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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화 같은 삶을 실천하는 ‘흰 가운의 신사, 고성건 박사’

인술 반평생, 이제는 행복한 예술의 길을 걷다!

  • 입력 2010.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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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L]

패션과 문화, 그리고 예술의 거리 청담동, 조금만 눈을 돌려도 쉽게 갤러리를 만날 수 있는 그곳에서 아주 특별한 전시회가 열렸다. 지난 12월 7일부터 13일까지 ‘갤러리 피그’에서 열린 ‘제2회 Double eye 전시회’가 바로 그것이다. 단지 그림이 좋아서 모인 사람들, 나이도 다르고 직업도 다르지만 단지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순수창작전시회. 그리고 그곳에 반평생동안 의술을 통해 인술을 실천해온 고성건 박사가 있었다.

빈틈없으면서도 올곧은 성품 그림에서 묻어나

기자가 ‘제2회 Double eye 전시회’가 열린 ‘갤러리 피그’를 찾은 날은 지난 11일 늦은 3시. 아마추어 동우회 특유의 과장되지 않은 순수함이 엿보이는 20여 점의 작품이 클래식 음악의 선율과 어우러져 마음껏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눈의 호사를 즐기며 그림을 감상하고 있을 무렵 누군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오늘 만나게 될 바로 고성건 박사였다.

일흔이 넘은 나이, 하지만 고 박사는 ‘의료계의 멋쟁이, 흰 가운의 신사’라는 별명처럼 예전과 전혀 변함없는 모습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니 예전의 모습에 세월을 더해 더욱 기품을 더한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노신사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가득해 보였다.

[2R]“아니 짧은 재주로 그려본 그림을 걸어 놓은 건데, 굳이 찾아오시기까지 하니 이거 기자님 보기가 송구스럽습니다. 현직 선생님들 가운데에서도 그림 잘 그리시는 분은 얼마든지 많을 텐데요…”하며 겸연쩍은 듯 첫 인사를 건네는 고 박사. 그렇게 깍듯이 예우를 갖춰주는 모습에 오히려 당황스러운 것은 고 박사보다도 한참이나 어린 우리 기자일행이었다.

과연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고 했던가, ‘신사’라는 호칭은 그냥 붙여진 것이 아니었다.

그런 고 박사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4년, 부인 의 권유로부터였다.

“퇴직하고 집에서 영감들 얼굴 보기가 귀찮았는지 어느 날 이 사람 동창 남편분이랑 함께 그림 동우회에 가입을 시켜놨지 뭡니까. 뭐 평생 환자만 보던 사람이 그림을 알겠습니까.

그래도 한번 해보자는 생각에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죠”라며 너스레를 떠는 고 박 사, 하지만 그 표정은 한없이 밝기만 하다. 

본인 말로는 그저 부족한 실력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동호회를 시작한 알파 갤러리와 율 갤러리를 통해 이미 세 번의 전시회를 가졌고, 이번 Double eye까지 두 번을 합치면 이미 다섯 번째 전시회를 가진 베테랑 화가다.

그렇다고 고 박사가 늘 자신의 그림에 만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이라는 게 나처럼 꼭 저렇게 있는 그대로만 그리는 게 아닙디다. 꼭 보이는 대로가 아니라 이렇게도 표현해보고 저렇게도 표현해보고 하는 게 그림이더라 이겁니다.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리라고 하면 그건 하겠는데, 그걸 다르게 그려보라고 하면 그건 영 아니올시다 거든. 거참, 그림이라는 게 그리면 그릴수록 더 어려워지니 큰일입니다.”

이것이 한 시대를 풍미하며 명의(名醫)로 이름을 날리던 고 박사의 가장 큰 고민이다.

그러자 옆에 있던 송재록 교수가 일갈(一喝)한다.

“아, 그거야 고 박사가 몇 십 년 동안 의사생활을 하다 보니 자연히 몸에 밴 것이 아니겠어. 그림도 성품 따라 간다는 말 모르시는가. 의사라는 직업이 어디 건성건성 대충대충 해서 되는 일인가. 1센티 1미리도 오차가 있으면 안 되는 그런 일인데, 그러니 고 박사가 마치 사진을 옮겨 놓은 듯한 그런 그림을 잘 그리는 것 아니겠어. 그것도 재주지, 그럼 정말 대단한 재주다마다.”

듣고 보니 정말 일리 있는 말이다. 교수생활만 33년, 거기에 인턴과 레지던트 시절까지 합치면 40년인데, 어찌 그 세월이 적다할 수 있을까. 그러고 보니 고 박사의 그림에는 빈틈없으면서도 올곧은 그의 성품을 그대로 닮아있다.

호랑이를 만들려던 소년, 세상을 구하는 용이 되다

잠시나마 고성건 박사를 지켜보자니 잠시도 얼굴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고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렇게 무골호인(無骨好人)같은데 어찌 고되고 고된 의사생활을 해 낼 수 있었을까. 그것도 힘들고도 힘든 비뇨기과를 말이다.

