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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의 유혹

  • 입력 2023.07.10 14:26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의학박사,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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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우리는 깔딱고개를 넘어 인수봉으로 향했다. 5월 중순이라 산 아래는 벌써 녹음이 짙어졌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아직도 남아 있는 봄으로 가고 있었다. 해발 500미터 고지부터는 떡갈나무, 신갈나무, 노린재나무, 때죽나무 등의 나뭇잎들은 아직 어린 모양이 역역하다. 다만 봄에 잎이 빨리 피는 키 작은 국수나무와 키 큰 팥배나무만이 벌써 햇순을 길게 뻗고 있다. 높은 산길이라 한 줄로 서서 줄을 잡고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진한 향기가 코를 스친다. 커다란 바위틈에 털개회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털개회나무를 다른 이름으로 수수꽃다라 또는 ‘미스킴라 일락’이라 한다. 지구상 수백 가지의 라일락 품종 중에서 세상에서 가장 키가 작은 품종이지만 향기는 가장 진한 품종에 속한다. 영어로는 “Syringa patula 'Miss Kim‘”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이름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1947년 미군정청에 근무 하던 식물채집가 엘윈 미더(Meader)가 북한산 백운대 부근에 서 털개회나무 (수수꽃다리)씨를 채집해 가져가 개량한 품종이다. 그는 1954년 이를 조경수로 내놓을 때 당시 자료 정리를 도운 한국인 타이피스트 여성의 성을 따 이 꽃나무 이름을 지었다한다.

수수꽃다리는 아담한 수형(樹形)에다 병해충에 강한 것은 물론 진한 향기를 지니고 있다. 조경용으로 시장에 내놓자마자 폭발적 인기를 얻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라일락 품종이라 한다. 2014년 현재 미국 라일락 시장의 30%를 장악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1970년대부터 비싼 로열티를 물어가며 역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 옥상 정원에도 수수꽃다리 한 그루 키우고 있는데, 4월 중순부터 향기가 대단한 꽃들이 아침마다 나를 반긴다.

T. S. 엘리엇(1888~1965)은 그의 시 「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추억과 욕정을 뒤섞으며/ 봄비로 잠든 뿌리를 깨운다./ 겨울은 우리를 오히려 따뜻하게 했었다.’라 노래했다. 어찌하여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잔인하고, 죽은 땅이라 했던 겨울이 오히려 따뜻하단 말인가? 그렇다.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꽃가지를 보고 알았다. 밤새 내린 비에 젖어 휘늘어지면서도 진한 보랏빛은 전혀 탈색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향기를 발산한다. 어찌 라일락뿐이랴. 조용하기만 하던 겨울에 봄이 찾아와서, 만물을 소생시켜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니 어찌 잔인하지 않겠는가.

 2018년 5월 11일 우리는 라일락 피는 「황무지」의 무대인 독일 남부로 향했다. 일행은 에탈(Ettal)지방으로 이동했다. 드디어 고색창연한 한 성당 앞 오래된 목조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바로 앞 높은 산엔 만년설이 쌓여 있고 그 아래로 제법 넓은 강을 따라 목초지가 초록 융단처럼 갈려 있었다. 해발 800미터 지역이란다. 붉은 마로니에가 만발한 정원을 갖춘 집들은 장미나 인동덩굴로 울타리를 쳐놓았지만 낮은 나무 대문 옆으로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들이 지키고 있었다. 라일락 향기가 진동했다. 저녁 8시가 넘었는데도 위도가 높아 아직 어스름이 찾아오지 않고 밝았다. 라일락은 스위스,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온대지방 정원에서 4월부터 봄을 유혹하는 향기 역할을 하고 있었다.

수수꽃다리는 개나리, 올리브, 쥐똥나무, 정향(丁香)나무, 은 목서, 금목서 등과 같이 물푸레나무과에 속한다. 동서양에 여러 변종들이 있는데, 뭉뚱그려서 한국에서는 수수꽃다리라 하고 서양에서는 라일락(Lilac, 학명 Syringia vulgaris)이라 하며 중국과 일본에서는 정향목(丁香木)이라 한다. 수수꽃다리 라는 얹게 된 이유는 라일락 꽃망울들이 마치 잘 익은 수수이삭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이과의 나무들은 모두 향기가 진한 데, 긴 화관통에 꿀과 향기를 듬뿍 담고 있다. 정향(丁香)이라 하는 이유는 4각형인 꽃잎과 긴 화관통이 마치 나무에 박는 못 모양이어서 한자 정(丁)자를 붙였다.

한국에는 5종류의 수수꽃다리속 식물들이 자란다. 수수꽃다 리(S. dilatata)는 주로 북한 지방에서 볼 수 있으며, 울릉도에 섬개회나무, 강원도 이북에 꽃개회나무가 자란다. 개회나무와 털개회나무는 산 속에서 자생하고 있다. 울릉도에서 자라는 섬개회나무는 수수꽃다리보다는 키가 크고 꽃떨기에 꽃들이 약간 더 여유 있게 달리며 가지는 회갈색이다. 이 꽃나무도 관상가치가 무척 높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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