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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죽나무, 원초적으로 순결한 나무

  • 입력 2023.08.17 13:04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 의학박사,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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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봄꽃들이 다 져버린 오월 하순 어느 날, 산을 오르다 말고 관목 숲 아래에 바위에 드러눕는다. 낮은 자세로 누워야 잘 보인다. 아주 작은 종 모양으로 조롱조롱 매달린 수줍은 하얀 꽃들의 전치를 보기 위해서다. 나비들이 바삐 날아들고 벌소리도 천군만마처럼 들려온다. 부담 없이 편안한 꽃향기는 코를 거쳐 폐를 가득 채운 뒤 심장까지 거침없이 가득 채운다. 이렇게 많은 꽃송이에 둘러싸여 현혹당해 본 일은 평생 처음이다. 이런 가식 없고 원초적인 장면들을 놓치지 않고 여러 문학작가 들이 시나 소설에 담았다.

“꽃이 만개한 때죽나무 아래는 순결한 짐승이나 언어가 생기기 전, 태초의 남녀의 사랑의 보금자리처럼 향기롭고 은밀하고 폭신했다. -중략- 나는 그가 머뭇거리지 못하게 얼른 그의 손에서 길 잃은 피임기구를 빼앗아 내 등 뒤에 깔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 다. 내가 눈을 떴을 때 내 눈높이로 기남이의 얼굴이 떠오르든, 때죽나무 꽃 가장귀가 떠오르든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거 저나 마찬가지/박완서」).”

때죽나무 꽃을 제대로 보려면 드러누워서 보야 한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하얀 꽃이 조로조롱 매달려 핀 모습이 장관이다. 동거인이 생활이 어렵다고 피했지만 간절히 아기를 갖고 싶었던 주인공 영숙이가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박완서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소위 ‘민중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서민들을 이용해 먹고 나중에 권력과 부를 차지하면 ‘서민의 삶’ 위에 군림하는 인간의 위선을 그려냈다. 작가는 때죽나무 꽃을 주인공에 이입(移入)시켰다. 때죽나무 꽃을 짧게 묘사하고 지나가면서도 단숨에 그 특징을 잡아내 어 상황을 적절히 그려내는 탁월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나무, 때죽나무가 있었다. 보는 순간, 그때까지 전혀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 때죽나무구나, 하고 곧바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금방 눈에 들어왔다. 그만큼 인상적이었다고 해야 하나. -중략- 정말로 옷을 벗은 여자의 매끈하고 날씬한 팔이 남자의 몸을 끌어안듯 그렇게 소나무를 휘감고 있는 관능적으로 생긴 나무가 있었다. 흙을 파보면 모르긴 해도 뿌리들이 지상의 줄기들보다 훨씬 더 적극적이고 노골 적인 모습으로 소나무를 휘감고 있을 것 같은, 그곳에 그런 나무가 서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승우의 장편소설 「식물들의 사생활」에도 때죽나무가 등장한다. 주인공인 형제(兄弟)와 순미라는 여자의 삼각관계가 줄거리인데, 주인공 중 형이 집 근처 왕릉 산책길에 있는, 소나무를 감싼 만개한 때죽나무를 보면서 이 나무를 자신과 순미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긴다. 이승우 작가는 작가 후기에서 “한 왕릉에서 굵은 소나무의 줄기를 끌어안고 있는, 매끄럽고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체를 연상시키는 때죽나무를 보았다”고 했고, 다른 글에서는 이 나무들을 본 것이 이 소설을 착상한 계기였다고 밝히고 있다.