“어렸을 땐 의사가 꿈이 아니었지. 그때는 의사 간판 걸면 다 도둑이라고 했어. 그런데 우리 집안에 의사가 많다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지. 따지고 보면 다 하나님의 뜻이겠지요. 원래는 기초과학을 공부하고 싶었죠.”

1936년 평양에서 태어난 고 박사는 엄한 아버지를 만난 덕에 소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천자문부터 익혀야 했다. 학교에 들어가니 한글보다 한문에 더 능통한 고 박사에게 학급 동무들이 친절하게도 붙여준 별명은 ‘간판장이’였다. 더 멋있는 말도 많았을 텐데, 하긴 여덟 살배기 조무래기들에게는 그것도 굉장한 작명이었으리라. 하지만 한문은 고 박사의 삶에 한 부분이었을 뿐, 사실 꿈은 화공과에 가서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3R]“학교 다닐 적에 보니 탄소, 수소, 산소가 몇 개씩 조합이 되었나에 따라 알코올도 되고 에탄올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걸 잘 연구를 하면 휘발유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때는 내 얘기를 들으면 다들 웃더군요. 하지만 요즘 보니 브라질에서는 옥수수를 가지고 에탄올도 만들고, 사탕수수를 발효시켜 바이오 디젤을 만든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만약 의과대학이 아니라 화공과에 갔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사실 제가 결과가 어떻게 되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성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꿈은 호랑이를 만드는 것이었지만, 못해도 고양이 정도는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호랑이를 만들려던 소년, 하지만 부모님과 주위의 권유로 의과대학에 가게 된다. 그리고 그 소년은 수많은 사람을 병마와 죽음에서 건져 올리는 의사가 되었다. 이른바 대한민국 비뇨기과의 한 획을 그으며 세상을 구하는 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정년 전 교수시절에는 호랑이만큼이나 무서웠던 선배요 선생님이었다고 하니, 호랑이를 만들겠다는 꿈을 아예 못 이룬 것은 아니었나보다. 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저렇게 사람 좋아 보이는 고 박사 앞에서는 나는 새도 찍소리 내지 못했다는 것.

“내가 무서웠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야. 내가 생전 화 한번 내지 않았는데 말이지. 무슨 오해가 있었던지 아니면 내가 아닐 거야”라며 또 웃는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듯이 고 박사도 잘 알고 있다.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일에 결코 약간의 모자람이나 부족함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조금이라도 그런 것이 보이거나 느껴지면 자신을 절대로 가만 놔두지 않는, 기어코 완벽하게 만들고야 마는 고 박사의 성품을 말이다. 그렇게 진정한 용의 모습을 고 박사는 후학들에게 각인시켜 준 것이다.

 

한 점 유화 같은 인생으로 끊임없이 노력하고 살고파

이번 전시회가 끝나면 또 다시 고성건 박사는 바빠지게 생겼다.

바로 내년에 있을 개인전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선생님 개인전도 준비하셔야죠”라는 이 한마디에 “아, 그럼요, 내년이면 볼 수 있을 겁니다”라며 고 박사보다 그림 동기인 송재록 교수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선다.

그러자 고 박사가 “무슨 소립니까, 아직 개인전 하려면 한참 멀었죠. 제가 개인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웃겠습니다”라며 성급히 손사래를 친다.

하지만 사실 고 박사도 마음속으로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미 그 전부터 주위에 성화가 자자했기 때문이다.

“사실 금년에 하려고 했는데 준비기간이 짧아서 못했습니다. 또 그림이라는 것이 언제까지 꼭 해야 한다는 의무와 책임이 없으면 나태해지기 쉽더라고요. 그래서 기왕 그리는 거 열여섯 점 정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는 게 다 내 주장대로 사는 것도 아니고, 고집대로만 살 수 없는 게 아니겠습니까. 때로는 아우성을 치더라도 주위에 말도 듣고 해야죠”라며 또 웃어 보인다.

“저는 주로 유화를 그립니다. 나처럼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좋습디다. 한번 그린 그림 위에 또 입혀도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고치기도 하고 긁어 낼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런 유화는 사실 완성작이라는 게 없는 셈이죠. 우리 사는 것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래 살았다고 다 완성한 것도 아니고, 나이가 먹어도 고칠 것은 고치면서 살아야죠. 거기에 또 모르는 것은 배우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발전하는 그런 것이 우리네 삶인 것 같습니다.”

인생이라는 캠버스 위에 겸손과 웃음으로 아름다운 행복을 그리는 고성건 박사. 그의 가슴속까지 감동으로 전해오는 유화 같은 삶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은 비단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 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2010년에 있을 고성건 박사의 개인전이 더욱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