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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잎 떨어지는 계절에

  • 입력 2022.10.19 11:45
  • 기자명 신종찬(신동아의원 원장/의학박사/수필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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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속이 빈 고목 느티나무 뿌리들이 집채만 한 바위들을 끌어안았지만, 끝내 붙잡지 못한 큰 바위 하나가 굴러 떨어져 두 동강이 나있는 선암골(先岩谷)로 들어간다. 멀리 산언덕에는 오동나무들이 드문드문 자라고 있다. 앵두나무 언덕 한 켠에 노랑해당화가 필 무렵, 고샅길바닥에 보랏빛 통꽃들이 즐비하게 널려 있다. 고개들 들어보면 하늘이 보랏빛이다. 개울둑에 한 뿌리에서 절로 자란 두 그루의 오동나무가 서 있다. 돌다리로 개울을 건너 큰 대문을 열면 수염이 앞가슴을 다 덮은 우리 할아버님께서 사랑방 문을 여신 채 장죽을 물고 계신다.

오동나무만큼 시인묵객들에게 인기 있는 나무도 드물 성싶다. 우리나라와 중국의 이름 있는 문인들은 오동나무를 소재로 한 작품을 무척 많이 남겼다. 고려의 문호 이규보로부터 정몽주, 조선의 성삼문, 서거정, 이 이, 신 흠, 허난설헌, 황진이 등 수많은 시인들이 많은 오동나무 한시들을 남겼다. 현대에 와서도 한용운, 조지훈 같은 시인들이 오동잎을 소재로 빼어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 중에서도 신흠(申欽,1566~1628)의 작품 한 편을 소개해본다.

오동나무는 천년이 지나도 항상 곡조를 간직하고(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로항장곡)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고등학교 1학년 때 한용운 시인의 시 「알 수 없어요」에서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라는 대목을 읽고, 어떻게 이렇게 멋진 시구를 쓸 수 있을까하며 앞으로 꼭 시를 배워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중국에서도 오동나무는 문학의 소재로 많은 사랑을 받아서, “오동나무 잎사귀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천하에 가을이 온 것을 안다(梧桐一葉落 天下盡知秋 오동일엽낙 천하진지추)”고 했다. 또한 천자문(千字文)에서도 “비파만취 오동조조(枇杷晩翠 梧桐早凋, 비파나무는 늘 푸르고 오동잎은 빨리 시드는구나.”라는 대목이 나온다. 비파나무는 상록수이니 늘 푸르고 오동나무는 입추가 되면 고대 시들어 떨어지는 현상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 오동나무는 어찌하여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게 되었을까. 아마도 사람들이 많이 사는 우리나라 중남부 지방이나 중국의 온대지방 어디에나 잘 자라서 흔히 볼 수 있는 점, 잎이 넓은 점, 입추가 지나면 금방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점, 목재가 공명이 좋아 악기의 재료로 많이 쓰이는 점, 그리고 가구재로도 사랑받고 있는 점 등 때문이 아닐까. 여기에다 중국원산인 벽오동나무에만 봉황이 앉는다는 전설 덕분도 꾀 있어 보인다. 벽오동나무는 오동나무와 전혀 다른 과의 나무인데도, 명칭이 비슷한 덕을 보고 있다.

우선 잎을 살펴보자. 잎이 넓으니 그늘이 넓고, 적은 양의 빗방울이 떨어져도 비 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게 해주는 점을 많은 시인들이 노래하고 있다. 5각형인 오동잎은 한국에 자생하는 나무 중에서는 아마도 가장 잎이 넓어서, 보통은 20~30cm이나 넓은 것은 1m에 육박하는 것들도 있다 한다. 가을이 되어 이렇게 커다란 잎들이 미련 없이 뚝 떨어지니, 문인들에게 서경적이거나 심상적 묘사욕구를 자극할 수밖에 없었을 터이다.

출처-네이버 블로그
출처-네이버 블로그

두 번째로 잎이 떨어지는 시기인 가을도, 문인들의 서사적 묘사욕구나 진술욕구를 채워주고 있지 않을까. 오동잎은 입추 무렵이 되면 다른 잎들보다 먼저 떨어진다. 그것도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게 아니고, 푸른 잎들이 약간 검어지며 망설이지 않고 단번에 떨어진다. 떨어진 커다란 잎들은 금방 말라서 바람이 불면 서걱거리며 이리저리 굴러다닌다. 이 광경을 본 문인들은 조락(凋落)의 계절인 가을로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않을까.

