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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꽃, 베르테르의 꽃

  • 입력 2023.06.15 17:17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의학박사 /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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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사월이 오면 내 마음속에도 목련이 피고, 사월이 가면 내 마음속에서도 목련이 진다. 하얀 손수건들을 펼쳐 있다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던져버린다. 가을부터 보드라운 솜털로 고이 싸서 겨우내 간직했다가 4월이면 펼치는 손수건들이다. 목련은 꽃 한 송이가 꽃 한 다발이다.

가곡을 좋아하는 나는 4월이면 운전하면서나 산행을 하며 「4월의 노래/박목월 시, 김순애 곡」을 몇 번씩 부른다. 고등학교 때 이 노래를 배운 후 이 노래는 내 애창곡 중의 하나가 되었다. 노래 가사에 있는 대로 올 4월에도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으로 빠져들었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를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어느 4월 날, 클로버 꽃이 하얗게 만발하였던 목조 단층 교실 앞 잔디밭에서 처음 만났다. 그때도 하얀 목련꽃들은 높은 가지에서 순결한 눈으로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잎도 피지 않은 훤칠한 가지에 듬성 듬성 손바닥만 한 넓은 목련 꽃잎들이 하늘 향해 하얀 등불을 켜주었다. 그 꽃그늘 아래서 나는 젊은 베르테르를 만났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 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아 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

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하략-

4월의 노래 (박목월, 1915~1978)

1771년 05월 04일: 훌쩍 떠나온 것이 나는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친구여! 인간의 마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헤어지길 섭섭해 했던 자네 곁을 떠나 와서 기쁨을 느끼고 있다! -중략- 여기 이 천국 같은 고장에서 고독은 내 마음에 매우 귀중한 진정제가 되어준다. 게다가 이 싱싱한 청춘의 계절은 자칫하면 겁을 먹기 쉬운 나의 마음을 매우 훈훈하게 해준다. 나무 한 그루, 생울타 리 한 가지마저 온통 꽃다발이 아닌 것이 없다. 나는 차라리 풍뎅이로 변신하여 이 향기로운 바다 속을 표류하며 온갖 영양분을 그 안에서 발견했으면 하는 심정이다.

베르테르의 편지 첫 장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태(1749~1832) 는 25세 때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으로 일약 세계적인 작가가 되었다. 조급하고 미숙하게 썼다는 일부의 비판도 있기는 하지만, 매우 젊은 나이인 괴테가 넘쳐흐르는 정열과 생생한 체험을 살려 어딘가 홀린 듯이 써내려갔다. 조급하 고 미숙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쓸 수 없었을 거란 주장에 나는 전적으로 공감한다. 기독교가 엄격하게 사회를 지배하던 시기에 유부녀를 사랑하여 생긴 괴로운 인간관계 끝에, 권총으로 자살하고 마는 비극적인 결말은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커다란 충격이었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도 전쟁터에서 7번이나 읽었다고 한다.

생동감과 열정이 넘치고, 지나친 자존심과 고귀한 인간성 등을 단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당시 단연 압권이었다. 특히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작품 속에서 아름다운 자연의 묘사는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교묘하게 융합되어, 한 인간의 생명력이 거대한 자연의 일부로 직결되고 있음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식물학자이고 해부학자이면서 법학, 시, 희곡 소설 등 다방면에 박식하였던 괴테는, 이 소설을 통해 그의 재능을 질풍노도 처럼 쏟아냈다.

당시 독일 문단은 프랑스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계몽주의 일색이었다. 공허한 형식미와 미사여구를 동원한 기교의 문학이 지배했다. 때마침 불어 닥친 젊은 혈기의 문학운동인 ‘질풍노도(Strum und Drag)'를 타고 새로운 문단의 중심이 되었다. 이 새로운 시대정신은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로, 섭리 의 질서에서 파괴적 카오스로, 프랑스 고전비극에서 셰익스 피어적 성격비극의 방향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12월 20일: -전략- 로테는 여전히 베르테르의 손을 붙잡은 채로 있었습니다. “잠시나마 마음을 가라앉히세요. 베르테 르”하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자진해서 스스로를 파멸로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하필이면 무엇 때문에 저를, 베르테르! 다른 사람의 소유인 저를? 저는 두렵습니다. 저를 소유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점 이 당신에게 그런 욕망을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해서 더욱 두렵습니다.” 베르테르는 잡혀 있던 손을 로테의 손에서 빼 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로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습니다.

“훌륭하십니다!”하고 베르테르는 외쳤습니다. “아주 물샐 틈없이 현명합니다. 알베르트가 아마 그런 대사를 만들어낸 모양이지요. 정치적이군요. 아주 정치적이군요!” -중략-

로테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쏟아졌습니다. 그녀의 억눌린 가슴을 시원하게 해주는 그 눈물은 베르테르의 노래를 중 단시키고 말았습니다. 그는 원고지를 내던지고 로테의 손을 잡고 몹시 흐느껴 울었습니다.

목련은 한라산과 일본이 고향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주변에서 만나는 목련은 실제로는 중국 원산 백목련인 경우가 많다. 토종 제주도 목련보다 백목련이 오히려 더 널리 보급된 탓이다. 재래종 목련은 꽃잎이 좁고, 나뭇잎과 동시에 꽃이 피며 꽃잎이 완전히 젖혀져서 활짝 핀다. 이에 비해 백목련은 잎이 나오기 전에 꽃이 먼저 피며, 꽃잎이 넓고 완전히 피어도 반쯤 벌어진 상태로 핀다. 자목련이나 자목련과 백목련의 교배종 등 여러 종이 있다. 특히 깊은 산속에서나 발견되는 목련의 일종인 함박꽃은 북한의 국화이다.

목련꽃은 소리 없는 총을 하늘로 발사하듯이 핀다. 붓끝 같은 커다란 꽃망울이 별안간 터지면서, 밤사이에 주먹만 꽃 한 꽃송이가 하늘 높이 솟아나 있다. 한두 송이가 피는가 싶더니 “땅, 땅, 땅땅!” 연발총을 하늘로 발사한다. 목련은 아가위 꽃처럼 숨어서 조용하고 앙증맞게 피지 않는다. 모란이나 작약 처럼 함빡 웃으면서 화려하게 피지 않는다. 살구꽃처럼 조곤 조곤 얘기하며 살금살금 피지 않는다. 라일락처럼 농염한 향기를 풍기며 제멋에 취해 늘어뜨려지며 피지 않는다. 가을부터 가지 끝에 붓끝처럼 매달려 ‘내년 봄에 나 여기서 필겁니다.’하고 하늘에 써가면서 핀다. 꽃 한 송이가 꽃 한 다발이다. 커다란 여섯 개의 하얀 잎으로 노란 암술을 감싸다 지치면 남 몰래 지지 않고 “나 이제 여기서 집니다.”하고 누렇게 변해가 면서 진다.

4월 하늘에 총을 쏘자/ 소리 없는 하얀 붓 총을 쏘자//

말할 수 없었던/ 베르테르의 사랑을 위하여

이제는 모든 이에게 말할 수 있다고/

마음 놓고 하늘에 써 내려가자//

4월 하늘에 하얀 손수건을 날리자/ 자신도 속여야만 하는

그 사랑을 위해 눈물 펑펑 흘리는/

베르테르들의 눈물을 닦아보자

마음 놓고 닦아보자//

4월 하늘에 하얀 숨구멍을 내자/

가슴 아린 베르테르들을 위해

억눌리고 지친 가슴에/

새하얀 숨통을 틔워주자

「목련꽃/신 종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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