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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강나무 꽃, 땅이 꺼질 듯이 아찔한 꽃

  • 입력 2023.04.17 17:29
  • 기자명 신종찬(시인, 수필가, 의학박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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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높이 솟은 홍살문을 옆으로 헌인능(憲仁陵) 산책길을 따라 걷는다. 지난 가을 터질 듯이 부푼 붉은 열매들이 풍성하던 백당나무, 참빗살나무 열매들은 겨울을 지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른 봄이라 얼어붙은 개울도 양지쪽은 조금씩 녹기 시작하고 있다. 눈이 모자라게 높은 늘름한 적송 곁에서 한 소녀가 봄이 왔다고 연노랑 옷고름을 풀어헤치고 있는 중이다. 부푼 젖가슴을 도저히 가눌 수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 산자락의 이른 봄은 연노랑 생강나무 꽃으로 시작한다. 봄이면 산수유나 매화가 맨 먼저 핀다고는 하지만, 모두 중국에서 들여온 나무들이고 산천에 자생하는 우리 고유종으로는 생강나무 꽃이 가장 먼저 핀다. 겨울이 아직 완전히 물러나지 않았지만, 산골 개울에 얼음이 녹기 시작하면 매끈한 회색빛 생강나무 가지 끝이 녹색으로 변한다. 이때 가을부터 준비하고 있던 꽃눈들이 부풀어 뽁은 콩처럼 눈이 터지기 시작한다. 마침내 붉은 갈색 껍질을 벗고 연노랑 꽃이 생강 향을 흩날리고 피어나면, 일찍 잠이 깬 벌, 나비들에겐 더 없이 소중한 아찔하게 반가운 꽃이 된다.

단편소설 동백꽃/김유정에서 그리고 뭣에 떠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푹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라 하고 있다. 여기서 소설 속 주인공인 점순이와 나는 바로 이른 봄에 만개한 꽃을 만난 벌과 나비처럼 아찔한 첫사랑의 경험을 하고 만다.

여기서 노란 동백꽃이란 바로 생강나무 꽃을 말한다. 꽃이 붉은 동백나무는 중부이북의 추운 곳에서는 살 수 없다. 귀한 머릿기름 등으로 쓰였던 고급 기름인 동백 씨 기름 대신에, 동백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에서는 생강나무나 때죽나무 열매로 짠 기름을 대신 사용하였다. 그래서 생강나무를 쪽동백이라 불렀다. 애절하고 구슬픈 가락인 정선아리랑에서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 좀 건네주게. 싸리골 올동백이 다 떨어진다에 나오는 싸리골 올동백(또는 올동박)도 바로 생강나무다. 아름다운 생강나무를 소재로 한 귀한 한시(漢詩) 한편을 소개한다.

 

바람은 싸늘하게 옷소매로 파고들고(獵獵風迎袖 렵렵풍영수)

햇볕은 다스하게 얼굴을 녹여주는데(熙熙日炙顔 희희일자안)

돌다리 북쪽으로 비스듬한 길 걸어(斜行石橋北 사행석교북)

버들 숲에서 잠시 쉬노라니(小憩柳林間 소게유림간)

가는 물줄기 소리 없이 지나가고(細水無聲過 세수무성과)

득의에 차 돌아오는 그윽한 새소리들(幽禽得意還 유금득의환)

그늘진 벼랑에도 빙설이 다 녹는데(陰崖氷雪盡 음애빙설진)

벌써 보이는구나, 생강나무 꽃무늬(已見蠟梅斑 이견납매반) -西郊晩步/澤堂先生-

 

아직 바람은 차지만 햇볕은 따사로워졌다. 개울가 막 움이 트기 시작한 버드나무 아래 쉬노라니, 벌써 얼음이 녹아 가는 시냇물이 소리 없이 흐르고 짝을 찾는 새소리는 득의에 차 드높다. 얼음 녹아내리는 언덕에는 벌써 생강나무가 연노랑 꽃망울을 터뜨렸다. 택당(澤堂) 이식(李植)선생은 조선 4대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컫는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국란을 몸소 겪은 심정을 많은 작품들로 남겼다. 이 시가 돋보이는 점은 옛 한시에서 흔히 보이는 중국의 유명한 고사(古事)나 시 구절을 인용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우리강산 정경의 심상(心象, image)을 파노라마처럼 잘 그려내고 있다는 점이다. 현대시로도 훌륭해 보인다. 대가(大家)가 되면 이렇게 자신의 고유한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고나 할까. 납매(蠟梅)란 바로 생강나무다.