때죽나무는 한국의 황해도와 강원도 이남에서만 볼 수 있는 나무다. 낙엽수이며 높이는 10m정도까지 자라는 작은키나무 (관목)이다. 잎은 어긋나며 타원형 모양인데 끝이 뾰족하고 밑 부분은 쇄기모양이다. 영어로는 Snowbell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종(鐘)을 닮은 예쁜 하얀꽃이 피는 걸 보고 지은 이름 으로 보인다.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열대에서 난대에 걸쳐 분포하며 일부는 유럽의 지중해 연안에서도 자란다고 한다. 때 죽나무 종류는 세계적으로 11속의 160종이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때죽나무, 쪽동백나무, 나래쪽동백 등 2속 3종이 분포한다고 한다. 추운지방에는 자랄 수 없어 한국이 이 종의 북한계라고 한다. 특히 한국의 때죽나무는 때죽나무 중에서 내한성 이 가장 커서 원예종으로까지 개발하면서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한다. 때죽나무의 학명은 Styrax japonica이다. 속명(屬名) Styrax는 '편안한 향기'라는 뜻으로 학명에서도 때죽나무가 향기 좋은 나무임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때죽나무라는 무척 독특한 이름을 얻게 된 설명들이 여럿 있다. 요즘 같은 7~8월에 층층으로 뻗은 때죽나무 가지에 굵은 콩만 한 옅은 풀색 타원형 열매들이 수천 수백 개가 줄지어 떼지어 매달려 있다. 반질반질한 열매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 머리를 빡빡 깍은 스님들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다. 까까머리 스님들이 떼지어 오는 모습을 닮았다하여 때(떼)죽나무라 했다 한다. 또 다른 설명도 있다. 열매의 껍질에 독 (egosaponin)이 있어 이를 모아 개울물을 막고 그 안에 풀면 물고기들이 떼로 죽어 고기 잡는데 사용했던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즉 고기를 ‘떼로 죽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는 옷을 삶아 빨 때 열매 껍질을 넣으면 옷 때가 잘 빠져 때를 빼려 죽 끓이는데 쓰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다른 설명으로 야산에 많이 자라고 나무를 키 작은 관목이니 채취하기 쉬우며 잔가지라도 화력이 좋아 때(끼니) 끓일 때 흔히 쓰기에 때죽나무라는 설명이다. 실제로 춘천출 신인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에서 “때죽나무와 때 끓이는 외딴집 굴뚝에/ 해일처럼 굽이치는 백색의 산과 골짜기에/ 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이라 한 것을 보면 춘천 지방에서 때죽나무로 흔히 때를 끓이는 때감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나무, 꽃, 꿀, 열매 등이 모두 유용하여 버릴 것이 없는 나무라 할 수 있다.

꽃은 중부지방에서는 5월 중순 이후부터 피기 시작한다. 일찍 피는 봄꽃들이 다 져버린 때라 더 귀한 대접을 받는다. 잎 겨드랑에서 꽃대가 나오고 꽃의 크기는 약 3cm 내외며, 꽃 한 줄기에 2~5개씩 다소곳이 아래로 향해 있다. 꽃의 형태는 총상꽃차례이다. 총상꽃차례란 여러 개의 꽃이 한 줄기에 펴서 마치 한 송이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통꽃이나 꽃잎은 5갈래로 벌어지며, 안에는 수술 10여개와 1개의 암술이 있는 양성화 (兩性花)다. 열매는 핵과(核果)이며 크기는 약 1.2~1.4cm정도 크기다. 9월에 다 익으면 과육이 5갈래로 절로 벌어지고 그 가운데 짙은 갈색을 띤 단단한 씨가 들어난다. 때죽나무 씨는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만큼 무척 독특하다. 그 작은 씨앗에 세로로 홈이 파져 있고 럭비공을 닮은 타원형이다. 이 속에 기름이 풍부한 노란 속살이 들어 있다.

씨앗 표면은 약간 울퉁불퉁하지만 단단한 모양이서 꿰어서 염주로 쓰기도 한다. 동백이 자라지 않는 중부내륙지방에서는 때죽나무나 생강나무 씨앗으로 기름을 짜서 동백기름 대신에 쓰기에 쪽동백이라고도 한다. 강원도 춘천지방을 배경 으로 한 김유정의 소설 「동백꽃」에서 동백은 바로 생강나 무를 가리킨다. 그러나 강원도 영월 등에서는 때죽나무를 쪽동백이라고도 한다. 때죽나무 꿀에는 사포닌 등 유용한 성분 이 많아 항암, 콜레스테롤 강하, 항염증 작용용이 있다하나 너무 많이 먹으면 취할 수 있다 한다.

꽃 필 때뿐만 아니라 가을산행 때도 때죽나무는 시선을 사로 잡는다. 대롱대롱 달린 열매 모습들이 꽃이 피었을 때 못지않 게 앙증맞다. 꽃이 필 때나 열매가 열릴 때나 층층나무처럼 길게 뻗은 가지에 풍성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양적으로 아주 풍부하다. 아직 잎이 푸른 초가을에 층층이 뻗은 때죽나무 가지에, 열매의 과육이 벌어져 노출된 짙은 갈색 씨앗들이 무더기로 달린 것을 보면 욕심을 내지 않을 수 없다. 이때 나는 때죽나무 전파자가 된다. 한 줌 훑어서 주머니 속에 넣어두 었다가 사태 진 곳이나 나무가 듬성한 곳에 뿌리곤 한다. 때죽 나무야, 퍼져라! 널리널리 퍼져서 온 산을 다 덮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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