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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팝나무와 백의민족(白衣民族)

  • 입력 2023.05.11 17:08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의학박사 /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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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는 안개처럼 하얗다. 흰 바지저고리를 입으신 할아버지께서 앞가슴을 다 덮은 다 덮고도 남는 흰 수염을 봄바람에 날리시며 쟁기질을 하신다. 깊이 파이는 쟁기 날을 따라 올라오는 땅김들도 하얗다. 겨울을 난 허연 파뿌리들을 털어 삼태기에 담는다. 언덕 파밭을 둘러싼 흐드러진 새하얀 조팝나무 울타리엔, 진한 향기에 취한 벌 나비들 날개 짓 소리가 무척 분주하다.

4월초엔 우리강산 어디를 가나 새하얀 꽃들이 무더기무더기 피어서 진한 향기를 날리고 있다. 조팝나무 꽃들이다. 고전소설 토끼전에서 토끼에게 속은 별주부(자라)가 육지 경치를 처음 둘러보는 장면에도 조팝나무가 등장한다. “기러기는 가노라고 하직하고, 강남서 나오는 제비는 왔노라고 현신(現身)하고, 조팝나무에 비쭉새 울고, 함박꽃에 뒤웅벌이오······”라 했다.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조팝나무 꽃은 봄이면 어디에서나 흔하게 눈에 띄는 꽃이다.

고려의 문호(文豪) 이규보(李奎報 1168~1241)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조팝나무 꽃(黍飯花 서반화)을 이렇게 노래했다.

花却纖圓色未黃 (화각섬원색미황) 꽃은 잘고 둥그나 누른빛이 아니라네.

較他黍粒莫相當 (교타서립막상당) 기장 알과 견주어보면 서로 같지 않네.

此名休爲饞兒說 (차명휴위참아설) 이 꽃 이름 굶주린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마오.

貪向林中覓飯香 (탐향림중멱반향) 탐내어 숲속에서 밥 냄새 찾으리니.

조나 기장은 땅이 척박하고 가뭄 타기 쉬운 메마른 땅에서도 잘 자란다. 봄 가뭄이 심하여 봄에 벼나 보리 밀을 파종하지 못했을 때, 여름 장마가 온 후에 씨를 뿌려도 가을에 여물이 제대로 되어 수확할 수 있다. 생육기간이 짧아 주린 배를 채워줄 수 있는 고마운 구황작물이었다. 이 시에서 굶주림이란 대목에 주목한다. 고려 때 이규보선생은 조실부모(早失父母)하여 절에서 자라며 무척 배고팠겠지만,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어 신동으로 불리었다. 일찍이 등과(登科)하였으나 당시 집권세력인 최씨(崔氏) 집안의 눈에 들지 못하여 10여년 이상 방랑하였다.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명성왕전(東明聖王傳) 등 민족 자긍심을 세울 수 있는 훌륭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조팝나무란 이름은 좁쌀에서 유래한다. 기장과 조는 오곡(五穀)의 하나이며, 좁쌀은 기장쌀보다 더 작다. 조팝나무는 꽃이 피기 전 그 꽃망울은 좁쌀 크기였다가 점차 기장 알 크기로 되었다가 꽃이 핀다. 이 시에서 보듯이 기장밥과 조밥은 하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노랗다. 그런데 요즘 어떤 이들은 소복하게 핀 흰 조팝나무 꽃을 좁쌀을 뻥튀기한 흰 알과 같다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 옛날에 지금과 같은 뻥튀기가 없었을 터이니 전혀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이다. 또한 조팝나무 꽃이 작다고 해도 1cm정도 되니 좁쌀 뻥튀기보다는 훨씬 크다. 아마도 활짝 핀 꽃만 보고, 조팝나무가 피기 전 꽃망울들이 좁쌀알처럼 다닥다닥 나뭇가지에 붙어있는 것을 보지 못해서 생긴 오해로 보인다.

봄이 오면 조팝나무는 겨우내 얼어붙었던 강산을 흰 옷으로 갈아입힌다. 백의민족이라는 말을 실감나게 한다. 우리 민족이 흰옷을 좋아하는 것을 두고, 가난하여 염색할 여유가 없어서라던가, 예부터 우리민족의 주 옷감 재료였던 무명의 색깔이 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옛 기록을 모르고 하는 말이다.

