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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medicine] 애무와 포옹의 몸짓언어

  • 입력 2010.01.01 00:00
  • 기자명 emddai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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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몸과 마음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 이것을 심신일여(心身一如)라는 말로 표현된다. 사람이 긴장하고 있을 때는 몸의 근육 특히 어깨와 얼굴의 표정근이 굳어지며 반대로 기분 좋을 때는 근육이 이완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심신일여의 증거이다. 따라서 사람의 몸에 손을 대보면 그 감으로 그 사람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으며 또 와 닿는 사람의 손길에 의해서 그 사람의 마음의 진실이 전해지는 것이다.

사람에게 애정 어린 손으로 접촉하는 것을 애무(愛撫, endearment, caressing, petting, necking)라 한다. 사람은 애무됨으로 안도감이 생겨 불안이나 고독감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모자간의 애무는 사람의 기본적인 신뢰관계를 전하는 역할을 하며, 부부나 연인간의 애무는 말 이상의 사랑을 전하는 힘을 지녔다. 따라서 애무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을 전할 뿐만 아니라 용서라는 관대한 마음의 표시가 되기도 한다. 이제 애무가 용서나 사랑스러운 마음의 전달을 표현한 그림이 있어 이를 보면서 설명하기로 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아’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 (Rembrandt Harmensz van Rijn 1606-1669)의 ‘돌아온 탕아’(1659-69)라는 작품은 그의 생애의 말기 10년에 거쳐 자기의 참회를 표현하기 위해서 그린 그림이다. 아버지의 품을 벗어나 자유롭게 살기위해 미리 받은 유산을 갖고 집을 나가 이리 저리 탕진한 아들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빈다. 늙은 아버지는 잃어버렸다고 통탄하던 아들이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겨 구부러진 허리로 그를 감싸 안고 그의 어깨에 손을 대고 애무하며 용서한다는 마음을 전한다.



무릴료의 화장실


스페인의 화가 무릴료(Bartolome Esteban Murillo 1617-1682)는 원숙하고 자유로운 느낌을 주면서도 일상생활의 감정의 진실이 잘 나타나는 소년과 거지, 방탕한 자식, 농부의 아들 등의 그림을 그려 유명해 졌는데 그중에서 ‘화장실’(1670-73)이라는 그림을 보기로 한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불결한 환경 때문에 병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우려마저 자아내게 하는 그 당시의 실태를 잘 묘사하고 있다. 그림 ‘화장실’은 어린이는 빵을 먹고 있으며 강아지가 어린이의 허벅지에 앞다리를 올려놓고 빵을 달라고 조르고 있어 어린이가 달래고 있다. 할머니는 어린이의 머리를 가르며 머릿니를 잡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생활 속에서도 할머니는 손자가 사랑스럽기만 한 듯이 머리를 어루만지며 애무하고 있다. 이렇듯 애무란 지적 교류가 아니라 정서적 교류이며 진실된 마음이 숨김없이 전달됨을 잘 표현하고 있다.



사람들이 만났을 때 악수를 교환하는 것은 가장 흔히 보는 신체접촉으로 앞으로 친해 보자는데 서로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의사교환이다. 애인들 사이에는 손을 잡고 걷는다. 그러한 단계가 지나며는 서로가 포옹(抱擁, embrace, hug, cuddle, hold)이라는 신체접촉을 하게 되는데 포옹은 손을 잡고나 악수하는 것 보다 몸이 접촉하는 면적이 넓어지며 그 거리도 단축되다가 마침내는 밀착하게 되어 신체가 융합(融合)됨을 느끼게 한다. 세게 포옹할수록 융합의 감각은 강해져 단지 피부의 경계가 있으니 두 개체임을 구별할 수 있을 정도가 된다.



[1R]부그로의 ‘프쉬케와 에로스’


이러한 포옹의 장면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는 화가 부그로(Adolphe William Bouguereau 1825-1905)가 그린 희랍로마신화에 나오는 ‘프쉬케와 에로스’(1889)를 주제로 한 그림이 있다.



아름다운 처녀 프쉬케(Psyche)와 사랑의 신 에로스(Eros)의 사랑이야기는 기원 2세기경의 로마의 시인「아풀레이우스」가 쓴 것인데 이 신화는 매우 아름다운 얘기여서 유럽에서는 자고로, 멀리 가버린 남편이나 애인을 찾아 헤매는 여인상을 그리는 대표적 줄거리로 되어있다.



사랑의 신 에로스를 로마에서는 아모우르(Amor) 또는 큐피드(Cupid)라고 부르기 때문에 에로스, 아모우르, 큐피드는 동일어며 그 이름은 어찌 부르건 간에 사랑의 남신인 것이다.



