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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와의 '이별'

  • 입력 2023.06.14 11:37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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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의사들의 수련과정을 ‘레저던트’ 또는 한 등급 올라가서 ‘펠로우’ 라고 부른다. 물론 육체노동이 심한 ‘인턴’ 기간을 지난 후의 과정이다. 인턴이나 레지던트 수련 당시에 우리 세대는 거의 24시간을 병원 안에서 먹고 자야 했다. 생활 자체가 일의 연속이었으니까....

외과대학을 졸업하고 이미 면허증까지 받은 어엿한 전문인이 되었지만 우리는 겸허했고, 선배들에게 실제로 환자를 고치는 ‘과학과 예술’ 을 전수받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때 배운 경험은 나의 경우 일행을 계속하는 듯하다. 그래서 나는 지금 UCS 정신과 레지던트와 소아정신과 펠로우들에게 나의 지식을 전달하며 빚을 갚는지도 모른다. 초여름의 신록처럼 싱싱한 이 젊은 의사들을 대하다 보니 내가 기운이 난다. 현재 미국에는 소아정신과 의사는 7천여명에 불과하다. 너무나 부족한 숫자다. 일반 정신과 수련 기간인 4년을 마친 후에 다시 2 년의 펠로우 단계를 지나야 되니, 너무 오랜 배움의 길이다. 그래서인지 이들의 소명감은 높다. 1주일에 1시간씩 나를 만나서 자신이 본 환자에 대한 자세한 과거력과 현재의 소견을 발표한다. 중요한 것은 정확한 진단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질병들을 감별 진달해야 된다는 사실이다.

우울한 어린이들 중에서는 갑상선 질환 환자도 있고, 산만해 보이는 아이들 중에는 드물지만 납중독 환자도 있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는 우선 몸을 돌볼 줄 알아야 한다. 똑같은 산만 증을 보이는 아이들 중에도 어떤 아이들은 슬픈 마음을 감추기 위해서 겉으로 ‘사고뭉치’ 노릇을 하는 경우도 있다. 속의 참된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아서는 아이를 진정으로 도와줄 수가 없다. 닥터 벤이 오늘 내게 상담한 13세의 소녀는 ‘심리적인 구토 증세’ 를 가졌다. 4살 때 유아학교를 시작하면서 소녀를 끊임없이 구토를 했다.

입원해서 몸의 구석구석을 모두 조사해보았지만 이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학교생활에 적응을 하면서 그녀의 구토도 많이 나아졌다. 그러나 10대가 되고 부모와의 갈등이 커지 면서 그녀의 구토 증세가 다시 시작되었다.

닥터 벤은 소녀의 부모를 같이 치료했다. 그리고 부모들이 소녀의 증상에 의해서 좌충우돌 하지 않도록 안정을 시켰다. 소녀가 불안하거나 화가 날 때는 말로 표현하도록 훈련을 시켰다. 그래서 반년 만에 증세가 많이 호전되었다.

자! 이제 문제는 닥터 벤이 이들 가족과 결별을 해야 될 때가 온 것이다.

“아마 이것이 제 문제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쩐지 제가 떠나고 나면 저 환자의 증세가 되돌아 올 것 같은 불안이 저를 힘들게 합니다.”

많은 수련 의사들이 경험하는 불안감이다. 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큰 ‘이별’ 이니까…

닥터 벤은 프랑스령 알제리아에서 태어난 백인 모슬렘 신자다. 그의 푸른 눈동자와 금발을 보면서 모슬렘 교도임을 상상 하기는 쉽지 않다. 더구나 프랑스에서 외과 대학을 졸업하고 5개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하는 덕분에 콜럼비아 출신의 이 이민 가족을 치료하는데 그토록 능숙했다는 것도 그렇다. 국가와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환자와 의사, 그리고 펠로우 수퍼바이저의 관계를 통해서 이 세계가 조금은 더 살만한 곳이 되어감을 느끼는 기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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