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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의 시작을 알리며

  • 입력 2023.01.17 12:00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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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2023년 계묘년(癸卯年) 새해가 밝았다. 올겨울은 유난히도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지는 날이 길었다. 북쪽의 찬공기를 막아주는 제트기류가 기후변화로 인해 세력이 약해지며, 한반도로 유입되는 북극의 한파가 더욱 강하게 불어오기 때문이라고 한다. 게다가 이 한파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하는 블로킹 현상으로 더욱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것이라 하니 마치 북유럽에 온 듯하다.

Lewis Carroll의 초판본에 실린 삽화
Lewis Carroll의 초판본에 실린 삽화

올해의 상징인 토끼는 예로부터 동서양의 동요, 동화, 그리고 민담과 설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 중 하나이다. 고대 인도의 불교설화집인 본생경 자타카(Jatak)의 용원설화와 우리나라의 <구토지설(龜兎之說)>에서부터 영국의 작가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의 시계토끼까지 토끼는 동서양에서 스토리텔링의 소재로 자주 사용되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삼국사기<구토지설>은 판소리 <수궁가>와 개화기 소설 <토의 간>의 원형설화로 알려져 있다.

 

동서양 문화권에서의 토끼

또한,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달에 토끼가 살고, 계수나무 아래에서 떡방아를 찧는다는 이야기가 민담으로 전해오며 민화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밤하늘의 달을 보노라면 바다가 만든 음영으로 어떤 모양처럼 보이는데 이것을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주로 토끼(옥토끼)로 보았다. 이 옥토끼 떡방아 설화가 우리나라에 언제 유입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를 언급한 문헌은 고려시대부터 기록으로 등장했다고 한다.

서양에서는 특히 판타지 소설에서 토끼가 자주 등장하는데 아마도 다다를 수 없는 어두운 하늘에 밝게 뜬 달이 신비함을 상징했기 때문일 것이다. 루이스 캐럴(필명이며, 작가의 실명은 Charles Lutwidge Dodgson이다)1865년 작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시계토끼에게서도 그러한 캐릭터의 특징이 보인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의 수학교수였던 캐럴은 크라이스트 처치 단과대학의 학장(Dean)인 헨리 리들(Henry Riddle)과 친해지며 그의 자녀들과 보트 여행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여행 중 아이들에게 동요, 동시를 즉석에서 패러디하며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이후 작가가 전하고자 하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이야기들을 편집하여 책으로 출판한 것이 바로 환상의 세계를 모험하는 소녀의 이야기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로 완성되었다.

작중 시계토끼는 이상한 나라에서 주인공인 앨리스를 이끄는 역할을 한다. 시계토끼가 앨리스를 인도한 곳에는 토끼굴이 있었는데, 그 굴의 끝에는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방이 있었고 이곳이 바로 환상과 같은 세계로 이어지는 곳이었다. 이 작품의 인기와 함께 영미권에서 토끼 굴 속으로(into the rabbit hole)’라는 표현은 초현실적인 상태 혹은 상황에 처한 것을 뜻하는 관용어로 쓰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캐럴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삽화도 직접 손으로 그릴 정도로 작품에 대한 애정이 깊었고 출판 시에는 당시 영국 잡지 <펀치>의 시사만화가였던 존 테니얼(Sir John Tenniel, 1820-1914)의 삽화로 대중들에게 소개되었다.

 

현대오페라의 새로운 시도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아동뿐만 아니라 성인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으며 아동 문학의 대표작품 중 하나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러한 세계적 인기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 인식되면서 이를 소재로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되었다.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무대 ㅣ이미지출처 ARKO 홈페이지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무대 ㅣ이미지출처 ARKO 홈페이지

바로 한국의 작곡가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Alice in Wonderland)>이다. 이 작품은 2005년 당시 LA 오페라의 음악감독이자 작곡가 진은숙의 후원자인 지휘자 켄트 나가노(Kent Nagano)의 의뢰로 3년만에 완성된 작품이다. 2007630, 200년 이상의 역사를 지켜온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유럽의 그 어느 지역보다 보수적인 이 지방의 대표적인 극장에 한국 작곡가의 신작 오페라가 초연된 것은 큰 의미가 있다. 126년 페스티벌 역사상 개막작으로 오른 최초의 현대오페라이자, 280년 바이에른국립극장 사상 최로로 공연된 여성작곡가의 오페라 초연으로 눈길을 끌었으며, 독일의 공영방송 ARD는 초연 실황을 생방송으로 중계하기도 했다.

또한, 대부분 독일인들에게 인기있는 오페라가 바그너류의 신화나 전설과 관련된 것과 달리, 이 작품은 영국의 동화를 기반으로 하였고, 보수적인 이곳에서 독일어가 아닌 영어로 작성된 대본의 오페라를 선보였다는 점도 신선했다. , 한국 작곡가의 작품에 중국계 미국인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 Hwang)의 대본, 그리고 일본계 미국인 지휘자인 켄트 나가노의 지휘로 역사 깊은 바이에른에서 초연된 것이다.

초연 당시 연출가는 독일 출신의 아힘 프라이어(Achim Freyer)가 맡았는데 당시 인터뷰에서도 밝힌 것과 같이 작곡가의 음악적 의도와 연출이 일치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때로는 가면을 쓴 채 노래하기도 했고, 45도 기울어진 무대의 연출로 표현의 자유에 제약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대를 장식하는 요소들에는 배우들이 그 역할을 했는데, 대형 설치물을 검은 옷을 입은 연기자들이 몸에 걸친채로 무대효과를 주었다. 그중 인상적인 한 장면은 제각기 다른 토끼의 가면을 쓴 연기자들이 무대의 상단에 위치하며 기존 오페라의 합창단이 하는 역할을 대신한 것이다.

2015년 새로운 연출가 네티아 존스와 LA 필하모닉의 무대 연출 ㅣ이미지출처 The New York Times
2015년 새로운 연출가 네티아 존스와 LA 필하모닉의 무대 연출 ㅣ이미지출처 The New York Times

초연 이후 스위스 제네바 등 세계 여러 곳에서 공연됐고, 미국에서는 2012년 세인트루이스 오페라가 초연했다. 또한, 영국 출신의 네티아 존스(Netia Jones)로 연출자를 바꿔 그가 연출, 의상, 조명, 디자인을 총지휘하며 20152LA 필 프로덕션과 함께 무대에 올렸고, LA 공연 이후 세미 스테이지 규모로 수정하여 201538, BBC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함께 런던 바비컨 센터(Barbican Centre)에서 영국 초연되었으며, BBC Radio 3를 통해 생중계되었다.

이처럼 동아시아 문화권에서는 설화와 민담, 민화로, 서양에서는 하나의 소설이 삽화가 되어 동화로 인기를 끌고, 시각적 요소를 입힌 오페라까지 확장되면서 하나의 콘텐츠 소재는 무한하게 변형되고 확장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2023년 새해 장수와 영리함의 상징인 토끼처럼 생동감 넘치는 시작을 엠디저널과 함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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