중국 기록인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편에 나라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袴, 履革鞜).”라고 되어있다. 또한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 신라(新羅) 편에도풍속·정치형벌·의복은 대략 고려·백제와 같다. 옷빛(服色)은 흰 빛을 숭상한다(風俗·刑政·衣服, 略與高麗·百濟同. 服色尙素).”고 되어 있다.

위 기록에서 보듯이 고려 후기 문익점선생이 중국에서 목화를 들여오기 이전인 고려, 신라, 백제, 고구려, 부여에서도 흰옷을 즐겨 입었다는 여러 기록이 있으니 빈곤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고대 어느 나라나 신분에 따라 복식은 제한이 있었고, 이를 어기거나 문제가 되는 옷이 유행되면 나라에서 금지령 같은 억압을 내놓았다. 고려의 충렬왕, 조선의 태조, 태종, 세종, 연산군, 인조, 현종, 숙종, 영조에 이르기까지 수차례에 걸쳐 흰옷 대신에 파란색 옷을 권장하였다. 조선 숙종은 아예 파란색 옷을 입으라고 국명까지 내렸으며 현종은 흰옷 금지령을 시행하기도 했지만 흰옷을 입는 걸 막지 못했다고 한다.

흔히 흰옷을 염색하지 않은 옷으로 착각하는데, 흰옷도 일종의 염색 옷이다. 흰색도 가공 직후에 나타나는 원자재의 색이 아니라, 따로 염료로 물들이거나 표백 처리하여 만드는 색이다. 일반적으로 직물을 염색하지 않았을 때의 색은 결코 흰색이 아니고, 삼베는 누렇고 면은 옅은 밀짚 색(상아색)이다. 조선에서의 흰 옷은 표백 처리를 해서 만드는 방법을 주로 썼다. 규합총서의 기록에 따르면 여인들은 흰 옷을 만들기 위해 옷감을 잿물에 넣어 수차례 빨아 상아색이던 면직물을 희게 표백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조팝나무를 꽃을 감상하는 것보다 약용식물로 더 유용했다. 동의보감에는 물론 오늘날 널리 쓰이는 아스피린(Aspirin)의 주성분인 아세틸살리실산을 독일에서 처음 추출할 때 버드나무가 아닌 조팝나무에서 추출하였다. 이 성분은 조팝나무(Spiraea) 종류에도 널리 포함하고 있으므로 ‘spir’를 어간으로 따오고, 접두어로 아세틸살리실산의 ‘a’와 당시 바이엘 사의 제품명 끝에 공통적으로 쓰던 ‘in’을 접미어로 붙여서 만든 말이다.

조팝나무 무리는 유라시아대륙과 북미의 온대지방이 원산이다. 우리나라에만 해도 진한 분홍빛 꽃이 꼬리처럼 모여 달리는 꼬리조팝나무를 비롯하여 흰쌀밥을 소복이 담아 놓은 것 같은 산조팝나무와 당조팝나무, 공조팝나무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조팝나무의 학명 Spiraea는 그리스어로 나선 또는 화환이라는 뜻이다. 길게 늘어진 가지를 휘어서 동그랗게 이으면 그대로 화관이 되기도 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꽃모양이 멀리서 보면 눈이 온 듯 눈부시지만 화려하지 않고 소담스럽고 순박한 꽃이다. 게다가 조팝나무는 향기가 진하여 정원 생울타리용으로도 우수한 나무다.

조팝나무 꽃은 장미과 꽃 중에서 꽃이 가장 작다. 그러나 새끼손톱만한 새하얀 꽃에 장미꽃이 갖추어야 할 건 다 갖추었다. 꽃잎 다섯 장, 수술은 아주 많고 암술 3~4, 꽃받침까지 작지만 완벽한 장미꽃이다. 게다가 향기라면 어느 장미꽃보다 훨씬 진하다. 요즘 반도체의 중요성이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조팝나무도 작지만 알찬, 장미과 식물 중의 반도체라 할 수 있기에 향후 큰 인기를 끄리라 생각한다. 관상용이나 밀원(蜜源)용으로도 소중하지만 정결하고 소박한 흰 꽃은 평화로운 백의민족을 상징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꽃이다. 장독대나 언덕배기나 담장 너머로 보이는 조팝나무가 있거든, 바라만 보지 말고 가까이 가서 한 번 쯤 말 걸어보기를 권한다. 진한 향기로 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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