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소리 없이 찾아온 우울증

  • 입력 2023.08.16 16:55
  • 기자명 김영숙(정신건강의학전문의/LA)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디저널]

“제가 왜 정신과 의사를 보아야 됩니까? 저는 당뇨병 정기 검사를 하러 왔는데…”

60세의 백인 남성은 선반공 일을 하기 때문인지 아주 젊어보였다. 그리고 본인의 말대로 정신병(?)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다행히 이 환자를 이미 본 사회사업가의 전화가 없었더라면 이 환자는 아마 정신과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예정된 내과 의사와의 검진을 위해 오늘 외래에 왔었다. 당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체중조절이 불가피했다. 그런데 그는 요즈음 너무나 스트레스가 높다. 잠을 잘 수도 없고, 운동을 할 수도 없으며, 자신을 위한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다보니 먹는 재미밖에 없고 따라서 체중도 늘어만 갔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내과의사에게 했다고 한다.

“8년 동안 한 번도 월급이 오르지 않았어요. 제 상관은 어떻게든지 저를 내보내고 다른 젊은 사람들 뽑으려는 것 같아요. 요즈음은 그 상관을 죽여 버리고 나도 죽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꼈답니다. 물론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손자들을 생각하면 그럴 수도 없지만…”

그가 이 말을 내과 의사에게 하자 그 의사는 소셜워커에 연락해 그 남성을 정신과로 보냈다. 같이 진료실을 찾은 그의 아내가 입을 열었다.

“직장 문제만이 아닙니다. 저와 같은 방을 쓴지도 무척 오래 되었답니다. 2~3년 전에 전립선 수술을 받은 후에는 저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없고, 키스를 한 적도 없어요.”

울먹이는 아내를 보면서 그는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저는 아내를 아직도 무척 사랑합니다. 그런데 성적인 흥미를 잃어버려서 저 자신도 정말 살맛이 안 난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수술을 아주 작은 것이었고, 당뇨도 저는 초기랍니다. 아직 인슐린 주사를 맞지 않고, 먹는 약으로만 조절이 됩니다. 아내 를 대할 때마다 저 자신이 창피하고 미워집니다. 그래서 아내 를 피한 것뿐입니다.”

아내가 말을 받았다.

"그런데 남편은 이런 얘기를 지난 2~3년간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저는 남편에게 새 애인이 생긴 것 같아서 늘 불안하고 화가 났지요. 요즈음에는 회사에 갈 때에도 저에게 따뜻한 인사 한마디 없으니까요.”

40년간 잉꼬처럼 살았다는 이 부부에게 ‘중년의 위기’는 이처럼 아무 통고도 없이 찾아왔다. 잠을 못자고 식용이 이상하게 변하고 평소에 흥미 있었던 것들이 시들해졌다. 성적인 흥미가 소실됐고, 자살에 대한 생각이 자주 들었다. 우울증의 주요 증상들이다. 다만 겉으로 멀쩡해(?) 보였을 뿐이다.

중증의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는 것을 사랑하는 아내는 물론 본인조차 몰랐던 것이다. 이 남성은 자신의 귀를 믿지 못 하겠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부인했다. 하지만 진정어린 부인의 말에 환자는 마음을 돌렸고, 그 남성은 결국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중년이 되면서 남성들도 정도는 약하지만 호르몬 변화가 오며 우울증세가 오기 쉽다. 이를 의심하자마자 정신과로 보낸 내과의사의 용단이 휼륭하다. 우리 이민 한인사회에도 이런 현명한 의사와 환자들이 많아져서 무서운 자실이 줄어들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