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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 부부금슬 나무

  • 입력 2023.09.14 11:47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 의학박사,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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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칠월 한낮 태양이 마음껏 햇볕을 내려놓는 날, 흠뻑 땀을 흘리고 싶어 앞산으로 향한다. 참나무 밑 그늘진 황톳길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맨발로 걸어 오르내리고 있다. 공원 배롱나 무들이 희거나 자줏빛 꽃으로 여름을 장식하고 있는 건너편, 절로 나고 자라 여름 산자락을 무지갯빛으로 단장하는 나무 군락들이 있다. 더위에 더 늠름한 자귀나무들이다. 무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불어오는 미풍에 부채춤을 추고 있다. 아니 다 불꽃놀이를 하고 있는 중이다.

자귀나무는 여름이면 야산 산자락에 연분홍 부채 같기도 하고, 활짝 편 공작의 꼬리 같기도 한 꽃을 피워 눈길을 끈다. 풍성한 여름 햇빛을 프리즘으로 분해하여 무지갯빛으로 펼쳐놓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야자수 늘어진 이국(異國)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분명한 우리나라 자생나무다. 시원하게 가지들이 드리운 자태가 독특하고 꽃도 아름다운 자귀나무를, 요즘에는 정원이나 공원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예부터 자귀나무는 문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왔다. 두보(杜甫)의 가인(佳人)이란 시에도 자귀나무가 등장한다.

절대유가인(絶代有佳人) 세상에 둘도 없는 절세미인이 있었는데

유거재공곡(幽居在空谷) 인적 드문 깊은 계곡에 살았다네

-중략-

부서경박아(夫婿輕薄兒) 낭군은 바람둥이 사내이라

합혼상지시(合棔尙知時) 자귀나무는 오히려 때를 알고

원앙불독숙(鴛鴦不獨宿) 원앙은 홀로 잠들지 않는다지만

단견신인소(但見新人笑) (낭군은) 다만 새로 생긴 첩의 웃음만 보니

나문구인곡(那聞舊人哭) 아내의 우는 소리는 어찌 들을까

이 시에서 보듯이 새 중에서 좋은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새가 원앙이라면, 꽃 중에서 좋은 부부금슬을 상징하는 꽃이 바로 자귀나무 꽃이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자귀나무를 합혼목(合棔木), 합환목(合歡木),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이름으로 부르게 된 연유는 낮에는 활짝 펴 있던 나뭇잎들이, 밤이면 마주보고 있는 잎들끼리 오므라들어 서로 붙어서 밤을 지새우기 때문이다. 예부터 자귀나무를 사이좋은 부부를 상징하는 나무로 여겨 신방 앞에 즐겨 심었다고 한다. 슬기로운 아내는 자귀나무 잎을 따다 말린 후, 남편이 힘들 때 조금씩 꺼내 술에 넣어 마시게 하여 남편을 위로했다고도 한다.

콩과식물인 자귀나무 잎들이 밤이면 오므라드는 이유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이렇다. 대부분의 콩과식물들은 밤 동안 수분증산을 억제하기 위하여 총엽병(總葉柄, 큰 잎자루)의 기부(基部, 시작부위)에 있는 물주머니를 수축시키거나 확대시켜 잎을 접고 핀다. 밤이면 이 물주머니를 수축시켜 잎을 접는다고 한다. 만지면 잎이 오므라드는 미모사(신경초)도 같은 콩과식물로 바로 이런 기전으로 잎을 오므린다. 자귀나무 큰 잎자루에는 작은 잎들이 20~30쌍, 40~60개가 달려 있다. 대부분의 콩과식물은 이 작은 잎들이 홀수이다. 그런데 자귀나무 만은 작은 잎들은 짝수라 잎이 포개지고 홀로 남는 잎이 없어 좋은 금슬을 상징한다고도 한다.

자귀나무 잎들은 정갈하여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인상적이다. 잎 가장자리가 아주 또렷하고 표면이 매끈하여 무척 정성스럽게 빚은 모습이다. 게다가 작은 잎은 가운데 잎맥을 중심으로 대칭이 아니다. 줄기에 가까운 쪽은 호(弧)가 더 길고 먼 쪽은 짧은, 비대칭이어서 기하학적으로도 완벽한 모습이다.

