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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성모자상’의 눈매와 눈길

  • 입력 2009.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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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자상(聖母子像)은 제3차 에페소공의회에서 마리아의 신성선고(神性宣告)가 있은 뒤 그리스도교미술에 등장한 그리스도와 마리아에 관한 그림의 한 종목으로 아기예수를 가슴에 안은 성모마리아를 표현하고 있지만, 문제는 모습이 아니라 성모마리아로서의 신성현시(神性顯示)를 목적으로 한 송배의 상이다.


에페소공의회 후에는 각지에서 성모숭배가 생겨났으며 마리아에게 봉헌하는 교회가 차례차례로 세워지고, 성모자상도 벽화로 그려졌다. 5세기의 작품은 남아 있는 것이 없으나 6세기 이후에는 교회벽화나 이콘에는 성모자상의 표현이 많아졌다. 그 표현형식은 입상(立像)인 성모가 왼팔에 그리스도를 끌어안고 있거나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좌상(坐像)의 성모가 무릎에 그리스도를 부둥켜안고 있는 것이 기본형으로 되어있었으며, 성모자상은 장엄한 어머니의 역할이 주로 안내자(호디기트리아), 승리자(니코포이아)라고 하는 뜻으로 화려한 옥좌에 앉은 신으로 표현 되어 매우 준엄한 표정이었으며, 아기예수는 승리자라는 의미에서 손을 든 자세의 그림이 태반이었다.


