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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凌霄花), 그 문학적 형상화들

  • 입력 2023.10.18 13:09
  • 기자명 신종찬(시인,수필가, 의학박사 / 신동아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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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디저널] 여름 햇볕에 달아오른 담벼락을 힘차게 올라 더없이 화사 한 황금빛 꽃들을 피운다. 무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하늘 로 솟아 꽃을 피우는 그 용기는 대체 어디서 왔을까? 다섯 개 의 도톰한 꽃잎은 익을 대로 익어 농염한 젊은 여인의 주황 빛 입술 같다. 마치 서부영화 「돌아오지 않는 강(River of No Return)」에서 주제가를 멋지게 부르는 세기의 여우(女優) 마 릴린 먼로의 입술처럼 보인다. 트럼펫 모양 꽃들에서 영화 제 목과 동명인 주제가가 울려 퍼질 것만 같다. 그것도 약간 허스 키하여 더 농염한 먼로의 황금빛 목소리처럼….

이런 멋진 모습을 능소화의 고향인 옛 중국의 『시경(詩 經)』에 두 번이나 시로 형상화되어 있다. 능소화의 옛 이름은 초(苕)였다. 먼저 「소아(小雅)」 편을 보자.

초지화 운기황의(苕之華 芸其黃矣)

능소화, 그 꽃잎들 촘촘하게 붉고 붉어라.

심지우의 유기상의(心之憂矣 維其傷矣)

마음이 괴롭구나! 참으로 슬프도다!

초지화 기엽청청(苕之華 其葉靑靑)

능소화, 그 잎들이 푸르고 푸르도다.

지아여차 불여무생(知我如此 不如無生)

내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않았으리.

또한 『시경(詩經)』 「진풍陣風」 편에서는 “방축 위에 까 치집(방유작소防有鵲巢), 언덕 위 향기로운 능소화(공유지초 邛有旨苕), 누가 내 여인 꼬여내어(수주여미誰侜予美), 어찌 내 마음 시름겹게 하나(심언도도心焉忉忉)”라고 노래하며, 능소화가 여인을 홀려 꼬여낼 만큼 농염하다 하고 있다.

역사소설 『능소화(4백 년 전에 부친 편지)/조두진』에서도 능소화는 하늘나라에서 선녀를 유혹하였고, 선녀는 능소화를 훔쳐 지상으로 도피하였다. 팔목수라(八目修羅)는 옥황상제 의 명을 받고 하늘에서 소화꽃을 훔쳐 달아난 여인을 찾아 지상으로 내려왔다. 여늬가 바로 그 여인이었다. 여인은 경상도 안동 땅에서 헌헌장부(軒軒丈夫) 고성(固城) 이씨(李氏) 이응태(李應台, 1556~1586)와 혼인하고 몸을 깊이 숨겼다. 그러나 결국 괴물 팔목수라에게 발각되어 남편과 자식까지 먼저 잃고 자신도 불행한 생을 마감하고 만다.

서른한 살에 먼저 간 남편에게 여늬는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고 편지를 써서(1586년) 관 속에 함께 묻었다. 4백여 년이 더 지난 후(1998년) 택지개발 중에 우연히 발굴되었을 때도, 다른 것은 삭아 없어졌으나 이 미투리와 한글 편지만은 온전하였다. “당신은 언제나 제게 둘이 흰머리가 되게 살다가 함께 죽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저를 두고 당신이 먼저 가십니까? 저와 어린아이는 누구 말을 듣고, 누굴 의지하며 살라고 먼저 가십니까? 당신, 저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오셨나요.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나는 당신에게 말하고 했지요.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어여삐 여기며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당신은 우리가 나눈 이야기를 잊으셨나요? 그런 일을 잊지 않으셨다면 어찌 저를 두고 가시는가요?”

남편에게 하고픈 말은 끝이 없었지만 좁은 편지에는 더 이상 쓸 곳도 없었다. 여늬는 편지를 옆으로 돌려 여백을 채워갔다. 한껏 불러온 배 안에서 아기가 발길질하니 더욱 서러움이 북받쳤다.

“이내 편지 보시고 제 꿈에 와서 상세히 설명해주세요. 어째서 그토록 서둘러 가셨는지요?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요? 우리는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셨지요? 어떤 운명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을 거라 하셨지요? 우리 함께 죽어 몸이 썩더라도 헤어지지 않을 거라 하셨지요? 저는 그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드립니다. 당신, 제 꿈에 와서 우리 약속 잊지 않았다고 말씀해주세요. 어디 계신지, 우리가 다시 언제 만날지 자세히 말씀해주세요. 당신 배 속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게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게 가시니 배 속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는 것인지요?” 아무리 한들 제 마음 같겠습니까?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있겠습니까?”