생강나무(Korean spicebush)는 한자로는 황매목(黃梅木), 단향매(檀香梅) 또는 납매(蠟梅)라 하고 새앙나무, 생나무, 아위나무라고도 한다. 생강나무는 한국, 중국, 일본에 자생한다. 높이는 사람 키만큼 자라며 굵기는 어른 팔뚝만큼 자란다. 얕은 산자락에서부터 깊은 산속까지 널리 분포하며, 봄에 가장 일찍 꽃을 피우면서 눈에 띄기 시작한다. 진달래보다 거의 한 달이나 먼저 피어 온통 잿빛인 산골에 노랑나비들이 날아다니는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마침내 연분홍 진달래가 피면 서로 어우러졌다가 진달래보다 먼저 진다.

흔히 생강나무와 산수유나무를 구분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봄이라면 꽃자루가 상대적으로 길면 산수유이고, 꽃자루가 거의 없이 나뭇가지에 붙어 있으면 생강나무다. 산수유 꽃은 노란 편이고 향기가 진하지 않으며, 생강나무 꽃은 초록빛이 나는 연노랑이고 상큼한 향기가 진하다. 잎이 갸름하면 산수유이고, 잎이 둥글면 산수유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나뭇가지 표면이 덕지덕지하면 산수유이고, 매끈하면 생강나무이며, 가지를 꺾어 생강향이 나면 생강나무다.

한여름 동안 생강나무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큰 나무들 밑에서 주변과 어울리며 지내다가, 가을이면 다시 그 존재를 확실히 드러낸다. 노란색으로 물든 생강나무 잎들은 단풍나무, 복자기나무, 붉나무 등 붉은 단풍들과 어우러져 울긋불긋 가을 산을 수놓는다. 만약 낮은 곳에서 생강나무들이 노랗게 배경을 만들지 않고 붉은 단풍들만 있다면 얼마나 단조롭겠는가. 이렇게 생강나무는 다른 나무들이 한창일 때는 조용히 있다가 필요할 때 나타나는 우리 산하에 꼭 필요한 나무다.

생강나무는 향기롭고 독이 없는 나무다. 열대, 아열대 식물인 생강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양념으로 쓰였다고 한다. 어린잎은 작설차로 먹고 잘라낸 가지도 끓여서 차로 마신다. 녹두만한 크기의 새카만 생강나무 열매 기름은 향기로울 뿐만 아니라 불을 밝히면 그을음이 나지 않아 귀한 손님이 올 때 등유로 썼다고 한다. 이렇게 쓸 곳이 많은 나무이기에 유명한 산의 출입구 길가 노점에, 생강나무 가지를 다발로 묶어 팔고 있는 장면을 대할 때면 좀 애처로워 보인다. 인간에게 이로운 일밖에 한 일이 없는데 저렇게 마구 잘려서 팔리기를 기다라는 신세이구나. 애처로운 마음에 생강나무에게 시 한 편 바친다.

 

알싸한 향이 부른다

봄맞이 나선 이는/ 얼음 밟으며 산길을 재촉한다

 

아름드리나무들도 모두 잠자고 있는데

비탈의 낙엽들도 모두 잠자고 있는데

잎도 피지 않았는데/ 벌써 파랗게 물오른 가지 끝

연노란 꽃눈들이 터지는데

허공으로 연노란 향기들이 마구 튀는데

벌 나비들도 모두 연노랗게 젖는데

내 눈도 연노랗게 젖는데

 

파르르 떨며 피는 연노랑 꽃에게 물어본다.

금박(金箔) 옷고름만 풀어헤치면 봄이 다 된다더냐?” <생강나무/신종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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