있노라면

천지의 수컷들을 모조리 뇌쇄(惱殺)하는/ 그 미(美)의 서기(瑞氣)는

하늘 한복판 깊숙이까지 뻗쳐,

거기서 노는 젊은 신선들은 물론,

솔 그늘에 바둑 두던 늙은 신선까지가

그 인력(引力)에 끌려 땅 위로 불거져 나와

끌고 온 검은 소니 뭐니/ 다 어디다 놓아두어 버리고

철쭉꽃이나 한 가지 꺾어 들고 덤비며

청을 다해 노래 노래 부르고 있었네.

-하 략-

 

우리나라에서는 철쭉을 원래 달래라는 이름으로 불렀을 것으로 추측하나, 한글창제 이전의 정확한 발음은 기록에 없다고 한다. 철쭉이란 이름은 중국어 척촉(躑躅)에서 유래되었다. 전래 당시에는 '텩툑'으로 읽었고, 이후 텩튝, 텰듁 등을 거쳐 현재의 철쭉으로 정착되었다. 일본에서도 같은 한자를 쓰며 발음은 츠츠지(つつじ)라고 하는데 진달래와 통칭하여 츠츠지로 부른다. 척, 촉 모두 '머뭇거리다', '비척거리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양(羊)이 철쭉꽃을 먹으면 죽기 때문에 보기만 해도 비틀거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참꽃인 진달래를 제외하고 다른 철쭉꽃의 독성은 벌레로부터 꽃을 방어하기 위해 분비하는 그레이아노톡신이라는 독소 때문이다. 진달래류의 꽃 중에서 꽃잎이 좀 끈적거린다 싶으면 철쭉이다. 꽃과 가벼운 접촉만 해도 피부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보기만 하고 만지는 것은 피해야 한다.

왜철쭉

요즘 전국의 명산들이나 지방자치단체들이 다투어 철쭉축제를 열고 있다. 흔히 3대 철쭉 군락지로 경남 산청, 합천의 황매산, 지리산 바래봉 일대, 소백산 연화봉과 국망봉 일대를 꼽는다. 소백산은 퇴계선생이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서 ‘축융(祝融·전설 속 불의 신)의 잔치에 취한 것같이 매우 즐거웠다’라고 했을 정도로 빼어나다. 소백산에서는 지구 온난화로 줄어드는 철쭉 복원 작업에 무척 힘쓰고 있다한다.

내가 처음 철쭉을 안 것은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이었다. 고향동네에서 참꽃이 가장 많은 벼루골 깊은 곳에 참꽃이 진 후에도 개참꽃이 핀다는 당숙의 말을 듣고 가보니 과연 수달래가 지천으로 펴있었다. 한 아름 꺾어 왔더니 물참꽃은 먹을 수 없다하여 아깝지만 모두 버렸다.

오늘도 정의공주묘를 끼고 내려와 8백년 노거수 은행나무 밑을 지나 연산군묘로 향한다. 세계문화유산이라 잘 가꾸어진 묘역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바라보며 묘 뒷산으로 발길을 옮긴다. 소나무와 굴참나무 숲 속에 기품 있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연분홍 철쭉꽃들이 나비 떼처럼 가득 펴있다. 연산임금은 살아서는 왜철쭉을 사랑했다지만, 죽어서는 왕철쭉 꽃밭에 잠들어 있다. 세종의 이질(姨姪)인 강희안은 『양화소록』에서 꽃을 키우며 관물찰리(觀物察理), 즉 사물에 깃든 이치를 살피는 선비의 공부법을 깨친다고 했다. 세종의 증손자인 연산군도 꽃만 좋아하지 말고 『양화소록』을 잘 읽고 실천했더라면 비극적인 삶을 피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md@mdjourna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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