신탁의 명령에 따라 프쉬케는 죽음의 신부로서 음산한 치장을 한 채 산의 정상에 버려졌다. 산위에 홀로 누워있는 프쉬케의 주위에는 어느덧 땅거미가 지나더니 어두워져버렸다. 모든 것을 단념했다지만, 눈물만을 흘리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프쉬케는 별안간 아주 기분 좋은 서풍이 불어옴을 느끼자마자 몸이 가볍게 하늘로 기분 좋게 떠 올라감을 느꼈다. 에로스가 자기 품에 포옹한 것이다. 이 장면을 그림으로 한 것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과 더불어 에로스가 프쉬케를 가슴에 안고 하늘로 오르는 장면인데 프쉬케는 탈진된 상태에서 자기의 몸을 가누지 못한다. 어떻게 보면 황홀해서 무아지경에 빠진 것도 같다. 에로스는 자기의 소원대로 프쉬케를 얻었으니 만족과 기쁨에 찬 표정으로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다.



[2R]번존스의 ‘용서의 나무’


영국의 화가 번존스(Edward Burne Jones 1833-98)의 작품 ‘용서의 나무’(1881-62)를 보면 남녀의 나신이 부둥켜안고 있고 이번에는 여자가 남자를 뒤쫓는 형국이어서 어리둥절하게 한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유부녀 유부남이어서 맺어서는 안 될 사랑을 해서 오래가지 못해 세상에 알려지자 자기들의 처지에 절망한 나머지 두 사람은 수로에 몸을 던져 이승을 하직하기로 했다. 그러나 수로에 가보니 물이 생각보다 차가워 투신을 포기하고 이 세상에 남기로 했다는 내용의 그림인데 여자가 남자의 행동을 포옹으로 막고 있다. 이렇듯 포옹은 강한 의지로 죽음을 택했던 남자의 행동을 주춤하게 만들게 된다.



이성간의 사랑으로 손을 잡고나 포옹하는 단계를 지나면 사랑표현의 한 방법으로 키스(kiss)라는 것을 하게 된다. 키스는 고대 희랍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 대한 존경의 표현이었으며 성적인 의미는 전연 지니지 않았던 것이, 고대 로마 시대에 이르러서는 성적인 사랑의 표현으로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도 상대의 손잔등, 볼이다 이마에 가볍게 하는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입술과 입술로 변하고 그것이 혀가 상대의 입속에 들어가는 소위 튜브 키스(tube kiss)로 변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키스에는 일정한 단계와 순서가 있어 우선은 서로의 의사가 통해서 사랑함을 확인하는 소위 의기투합의 단계가 필요하다. 즉 두 남녀는 의기투합된 상태에서의 사랑임을 강하게 표현하는 상태를 간담상조(肝膽相照)의 무아의 상태라 한다.



로트렉의 ‘키스’


사랑의 표현으로의 키스가 이성간에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동성 간에서도 본다. 프랑스의 화가 로트렉(Toulouse Lautrec 1864-1901)의 작품 ‘키스’(1892)를 보면 두 사람은 창녀들로 동성 간이다. 창녀라면 하루에도 몇 번식 남성들의 동물적이 욕구 해소의 대상이 되어 이성간의 접촉에는 지친 여인들이다. 그런데 그녀들이 왜 동성 간에 이렇게 뜨거운 키스를 하고 있을 까 의문이 생긴다.



사실 그녀들이라고 해서 마음 맞는 사람과의 감성의 교류로 일체감을 느끼려는 욕구가 없겠는가, 그러한 욕구해서를 위해 동성이지만 마음 맞는 사람과의 살을 맞대고 비비면서 키스를 나눔으로써 진정한 사랑의 일체감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하고나 가깝고 친하다는 표현으로 악수하고나, 포옹, 키스 등의 몸짓을 하게 된다. 이러한 몸짓은 몸의 일부가 서로 접촉함으로써 친교(親交)를 표현하는 몸짓언어인데 악수를 하면 손바닥의 땀(汗液)이 서로 교환되고, 키스를 하면 침(唾液)이 서로 교환된다, 그래 결국은 체액의 교환이 친숙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는 셈이다.



한 번의 키스로 교환되는 침의 양이 무려 9ml나 되고 보면 진한 접촉일수록 그 양은 더 증가될 것이며 땀보다는 침이, 침보다는 정액과 질액의 교류가 더 친교가 깊어짐을 나타내는 몸짓언어임에 틀림이 없다.



이러한 체액 교환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은 사랑의 심도에 따라 의기투합에서 서로가 이해되어 서로의 마음을 그것도 마음속 깊은 곳까지를 서로 볼 수 있을 때 즉 간담상조라 해서 간(肝)이나 담낭(膽囊)까지를 서로 보고 보이는 사이로 믿을 수 있다는 확신이 섰을 때 가능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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