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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 episode] 얽히고 설킨 인생사 모두 털어버리듯… ‘유정천리’

  • 입력 2009.03.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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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절)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2절)세상을 원망하랴 내 아내를 원망하랴누이동생 혜숙이야 행복하게 살아다오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인생길은 몇 구비냐무정천리 눈이 오네 유정 천리 꽃이 피네 가수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는 노래가 나온 지 올해로 50년이 된다. 하지만 언제 들어도 구수한 맛이 난다. 4분의 2박자의 트로트 곡으로 멜로디가 복잡하지 않고 부드럽다. 노랫말 역시 사뭇 ‘자연’에 가까이 가려는 분위기다. 노래는 얽히고설킨 인생살이보다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조용히 살고 싶다는 마음을 읊조린 것 같다. ‘감자’ ‘수수’ ‘두메산골’ ‘내 고향’ 등의 가사표현에서도 곧잘 드러난다. 1959년 신세기레코드사가 음반으로 내놓은 이 노래는 영화주제곡에서 비롯됐다. 그 때 영화사 대표제작자였던 이종근 사장 요청에 따라 취입됐다. <유정천리>는 박재홍의 <울고 넘는 박달재>와 함께 쌍벽을 이룬 대히트송이기도 하다. 노랫말은 작사가 겸 가수인 반야월 선생이, 곡은 신세기레코드사 문예부장 겸 작곡가였던 김부해 선생이 썼다. 음반 나오자 불티나게 팔려남일홍 감독, 이민자·김진규 주연으로 서울 수도극장에서 개봉된 영화 ‘유정천리’는 주제가 히트와 더불어 한동안 재미를 봤다. 영화가 상영되고 음반이 선보이자 레코드를 사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지금처럼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던 터라 음반이 인기를 끈 것이다. 여유가 있는 집에선 유성기로 음반을 듣는 사람들이 적잖았다.작사가 반야월 선생은 “신세기레코드사의 강윤수 사장(지금은 고인)과 이 노래를 취입한 박재홍의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졌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추억의 히트송 <유정천리>는 그 무렵 정치상황과 맞물려 많은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가요들은 때로 민중의 갈망이나 정치현실을 은근한 풍자와 암시의 수법으로 담아 구체적 내용을 반영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유정천리>가 바로 그런 경우다. 대중들은 1960년 봄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유세 중 세상을 떠났던 해공 신익희 선생의 정치적 불운을 담아 추모곡으로 가사를 바꿔 불렀다. 그해 3월 제4대 정·부통령선거를 며칠 앞두고서였다. <유정천리>가 전국적으로 거세게 퍼져나가면서 대구지역 중·고생들이 바뀐 가사로 노래를 불러대 유행가에 더욱 날개를 달았다는 소문이 나돌았다.(1절)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가도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2절)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춘삼월 십오일 조기선거 웬 말인가천리만리 타국 땅에 박사 죽음 웬 말인가설움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1960년 2월 21일자 동아일보 ‘휴지통’란에 소개된 <유정천리>의 바뀐 노랫말과 관련된 기사는 그 시절 절박했던 사회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바뀐 가사에 나오는 1절의 ‘조 박사’는 야당지도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박사를 가리킨다. 신병치료차 외국에 나갔다가 숨진 것이다. 자유당 말기의 부패상과 새 인물을 기다리던 민심이 애절하면서도 따라 부르기 쉬운 <유정천리> 멜로디를 타고 쌓여왔던 감정의 응어리들을 마구 쏟아냈던 것이다.노래를 둘러싼 얘기와 민초들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자 정부당국엔 비상이 걸렸다. 교사들은 상부로부터 책임추궁을 당할까봐 학생들의 호주머니를 뒤져가며 가사 적은 쪽지를 찾아내기에 혈안이었다. 3·15부정선거와 마산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부정선거 규탄데모로 결국 세상은 뒤바뀌었다. 그러고 얼마 뒤 4·19로 자유당정권이 물러나자 이번엔 후반부 가사를 ‘…민주당에 꽃이 피네 자유당에 비가 오네’로 바뀌면서 민주정권 수립의 기쁨을 노래했다. 가수 박재홍 조차 개사된 노랫말로 노래할 정도로 바뀐 가사의 <유정천리>가 크게 유행했다.개사는 누가 했는지 지금도 알 수 없다. 국민들 마음이 그 쪽으로 모아져서 됐을 뿐이란 추측이다. 시대를 표방하는 가요치고 이처럼 파란을 겪은 노래도 드물다. <유정천리>는 윤보선 대통령이 살아 있을 때 자주 불렀던 애창곡으로도 유명하다. 작사가 반야월 72년 가요인생노랫말을 쓴 작사가 반 선생은 1917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93세다. 그는 우리 가요사의 백과사전이요 산 증인이다.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과 함께 ‘우리나라 가요계 3대 보물’로 일컬어진다. 72년 가요인생을 맞고 있는 그는 5000곡에 가까운 노래를 만들어냈다. 특히 생존 가요인으론 가장 많은 노래비를 갖고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 ‘단장의 미아리고개’, ‘만리포사랑’, ‘소양강 처녀’, ‘삼천포아가씨’, ‘내 고향 마산항’ 등 10여 개에 이른다. 경남 마산 태생인 그의 본명은 박창오(朴昌吾). 1939년 조선일보와 태평레코드사가 주관한 전국가요음악콩쿠르에서 1등으로 뽑혀 가수생활(예명 진방남)을 시작했다. 1940년 <불효자는 웁니다>로 일약 스타가 됐다. 이듬해엔 <넋두리 20년>, <꽃마차>를 연달아 히트시켰다. 1942년엔 작사가 ‘반야월(半夜月)’로 또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 달이 차면 기울 듯 이왕이면 곧 일그러질 보름달보다 점점 커질 반달이 희망적이란 뜻에서 ‘半夜月’로 했다. 이밖에 추미림, 박남포, 남궁려, 금동선, 허구, 고향초, 옥단춘 등의 예명으로 암울했던 시절을 노래했다.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 한국연예협회 창작분과위원장, 한국 음악저작권협회 이사를 지냈다. 한국가요반세기 작가동지회, (사)한국가요작가협회 원로원 의장으로 활동 중이다. 서울 강서구 등촌동 집에서 부인 윤경분(86) 여사와 지내고 있다. 슬하에 2남 4녀를 뒀으며 대부분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둘은 잠시 가수로 활동하다 지금은 직장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