다음은 오동나무가 울림이 좋아 예부터 거문고나 가야금 같은 여러 악기의 재료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점이다. 음악을 좋아하는 시인묵객들이 이런 악기들의 재질인 오동나무도 사랑하였기에, 이에 관련된 작품들도 많이 남겼다. 때로는 세력가들이 악기로 만들기 위해 관청이나 서원에 자라던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려다, 불이익을 당하고 심지어 파직되는 경우까지 있었다. 세력가들의 부당한 처사에 저항하던 하급관리는 후세까지 칭송받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이순신장군이 발포 만호로 재임할 때, 직속상관인 좌수사가 심부름꾼을 보내 오동나무를 베어 가려 했다. 거문고를 만드는데 쓰겠다는 말에 이순신은 진(陣)에 있는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니 함부로 벨 수 없다고 심부름꾼을 돌려보냈다. 오동나무는 전함 거북선이나 판옥선의 노가 물에 잘 뜨게 하는 부력장치로도 쓰는 군수물자였다. 지금도 발포진에는 오동나무가 많이 자란다고 한다.

옛말에 "아들을 낳으면 소나무를 심고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라." 라 했듯이, 오동나무는 전통 옷장 재료로도 많이 써왔다. 목질이 가볍고 뒤틀림이 없으며 좀이 쏠지 않고 무늬 또한 아름답다. 여기에다 습기에도 강하며 불에 잘 타지도 않으니 가구재로 사랑을 받지 않을 수 없다. 오동나무는 우리나라와 중국이 원산지다. 일본 오동나무는 울릉도 참오동나무를 수입해가서 개량한 나무로, 이를 이용하여 가볍고 질긴 게다를 만들고 있다.

출처_네이버 블로그
출처_네이버 블로그

오동나무는 빠르면 10년, 늦어도 15~20년이면 키가 10미터를 간단히 넘기고 줄기둘레는 한두 아름에 이른다. 넓은 잎으로 광합성을 많이 하여 단기간에 집중적인 양분 공급으로 급속히 몸체를 불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자라는 나무이기에 경제수림으로도 널리 심고 있다. 한편 빨리 자라다 보니 목질이 단단하지 못하다는 단점도 물론 있다.

오동나무를 잘라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약 40퍼센트의 세포가 양분공급과 저장을 담당하는 유세포(柔細胞)이고 나무의 단단하기에 관여하는 목섬유는 40퍼센트 남짓하다. 비중은 0.3으로 박달나무의 3분의 1 수준이니 수치상으로만 보아서는 푸석푸석한 나무가 되어 쓸모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오동나무는 효과적인 세포배열을 하고 여러 가지 화학물질을 적절히 넣어 자신의 몸을 야무지게 하고 있다고 한다.

오동나무의 아름다운 꽃도 빼놓을 수 없다. 요란하던 봄꽃잔치 끝날 무렵인 5월 말경, 가지 끝에 원뿔모양의 꽃대를 내밀고 손가락 길이만 한 종 모양의 통꽃들이 연보라색으로 펴서 하늘을 덮는다. 통꽃의 끝은 다섯 개로 갈라지며 향기 또한 진하다. 열매가 익으면서 밑으로 늘어지고, 10월경에 끝이 뾰족한 달걀모양으로 껍질이 변하면서 회갈색이 된다. 초겨울에 들어서면서 둘로 갈라지고 안에 들어 있던 수많은 날개 열매들은 겨울바람을 타고 멀리까지 날아간다. 그래서 오동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뜻밖에 만날 수 있는 나무가 되었다. 나무가 없을 것 같은 곳에도 기둥만 높이 자라니, 잎이나 꽃이 져서 길바닥에 떨어져 있지 않으면 오동나무가 있는 줄도 모를 수도 있다.

가을은 떠나는 계절이라 한다. 살면서 시작도 중요하지만 떠나는 것도 무척 중요하다. 떠나는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세계의 출발을 의미한다. 요즘은 정권이 교체되는 시기라 떠나는 자리들이 많다. 사람이 떠나가게 될 때는 자의에 의할 수도 있고 타의에 의해 떠날 수도 있다. 오동잎처럼 구질구질한 변명 없이 깨끗하게 떠나는 사람들이 아름다워 보인다. 오동잎이 떨어진 자리를 자세히 보면, 내년 봄에 싹이 틀 움 자리가 선명하다. 오동잎은 겨울이 아무리 길어도 새봄이 온다는 걸 알기에 깨끗이 떠나는 게 아닐까. 사람들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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