자귀나무 꽃도 어떤 식물보다 아주 독창적이다. 비단실로 짠 부채처럼 화려한 모습은 바로 4~5cm정도 되는 수꽃들의 수술들이며, 꽃잎은 퇴화하여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에 암꽃은 아직 피지 않고 있는 수꽃 꽃망울과 비슷하게 아주 작은 주먹처럼 생겨서 볼품이 없어 눈에 안 띈다. 더없이 화려한 자귀나무 꽃은 박수무당인 셈이다. 보통의 식물들은 암꽃이 화려하고 큰 것에 견주어보면 자귀나무가 얼마나 독특하게 진 화해왔는지 알 수 있다. 자귀나무 열매는 아카시나무 열매처럼 콩처럼 생긴 꼬투리에 작고 납작한 콩알이 6~8개가 들어 있다.

칠월 한낮 하늘이/ 마음껏 햇볕을 내려놓으면/ 무지갯빛 볼 터지 하고

속눈썹을 높이 세운 박수무당이/ 부채춤 추며/ 불꽃놀이 여름 굿판을 벌인다//

불어오는 작은 바람에도/ 비단 실타래 날리며/ 참아온 부끄러운 몸부림들은

모두 향기로움으로 날리고/ 님 찾아 해가 지기만을 기다린다//

어둠 속에 서로를 기대어/ 너와 내가 합일(合一) 되어

얇은 비단 이불 덮은 채/ 여름밤은 사랑 강물로 흐르고

내일 낮에 또 불꽃놀이 할 준비에/ 드리운 잎으로 장막을 친다//

세상에 둘도 없는/ 한낮 무지갯빛 불꽃놀이는/ 누굴 유혹하려는지 알 수 없지만

여름 한낮처럼 식을 줄 모르는/ 내 두근거림만은 네게 맡겨보고 싶구나

자귀나무 꽃/신 종 찬

자귀나무의 원산지는 동남아시아, 이란, 중국, 한국 일본 등이라 한다. 그러나 하와이에서도 야생으로 자란 엄청나게 큰 자귀나무 숲도 보았고, 가로수로도 멋지게 자라 남국의 운치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자귀나무는 따뜻한 지방을 좋아하며 추위에 약 해 황해도 이남지방에서만 자란다고 한다. 어려서 내 고향 안동 뒷산에도 자귀나무가 많이 자랐는데, 크게 자라지 못하고 밑둥 치만 크고 해마다 새순이 나왔다. 위로 자란 나뭇가지는 겨울에 모두 얼어 죽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는 아주 굵고 크게 자라 10미터가 넘는 나무들도 보았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제각기 그 이름을 갖게 된 연유들이 있다. 자귀나무도 그 이름을 얻게 된 연유에도 여러 설명들이 있다. 쇠로된 연장 자귀의 자루로 많이 쓰여 얻은 이름이라는 설명은 좀 수긍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어려서 뒷산에 자라는 자귀 나무를 많이 꺾어 소먹이로 준 적이 있다. 콩과식물이라 소가 무척 좋아한다고 별칭으로 ‘소쌀나무’라고도 불렀다. 어렵게 소꼴을 베는 것보다, 자귀나무 가지를 꺾어오면 어렵게 소꼴을 베지 않아도 되었다. 자귀나무 가지는 쉽게 불어져 꺾기도 쉬웠다. 이렇게 가지가 연한데 자귀의 자루로는 적당치 않다.

다른 연유인 밤이면 잠잘 때를 귀신같이 알아서 붙인 이름이라는 설명도 동의하기 어렵다.

자귀나무의 원래 이름은 ‘자괴나무’였다 한다. ‘자’는 잠잔다는 데서 왔고, ‘괴다’는 ‘사랑하다’의 옛말이니, ‘자면서 사랑한다.’는 뜻이라는 설명에는 쉽게 수긍이 간다. 서양에서는 자귀 나무를 'silk tree'라 부른다. 비단처럼 고운 꽃 때문에 얻은 이름으로 보인다. 지구가 점점 더워지고 있고 환경파괴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자귀나무는 영양분이 너무 많은 땅에서는 웃자라 진딧물 등 병충해가 많아 잘 자리지 못한다고 한다. 자귀나무는 공해에도 비교적 잘 자란다고 한다. 가로수로 많이 심어 멋진 경치도 즐기고 은은한 향기와 꿀로 벌과 나비들을 즐겁게 해주면 좋겠다. 덤으로 부부금슬도 좋아지면 세계최저인 한국의 출산율도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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