능소화(凌霄花)를 한자로 풀이하면 ‘하늘을 능멸하는 꽃’이란 뜻이다. 옛날에는 평민들은 함부로 키우지 못했고 궁궐이나 권세가들이 키우는 양반들의 꽃이었다. 과거급제하면 꽂았다 하여 ‘어사화(御史花)’라고도 하며 이로 연유된 꽃말은 ‘명예’ 다. 옛날 임금의 성은을 한 번 입은 ‘소화’라는 궁녀가, 다시 찾아오지 않는 임금을 그리워하며 담장을 서성이다 죽었고, 담장 밑에 묻혀 임금을 기다리겠다는 유언에 따라 담장 밑에 묻었는데, 그 자리에서 핀 꽃이라 하여 궁녀 이름을 따서 ‘소화’ 라 불리었다고도 한다. 이로 연유된 꽃말은 ‘그리움’이다. 꾸며 낸 얘기겠지만 능소화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을 간절히 그리워하는 꽃으로 염정(艶情) 역사소설 『어우동』 등 문학작 품들에 등장한다. ‘기생꽃’이란 별칭도 있는데 이는 지는 순간 까지도 화려한 모양과 자태를 유지하기 때문에 기생의 정조 (貞操)에 빗대어 생긴 이름일 성싶다.

옛적 우리나라 사람들도 능소화를 무척 아꼈으나 서울에서는 능소화를 자주 볼 수 없었다. 따뜻한 지방이 원산지라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는 잘 자라지만, 서울에서는 겨울에 특별하게 감싸주어야 겨울을 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구 온난화로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세상의 능소화는 중국 원산인 능소화(Chinese trumpet creeper)와 미국 원산인 미국능소화 (Campsis radicans) 오직 두 종류만 있다. 그런데 요즘에는 두 종의 다양한 교잡종들도 있다. 능소화꽃은 도톰한 5잎의 꽃잎들이 트럼펫 모양으로 피는 주로 주황색 꽃이다. 때로는 더 붉거나 노란빛의 꽃들도 있는 아주 기품이 넘치는 화사한 꽃이다. 미국능소화는 능소화보다 꽃통이 더 가늘고 길며 꽃 빛깔 도 약간 칙칙하여 덜 화사하다. 그러나 번식력이나 생존력이 훨씬 강하다. 능소화는 꽃 통이 길어서 일반 벌이나 나비가 꿀을 빨 수 없고 원산지 중국에서는 주로 벌새가 꽃을 매개시킨다. 그러나 벌새와 비슷한 곤충인 각시나방은 긴 빨대로 능소화를 매개시킬 수 있어, 요즘은 벌새가 없는 우리나라 중부지방에서도 가끔 긴 갈고리 모양의 능소화 열매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능소화가 언제 들어왔는지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가끔 아주 깊은 오지에도 자라는 걸로 미루어, 아주 오래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능소화는 씨로도 번식하지만 주로 꺾 꽂이나 줄기로 번식한다. 한 번 자리 잡으면 그 주변 전체를 압도하며 자란다, 죽은 큰 나무에 능소화가 만발한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는데 능소화 줄기가 크게 번성하면 산 나무가 죽기도 한다. 능소화 줄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아주 가는 뿌리들이 엄청나게 많이 돋아난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잔뿌리들로 바위나 담벼락을 타고 어느 곳으로나 뻗어갈 수 있다.

능소화가 피면 여름에 접어들고 장마가 온다고 했다. 능소화는 한 번 피기 시작하면 그칠 줄 모른다. 날마다 새로 펴서 늘 새로운 꽃만 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능소화 덩굴 밑을 보면 그 처연함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시들지도 않은 생생한 젊디젊은 꽃들이 떨어져 있다. 그래서 능소화를 늘 젊고 늙지 않는 꽃이라 한다. 역사소설 『능소화』에서도 능소화를 청춘에 요절한 주인공의 남편을 형상화하기 위한 ‘객관적 상관 물’로 삼았다. 만발한 능소화 아래서 ‘원이엄마’의 편지를 떠올려본다. 화사하고 고결하며 화려한 능소화꽃들 앞에서, 지금 나도 이응태의 단명(短命)함을 받아들이기 무척 버겁다. “누가 날 꼬여내어 세상에 왔는지” 모르지만, “내 이럴 줄 알았다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는 『시경』 구절에서 헤어나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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