9세기의 성상파괴운동(Ikonoklasmus) 종결 후에는 다채로운 변화를 나타내어 서유럽의 성모자상은 마리아의 인간적인 우아함을 강조한 것이 그려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첫 작품이 조토(Giotto di Bandone 1269~1337)의 ‘모든 성인들의 마리아(1312)’라는 작품으로 성모자를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그 후 성모자상은 중세의 엄격한 굴레를 벗어나 사람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변하였고, 정면을 보고 딱딱한 자세만을 취하던 것이 다양한 포즈를 취하는 성모자상으로 변했다.
14세기 초의 피렌체파와 시에나파는 인간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당시 풍조에 호응하여 성모숭배에도 인간 본성의 욕구를 받아들여 비잔틴미술의 완고함과 약속적인 도상을 극복하고 성모자의 표현에 인간적이고 정서적인 해석을 가미하여 생생하고 다정한 현실모습을 표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미술에서는 일상의 현실생활에서 볼 수 있는 모자의 모습 그리고 예수의 수난을 예감하면서 원숙한 여성미를 지닌 근심에 잠긴 듯한 감미로운 마리아, 냉엄한 숙명을 냉정하게 기다리는 듯한 무표정한 마리아 등 다양한 마돈나(Madonna, 이탈리아미술에서는 성모자상을 이렇게 표기)의 유형이 생겨났다.
이러한 도상들을 모태로 해서 융성기 르네상스시대에는 문 밖의 풍경을 배경으로 한 성모자상이 많이 등장하게 되였으며 이렇게 변화한 성모자상에서 그 눈매와 눈길의 표현에도 변화가 따랐는데 그 변화를 잘 표현한 화가들의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탈리아의 화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 da Vinci 1452~1519)는 여러 장의 성모자상을 그렸다. 그중에서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성모자상도 있는데 작품 ‘리타의 성모’ (1490~91)이다. 마리아는 아기에게 눈길을 주고 있으나 아기는 젖을 빨면서도 어머니와 눈 맞춤을 하지 않고 딴 곳을 보고 있다. 이미 예시한 모자상, 특히 젖을 먹이는 모자상의 경우는 대부분이 아기는 어머니와 눈맞춤을 하는 것인데 성모자상에서는 눈맞춤이라고는 한 것이 없으며 특히 젖을 먹이는 동안에도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눈길은 다른 곳에 두고 있다. 또한 마리아는 슬픔에 잠긴 냉정한 표정이며 아기도 자기의 장래를 알고 있는지 딴 곳을 보면서 눈에는 힘을 주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레오나르도의 다른 성모자상 작품으로는 ‘성모자와 석류’ (1472~76), ‘카네이션의 성모’ (1475경), ‘마돈나와 십자가를 쥔 예수(1510)’ 등이 있다.
작품의 공통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성모자간의 눈맞춤을 한 것은 한 장도 없으며, 차이라면 성모자가 쥐고 있는 것이 석류(예수가 흘린 핏방울을 상징), 카네이션(순애를 상징), 그리고 십자가라는 차이 뿐이며 그 구도나 성모자의 표정은 대동소이하다. 그중에서 카네이션을 들고 있는 그림의 성모자의 눈매와 눈길이 가장 특징을 잘 표현하였기 때문에 이 그림을 예로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카네이션의 성모’를 그릴 무렵에 레오나르도는 보티첼리와 가까이 지내고 있었기 때문에 성모의 얼굴이나, 색채에 그의 그림과 유사점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성모가 들고 있는 한 송이 빨간 카네이션은 그리스도교적인 순애의 상징이다. 성모는 눈길을 밑으로 깔고 아기의 장래가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아기 예수가 꽃을 잡으려고 손을 뻗치고 있는데 그의 눈은 아기의 눈이 아니라 어른의 눈이며, 눈길은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천정을 보고 있어 그의 장래를 내다보며 아버지 하느님의 의도에 따른다는 결심을 보이고 있다. 오른쪽에는 목이 가는 유리 꽃병이 있으며 그 속에는 화려한 백합꽃이 꽂혀 있다. 백합은 순결을 나타내는 마리아의 상징이며, 배경의 하늘과 산은 하느님이 계시는 세계를 나타낸 것으로 나중에 레오나르도의 작품에 나오는 산의 선구(先驅)라 할 수 있다.
독일의 화가 고사르트( Jan Gossaert 1478-1532)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 (1530경)를 보면 그림의 배경으로 등장하던 금박은 물론, 마리아를 장식하던 왕관도 후광도 사라졌다. 즉 성모는 사라지고 부푼 젖을 내놓은 어머니로 변했다. 그 대신 뒷벽 문틀에 새겨진 ‘참된 신이요 인간, 순결한 어머니요 처녀’라는 글씨로서 성모임을 표현했다.
마리아의 눈길은 왼손에 든 포도송이에 두고 있으나 슬픈 표정이다. 이것은 성찬식에 쓰일 붉은 포도주를 의미하여 앞으로 아기에게 다가올 가혹한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고, 마리아의 오른손이 아기의 옆구리를 쓰다듬다가 엄지손가락 손끝에 힘을 주어 조심스럽다. 그것은 훗날 창끝에 찔려 상처가나 피가 난자할 부위이기 때문이다.
아기예수는 아기라기보다는 어른스럽게 표현되고 오른손에 사과를 들었다. 아담의 죄를 씻기 위해서 고난의 길도 즐거운 운명으로 택하였다는 것이며, 아기의 왼손은 어머니가 든 포도송이 쪽으로 내밀고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펴서 은총의 자세를 만들고 있다. 아기의 눈길은 천당이 있는 하늘 쪽을 바라보고 있는데 이것은 훗날 어머니와 하늘나라에서 만날 수 있음을 의미해 어머니의 슬픔이 덜어질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고사르트의 또 하나의 ‘마리아와 아기 예수’ (1527)를 보면 어머니의 오른손이 아기의 뒷머리를 끌어안고, 아기의 왼팔은 어머니의 목을 감고 있다. 말없이 나누는 대화가 아기의 머리카락을 헤치는 마리아의 부드러운 손길과 뺨을 마주 대고 애무하는 마리아는 훗날 십자가에서 떼어 내린 예수를 입관하기 전에 아들의 시신을 끌어안고 애도하는 마리아를 표현하여 눈길을 밑으로 떨구고 슬픈 표정이다.
아기예수는 오른손에 잘 여문 작은 사과를 쥐고 왼발로 서 있다. 오른발을 뒤로 젖혀서 앞으로 걸어 나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승리의 도상이다. 즉 무덤 문을 열고 나오는 부활 예수의 자세이며 그 눈길은 슬픈 표정의 어머니를 향하고 있어 부활할 것이니 조금도 염려하지 말라는 간절한 눈매이다.
일반의 모자상과 성모자상에서 보는 눈매와 눈길의 차는 성모자간에는 눈 맞춤이란 없다. 심지어는 젖을 먹이면서도 눈 맞춤이란 없으며 그 모자간의 눈길은 공시하는 것이 없으며, 또 공시하는 것 같이 보이나 눈동자를 보면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마리아의 눈매는 언제나 슬픈 것으로 표현되고, 아기 예수는 어른 같은 얼굴에 눈길에 힘을 주고 있어 어떠한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암시하는 눈매와 눈길이어서 성모자상의 가장 큰 특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이렇듯 아기와 어머니는 눈 맞춤과 몸의 접촉과 공시 등의 무언의 언어로서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잘 표현한 작품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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