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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필드 할아버지

  • 입력 2023.01.20 11:51
  • 수정 2023.01.20 12:33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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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누구인가 매일의 생활을 눈송이처럼 살려고 했다. 순간으로 왔다 사라지는 눈송이처럼 ‘현재’ 를 살아내라고! 형태가 각기 다른 눈송이처럼 독특하고 색다른 매일을 살라고! 눈송이처럼 깨끗하고 두 번 다시 되풀이 없는 고유한 삶을 살라고!

스코필드 박사 (석호필)
스코필드 박사 (석호필)

며칠 전에 캐나다 토론토에 계신 고마운 분이 부쳐준 소책자 <한국인을 사랑한 캐나다인, 닥터 스코필드>를 받았다. 한국식 이름 ‘석호필’ 을 좋아한 닥터 스코필드를 만난 것은 철부지 중고등학생 때였다. 그는 내가 태어나기 오래 전인 1916년에 캐나다 선교회에서 파견된 의료선교사로서 한국에 도착했다고 한다. 수의사 출신인 그는 세브란스 의과대학에서 세균학 강의를 하며 한국어를 익혔고, 일제 하에서 신음하는 한국인들을 사랑했다. 기미년 운동의 33인 중의 한 분인 이갑성 옹의 부탁으로 31 운동의 장면들을 위험을 무릅쓰고 촬영했다. 구두 밑창에 몰래 감추어 가지고 나간 이 사진들로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했고, 한국인의 독립의식도 알렸다. 결국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한국을 떠나야 했다. 모교인 토론토 대학에서 교수직을 은퇴한 후 그는 70세가 가까워지는 나이에 다시 이승만 정부의 초청으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 땅에 묻히리라는 약속을 하며∙∙∙.

호랑이 같은 직언으로 부패한 정부를 질책하면서도, 나 같은 어린 철부지들을 침실에 모아 앉히고 밤낮으로 공부시키며 희망을 불어넣어 주셨다(19살에 앓은 소아마비로 팔, 다리 한쪽씩이 마비됐던 그는 거동이 불편해 위층 침실이 서재 겸 모임터였다.)

매일의 생활을 눈송이처럼 살라!

60년도 초반의 서울에는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어가는 시민과 1등으로 입학하고도 등록금이 없어 쩔쩔매는 가난한 젊은이들이 넘쳤다. 이들을 몰래 도와주는 스코필드 할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열심히 영어 주기도문만 외웠다. 그 길 밖에는 내가 그분께 감사를 표할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쉽게 감격하고 울기 잘하는 것 외에는 별 특징이 없던 나에게서 할아버지는 무엇이 보았던지 의사의 실을 권했다. 희곡과 시조 쓰는 데에만 열을 올리던 나와 부모님을 설득하느라 노력하시던 그분의 모습이 내 머리속에 늘 살아있다.

요즈음 주위 친구들이 가끔 은퇴 얘기를 한다. 이제 제2의 성인기를 지나가며 앞으로 살 날의 지도를 그려본다. 과거의 세대보다 훨씬 길어질 여정이니 우리 세대의 향해도는 베낄 수 없는 모델이 없다. 그래서 스코필드 할아버지의 ‘은퇴 후 삶’ 의 모습이 자꾸 거울처럼 비추어지나보다. 그분은 오전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감한 노년의 모습을 내게 보여줬다. 화도 많이 내고 실망을 한 적도 많았지만 그는 한 번도 무료하거나 안이한 적은 없었다. 그는 남에게서 도움이나 사랑을 받으려고 기다리는 대신에 먼저 배풀었다. 그리고 그들의 자존심을 존중해 주셨다. 그래야만 나중에 다른 사람들을 존중할 줄 알고, 사랑의 빚을 갚을 테니까.

그는 또한 강인한 적응력을 나에게 가르치셨다. 가난 때문에 고국 영국을 어나 이민한 캐나다. 그곳에서 소망했던 학문을 성취했고 자신의 꿈대로 제3의 나라 한국 땅에 묻히기까지 온갖 시련을 겪으셨다.

성숙한 노년기를 지나는 동안 도전정신과 적극적인 삶 그리고 적응의 모습을 종교의 힘과 함께 보여준 인생의 선배, 호랑이 할아버지의 명목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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