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호숫가에 비친 달에 바치는 노래

  • 입력 2023.10.19 14:11
  • 기자명 진혜인(바이올리니스트/영국왕립음악대학교 석사)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엠디저널] 올해 여름철 전국의 평균기온이 평년보다 1.0도 높았다고 한다. 더웠던 여름이었기에 음력 8월로 접어들며 서늘한 공기에 다시 한번 대자연의 순환을 체감한다. 가을의 한가운데인 추분(秋分)을 지나고 비로소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며 밤이 길어지는 절기로 접어드니 자연의 변화가 주는 감흥이 마음을 스친다. 길어진 밤만큼 그 시간을 밝혀주는 달에 감사를 전하는 계절에 와 있다.

달에 바치는 마음은 체코의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Antonín Dvořák, 1841–1904)의 작품에도 담겨있는데 오페라 제1막의 “달에게 바치는 노래(Mesicku Na Nebi Hlubokem)”이다. 달빛에게 짝사랑의 괴로움을 호소하는 노래로 번역에 따라 은빛 달님이여라고 하기도 한다.

드보르작의 오페라는 몇 곡의 아리아를 제외하고는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2016년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초연으로 선보였다. 당시 국내 성악가들로 이루어진 캐스팅과 체코어로 쓰인 오페라에 도전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의 1901년 초연 당시 포스터
드보르작의 오페라 루살카의 1901년 초연 당시 포스터

오페라는 드보르작의 아홉번째 오페라로, 시인 야로 슬라프 크바필(Jaroslav Kvapil)이 쓴 대본을 바탕으로 1900년에 완성된 3막의 서정적 동화 오페라(Märchenoper, 동화를 제재로 한 오페라)이다. 카렐 야로미르 에르벤(Karel Jaromir Erben)과 보체나 넴코바(Bozena Nemcova)가 쓴 동화를 토대로 시인 크바필 이 체코어로 가사와 대본을 맡았다. 이 작품은 1901년 3월 31일 지휘자 카렐 코바로비치(Karel Kovarovic)의 지휘로 프라하 국립극 장에서 초연되어 찬사를 받았으며 드보르작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 중 하나로 남았다.

당시 체코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이 작품은 이후 유럽에서도 인기있는 레퍼토리가 되어 체코 초연 10년 후 비엔나에서, 1935년 독일, 1959년 영국, 1975년 미국에서 초연되었다.

드보르작은 프라하 남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인 비쇼카(Vysočina Region)의 별장을 자주 찾곤 했는데, 별장 근처의 작은 연못에서 루살카가 나타나는 꿈을 꾸고 이 오페라를 작곡했다고 한다. 체코의 설화를 바탕으로 한 오페라는 인간을 사랑하여 인간이 되고 싶어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영원한 삶과 죽음 사 이를 떠도는 정령으로 남게 되는 물의 요정 루살카의 슬프고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었다.

메트로폴리탄오페라의 루살카에서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메트로폴리탄오페라의 루살카에서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

루살카는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물의 정령으로, 유럽 문화권에서는 님프(Nymph)나 운디네(Undine) 등으로 불리며 사람의 형상이거나 인어의 모습을 한다. 신비롭고 낭만적 소재가 등장하여 어떤 면에서는 1836년 발표된 한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를 떠올리게 하지만 오페라는 조금 더 잔혹한 느낌이 깔려있다.

간단한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물의 정령 루살카는 호숫가에서 몇 번 본 인간 세계의 왕자를 사랑하게 된다. 사랑을 이루기 위해 인간이 되고자 하여 아름다운 자신의 목소리를 반납하고, 마녀는 왕자의 마음이 변치 않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며 건넨 마법 약을 마시고 마침내 인간이 되어 왕자를 만나 사랑하게 되지만, 왕자는 다른 나라의 공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이 부분까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인어공주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후부터는 오페라에서 잔혹함이 드러난다.

동화에서 물거품이 되어버리는 것과 달리 루살카는 인간도 요정도 아닌 저주를 받은 혼이 되고, 뒤늦게 루살카의 사랑을 깨달은 왕자는 죽음과 저주의 키스를 받고 루살카의 품에서 죽어간다. 죽어가는 왕자의 비극을 바라보며 영원히 혼자 살아 가야 하는 루살카의 운명이지만 신에게 왕자의 영혼을 위탁하고 호수 깊은 곳으로 돌아간다.

이 비극적인 오페라의 1막 중 루살카가 부르는 아리아 '달의 부치는 노래'는 오페라 작품보다 많은 사랑을 받는 아리아로, 가사의 발췌는 다음과 같다.

“하늘 높이 떠 있는 달이여, 그대는 인간이 사는 모든 곳을 내려다 볼 수 있겠지.

잠시 멈춰 내 연인이 어디 있는지 알려다오.

내가 마음속에 그를 품고 있다는 걸, 누가 여기서 기다리는지를 전해다오.

그가 나를 꿈꾼다면 옛 추억이 그를 깨울지도 모르니까. 오, 달이여 제발 사라지지 마오.”

이 아리아는 사랑에 빠진 루살카가 달을 바라보며 왕자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전해달라고 달에게 호소하는 노래이다. 잔잔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감도는 호숫가의 정경을 하프의 우아한 표현으로 시작되고 서정적이고 애타는 아름다움이 담긴 선율은 루살카의 스토리와 함께 많은 이들에게 상징적인 곡으로 기억된다. 르네 플레밍(Renée Fleming),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 크리스틴 오폴 라이스(Kristine Opolais)와 같은 유명 소프라노들도 이 곡을 불러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다.

브루스 베레스포드 감독의 드라마 영화에서는 체코의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Lucia Popp, 1939–1993)의 목소리로 이 아리아가 흘러나오는데, 꽃으로 가득한 정원이 보이는 거실에서 데이지 부인이 평화롭게 자수를 놓을 때 흘러 나오는 곡으로 사용되어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이 알려졌다.

Witold Pruszkowski의 작품에 그려진 루살카_1877년 작품
Witold Pruszkowski의 작품에 그려진 루살카_1877년 작품

드보르작은 이 작품에서 섬세한 멜로디와 하모니 그리고 극적인 효과와 탄탄한 구성으로 그의 선율 작곡의 역량을 드러냈다. 깊어지는 가을, 깊은 밤 달빛 아래 애절한 마음을 쏟아내는 루살카의 마음을 이 곡과 함께 느껴보는 것은 어떨까. 가족이 함께하는 테이블에서 함께 감사하는 곡으로 선곡하는 플레이리스트의 한 줄이 되고 있다.

저작권자 © 엠디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